일시: 2026.4.19
말씀: 누가복음 24:25~27
제목: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I. 들어가는 말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가 자신이 예수님이 된 듯이 환자 머리에 안수하는 페러디를 SNS에 올려 자신의 결정을 미화시켰습니다. 그러자 그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지옥 불로 떨어뜨리는 페러디를 소개하였습니다. 엊그제는 레바논에서 이스라엘 군인이 예수님의 동상을 넘어뜨리고 망치로 머리를 부수는 동영상이 공개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장면들에서 종교를 자신들의 입맛에 재단하여 도구화하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지를 알게 됩니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종교를 도구로 사용된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예수님이 이렇게 조롱거리가 된 서글픈 현실 속에서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그저 바라 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대세라는 논리로 정의로움이나 정당성이 훼손 되고 많은 생명이 속절 없이 죽어 나가는 데도 기독교인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참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은 종으로서 희생과 사랑을 나타내신 분입니다. 그리고 오늘 날 우리 “가운데 오시는”분입니다. 그럼에도 폭력을 정당화하는 패러디의 주인공이라니 참 어처구니가 없고 분노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을 인간의 저급한 전쟁과 갈등 속으로 끌어 들이는 그 어떤 사람이나 무리나 나라도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그나마 교황 레오 14세는 그들을 겨냥하면서 “자신의 군사, 경제, 정치적 이익을 위해 종교와 하느님의 이름을 악용해 신성한 것을 어둠과 오물 속에 끌어들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뉴스가 차라리 신선하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서 일 하십니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부인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할 때가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겪는 상황 속에서 우리 “가운데”서 계시면서 언제나 방향타(方向舵)가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적어도 도덕이 무엇이며, 정의가 무엇이고, 믿는 자의 어떠함에 대하여 끊임 없이 생각하게 하시고 도전하게 하시며 이끌어 가게 하십니다.
II.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누가복음 24:13~35절 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나 확신하지 못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던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던 중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하신 모든 일에 대해서 혼자만 모르고 있다고 오히려 핀잔하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데, 마음이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이여” 책망하시면서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게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그들은 나중에서야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고서야 그가 예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애써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면서 뒤늦은 무안한 듯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즉시,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갔고 제자들에게 그 일을 알렸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오시는” 분입니다.
물론 “전에도” 오셨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2천 년 전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제도” 오십니다.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오른 쪽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심으로 오십니다. 그분은 “장차 오실” 분입니다. 이 땅에 다시 오실 분입니다. 미래에도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계신 분이라면 “언제나” 오늘에 우리 “가운데 오시는” 분 일수 밖에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 가운데 오셨던 예수님은 미래라는 오늘에 우리 “가운데”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극심한 고난으로 힘들어 할 때, 세상의 정의가 사라졌다고 여길 때, 전쟁과 파멸이 휩쓸 때, 죽음을 앞두고 고통스러울 때 예수님은 “고난 가운데” 오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엠마오의 두 사람처럼 “오시는”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며 실망하곤 합니다. 우리의 상황에 함몰되어서 고난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재에 겪는 일들이란 언제나 “고난”의 연속이라고 여기다가 나중에서야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가 무안한 나머지 억지로라도 마음이 뜨거워 졌다면서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땐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예수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1.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오신다는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은 물론 부활의 기쁨으로 소망을 갖게 하시는 의미입니다. 죽지만 다시 산다는 소망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하지만 그 “소망”은 “고난” 과 “죽음”이 어우러진 결과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다”는 것은 “고난과 죽음”을 주시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과연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난과 죽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가운데 오시는”예수님을 고통이라 여겨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때문에 소망을 얻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는 와서 죽으라고 명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동반하시면서도 생명과 소망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2.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나 현실이 각박하다거나 힘들다 하여서 “오시는”예수님에 대한 해석을 그 상황이나 현실에 맞게 달리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꼿꼿이 서 있는 “푯대”입니다. 그 푯대가 옮겨 진다면 등대 없는 밤 바다 를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곡해하거나 자기 처지에 맞게 해석한다면 분명히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내세우는데, 정치적 상황을 유리하게나, 주의 주장하거나를 위해서 도구화 한다면 안 될 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푯대”는 성경 뿐입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다른 철학이나 정치적 상황이 아닌 “모든 성경”으로 자신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기를 합리화 시키기 위하여 정치적 필요에 의해 예수님을 도구화 하는 것은 성경을 재해석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기준을 통해 “오시는”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세상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Ⅲ. 나가는 말
오늘날 세상이 예수님을 조롱거리 정도로 여기는 이유는 혹시 우리 성도가 예수님을 자기 욕망을 채워 주는 도구 정도로 전락시켰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통렬하게 자기 반성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으로 소망을 갖지만, 동시에 고난도 함께 받아 들여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죽음도 우리 것일 수 밖에 없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닮아 갈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 성도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서 역사하심을 알고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변화된 삶을 보일 때 우리는 예수를 본 받는 자가 될 것이며, 그것은 우리 “가운데 오시는” 예수님을 경외하는 진정한 성도가 될 것입니다.
모두 그런 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