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6.6.10
말씀: 창세기 15:1
제목: 상급의 원형(原形)과 이치(理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I. 들어가는 말
책을 많이 읽으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지식이나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간접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뜻도 다름 아닙니다.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이유도 우리가 가보지 않은, 경험하지 못한 것들,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기 때문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특히 종말에 대하여, 종말 후에 심판에 대하여, 부활에 대하여,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늘 성경을 통해서 그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과 심판과 천국에 대하여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될 뿐이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을 때 조금이나마 그것들을 유추할 수 있는 단 한가지 예를 들라면 “죽음”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는 만물을 죽음을 모든 피조물에게 숨겨 놓으셨습니다. 죽음과 부활과 심판과 천국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을 자연에서 예로 들자면 “씨”라 할 수 있습니다. 씨가 죽어서, 새싹이 나고, 자라서야 열매를 맺듯이, 부활도 심판도 천국도 죽음이 있고서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씨에 대한 비유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연도, 그 속에 사는 우리도 씨를 통해 살며 닮아 있습니다. 그것을 표현한 그림도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빈센트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 입니다. 그가 존경하던 밀레의 작품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하고 파종할 때가 아니어서 상상화라는 글을 읽을 적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건대, 한 농부가 땅에 씨앗을 뿌리는 가운데 황금 빛으로 익은 밀을 그려 넣고 찬란한 빛을 표현한 것은 이미 하늘에서 열매를 맺은 것을 표현한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개신교 목사이었고 자신도 전도사가 되어 선교하면서 목사가 되려고 했던 이력을 보면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어찌 됐건 우리는 “씨”를 연상하면 “심는다” 라는 떠올리게 되고 “심은 대로 거둔다”라는 이치(理致)를 떠올립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속담도 생각하면서 “열매”를 자연스럽게 떠올립니다. 더 나아가 살아 가는데 적용하여서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고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두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면서 선을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을 해야 “보상이나 상급 받는다”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기복적인 “인과응보” 사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런 사상은 우리의 뿌리 깊은 유교 사상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입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는 것은 변하지 않은 절대 자연 법칙입니다. 이 절대 법칙이 이(理)입니다. 이(理)가 기(氣)를 통해서 결과를 발현시킨다 라는 것이 이기론 사상입니다. 씨앗이 땅의 조건이나 기후나 환경이나 비등을 만나 열매를 뱆는다 라는 뜻입니다. 좋은 열매를 거두려면 좋은 씨앗을 심고 열심히 가꾸고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사실이지, 이런 경향과 사상은 아직도 우리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믿음과 신앙 생활에 많은 부작용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이단들이 이 땅에서 심은 공로로 장차 천국에서 더 좋은 보상과 상급을 받으니, 더 좋은 보상이나 상급을 받으려면 더 좋고, 더 많이, 더 크게 심자는 권면과 -어찌 보면 협박성(?)-말들과 논리를 적당히 교리에 섞어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사상에 물들지는 않았는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도 합당한 보상과 상급을 받게 된다는 말씀에 안주하고 있지 않은 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보상과 상급에 관한 말씀은 확증된 약속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살아 있고 끝을 맞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죽고, 나고, 자라고, 맺게 하는 것은 씨는 물론 우리 자신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뿐입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9) 하셨습니다.
우리는 씨를 닮았습니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주어진 시간을 살아 천국에 이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으로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 은혜로 삽니다. 그리고 죽음에 이릅니다. 그러나 죽지만 다시 살게 될 것이고 심판대에 설 것이며 자기의 상급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연합하여 기쁨으로 영생 할 것입니다. 물론 장차 이룰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우리 각자의 삶에 담겨 있습니다. 겨자씨에 장차 겨자 나무의 모습이 담겨 있듯이 씨를 닮은 우리도 하나님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땅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세상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곳입니다. 불의가 판치고 있고 세상이 최고로 여기는 가치는 우리가 갖는 가치와 정반대의 것들입니다. 세상의 가치는 세상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의 가치의 기쁨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힘들고 외롭습니다. 하나님은 끝내 그것을 넘어서 “기쁨의 단을 거둘 것이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II. 상급의 원형과 이치
오늘 본문에서 세상의 가치로 힘들어 하고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씨를 주셔서 이루실 것을 독촉하는 아브람에게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상급”이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모든 “상급의 원형”이 본문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나 문맥적으로 성경 전체를 통틀어 상급에 관한 말씀의 뿌리가 되고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분명히 좋은 상을 주시겠다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얻는 상급의 본질은 “하나님과 연합”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심판대에서나 천국에서 받는 “상급”은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목적으로 합니다. 따라서 각자가 받는 자기의 상급은 차등이 있다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행한 행위에 따라 차등 있는 상급이 있어야 한다면 -과장한다면- “하나님 자신”도 차등이 있는 것이요 천국에서 하나님과 연합도 차등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천국이 이 세상과 같이 차등이 존재 한다면 과연 세상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하나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당연히 하나님 뜻에 맞는 일을 해야 마땅한 것이지 장차 받을 상급 때문에 삶을 소비한다면 하나님이 뜻하시는 삶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하고도 완전한 연합”으로 천국에서 영생하는데 상급이 크고 작건, 많건 적건, 높건 낮건, 황금 면류관이건, 값싼 천으로 만든 면류관이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상급”은 우리의 공로의 대가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왜 “상급”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가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성경이 왜 그렇게 말씀하실 수 밖에 없는가 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이른바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하신 것은 박해를 이긴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 나라 이다” 라는 것을 “상이 큼”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파다 아볼로파다 게바파다 하고 싸우는 성도들에게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고전 3:14)라고 말씀에서도 자신의 공로로 쌓은 공적은 다 없어질 것이니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받는 것이 “구원” 이고 그것을 “상”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말씀도 믿음으로 받는 것은 “하나님 자신과 친밀한 연합”이고, 그것이 “상”이라 강조한 말씀입니다.
요한 계시록 22장 12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신 말씀에서도 성도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실 것이라면서 최후 승리를 “상”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상급”을 말씀하신 것은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끝까지” 살아 낼 수 있는 이치(理致)를 가장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인간의 말로 나타낸 사랑의 언어이지 더 좋은 상급을 받으려면 더 좋은 것을 행하거나 드리거나 세워야 한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동시에 이미 구원을 받은 자이니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방종을 경계하시기 위함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가도록 돕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법으로서의 “상급”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답하면서 살아 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미 이겨 놓으셨지만 언제 닥칠지 모를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브람처럼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아직 아들을 주시지 않아 불안하고 절망에 빠진 것처럼 삶에서 영적 절망에 시달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갈급하게 씨를 뿌리면서 받을 상급으로 위로와 힘을 얻고자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워 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내가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 하시면서 찾아 오십니다.
씨가 심어져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의 현재의 삶은 결국 천국에서 하나님과 연합으로 이어지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성화의 과정에서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는다”라는 것은 “인과응보”나 비교나 차등의 의미를 갖기보다는 “연합”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약속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보상이나 상급이 “약속의 표시”일진대 크거나 작거나, 많거나 적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과정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므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심은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지셨기 때문에 갚으신다는 의미로 “상급”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결국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약속을 하셨고 그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표시로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앗의 죽음이 열매를 맺듯, 우리의 현재의 삶도 죽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이 하나님의 온전한 연합을 목적으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표시”는 오늘에 우리에게 이미 와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사랑과 희생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그리고 “자유함”이 그 표시입니다.
Ⅲ. 나가는 말
본문 말씀의 “너의 큰 상급”이라는 말씀에 따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모든 “상급”은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뿌리가 되고 “기준”이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로주의” 나 “기복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상급은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에서 받을 영광을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보상이나 상급으로 알기 쉽게 나타내신 거룩한 “메타포”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믿음을 끝까지 지켜 천국에 이르도록 돕는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