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미의식(美意識)과 ‘자궁회귀본능’ / 마광수
‘자궁회귀본능 (또는 자궁회귀욕구)’은 인간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며 현실을 살아가면서 곧잘 느끼게 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무의식적 충동’의 밑바탕을 이루는 심리현상이다. 사람들은 어려운 현실상황을 타개해 나가기 어려울 때 생존의지가 약해지면서 과거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게 되고, 그 시절의 편안한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무의식적 욕구를 느낀다.
어린아이 때는 모든 것을 어머니가 시중들어 줬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었다. 어떠한 책임도 의무도 주어지지 않았고 단지 무엇이든 요구하기만 하면 되었다. 현실의 실제상황을 인식할 필요도 없었고, 자기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겠다는 의지조차 필요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곤경에 부딪쳐 번민과 갈등에 빠져들 때마다 어린아이 시절로 퇴행하고 싶은 무의식적 충동을 느낀다. 이런 퇴행충동의 극단적 형태가 바로 ‘자궁회귀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입문』에서, “만약 꿈에서 ‘이곳은 내가 알고 있는 장소다. 전에 한번 여기 왔던 일이 있다’고 생각되는 장소나 경치를 보며 감미로운 향수에 젖어들었다면, 그것은 반드시 여성의 성기 내지 자궁의 상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유형의 꿈은 사실 누구나 곧잘 꾸게 되는 꿈이므로, 프로이트의 주장에 비춰보더라도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궁회귀본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태아로 존재했을 때 모든 것은 평화롭고 안락하였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모든 영양물질이 저절로 공급되었고, 포근하고 부드러운 양수에 둘러싸여 한껏 편안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든 없든, 모든 사람들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본능적 소망을 잠재의식에 지니고 살아간다. 따라서 나는 인간이 문화를 꾸려가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의식(美意識)’에도, 이런 자궁회귀본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아름다움’과 자궁회귀본능이 어떻게 서로 연관지어질 수 있는 것일까? ‘아름다움’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역시 인간의 ‘육체미’이고, 그것은 지금까지 주로 여성미에 치중하여 논의되고 개발돼 왔다. 그런데 여성의 육체미는 대체로 뭔가 비정상적이거나 병적인 것, 그러면서도 우아하고 귀족적인 것과 결부되어 표출돼 온 게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병약미(病弱美)’나 ‘귀족적 우아미’는 자궁 속에 있는 태아의 ‘불완전성(不完全性)’이나 ‘비노동성(非勞動性)’과 통하는 것이고, 그런 태아 상태에의 동경이 미의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극히 적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오래 전부터 미인의 조건은 대체로 새하얀 피부, 개미처럼 가는 허리, 작은 발, 희고 가느다란 손, 병색이 도는 핏기 없는 얼굴 등으로 결정지어졌다. 또한 미인은 거의 다 ‘귀한 신분’과 연결되어 형상화되었다. ‘귀골(貴骨)’로 태어난 사람은 ‘천골(賤骨)’로 태어난 사람보다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돼 왔고,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거의가 예쁜 공주라야만 되었다.
‘노동미인’이란 말이 있긴 있다지만, 일을 많이 해 거칠어진 여성의 손이나 투박한 얼굴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긴 어렵다. 요컨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신분’이거나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체질’이거나, 둘 중 하나가 돼야만 미인이 될 수 있고 또 소설의 여주인공도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상 위주의 고대소설에서부터 리얼리즘 위주의 현대소설에 이르기까지, 그런 식의 미녀가 여주인공으로 나오지 않는 소설이 실제로 어디 있었던가? 소설의 여주인공이 꼭 미녀여야 한다는 것 자체는, 따지고 보면 문학의 기본 요건처럼 되어 있는 ‘개연성’을 상실하고 있는 개념이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소설의 여주인공이 미녀라는 사실에 아무도 의문을 느껴본 적이 없고, 문제를 제기한 문학이론가도 없다. 이른바 ‘민중문학’에 나오는 여주인공들도 대개는 다 미녀인 것이다.
민간설화나 전통적 근대소설에 나오는 ‘미녀’는 대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아주 고귀한 신분의 여자로 태어나 노동할 필요가 없는 유형이요, 다른 하나는 비록 신분은 천하더라도 빼어난 미모를 갖고 태어나 노동을 안 해도 되는 여인의 유형이다. 후자의 경우는 대개 돈이 많거나 권세 있는 남자의 눈에 띄어 신분이 상승되는 여인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두 유형의 여인들은 거의 다 ‘허약한 체질’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미녀의 조건은 일단 신분과는 상관없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되거나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뜻도 된다. 그런데 이 ‘가만히 있어도 되는 상태’야말로 인간이 모태 속에 있을 때의 상태와 흡사하다. 그래서 나는 미의식의 원천이 ‘자궁회귀본능’에 있다고 보는 것인데, 이런 미의식은 사실 여성한테만 적용(여성해방론자의 시각에서 보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한테도 적용된다.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즐기기 위해 인간은 권력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미의식’과 ‘권력욕’은 자궁회귀본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은 최소한 손과 발은 움직여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자궁 속의 태아처럼 꼼짝도 안 하고 지내기는 힘들다. 말하자면 태아와 비슷한 상태로 살아갈 수는 있지만(이를테면 하루 종일 누워서 지내는 것), 완전히 태아처럼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자신의 신체를 ‘움직일 수 없도록’ 불편한 상태로 만들어놓는 것이 필요해진다. 예컨대 손톱을 아주 길게 기르면 손을 쓸 수 없게 되듯이 말이다. 따라서 인위적으로라도 신체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권력의 상징이 되고 또한 미의 상징도 되게 되었다
예컨대 고대의 왕(王)들은 남자일지라도 손톱을 길게 기르고, 무거운 귀걸이와 목걸이를 사용하고, 무거운 관(冠)을 즐겨 썼다. 겉으로 보기엔 이러한 관행이 사치스러운 상징물로, 가난한 피지배계급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의 과시’ 정도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의 깊은 근저(根底)를 파고들어가 보면, 자궁회귀본능이 그런 관행의 심리적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따라서 ‘미의식’과 ‘자궁회귀본능’과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의 세 가지 개념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면서 ‘권력욕’으로 이어진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정열적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은, 누군가 자기에게 음식을 먹여주거나 자신의 행동을 돌봐주는 공상을 자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것은 권력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결국은 자궁회귀본능을 만족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시사한 심리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왕이나 권력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의 원칙을 충실히 좇았다. 그래서 손톱을 길게 기른다든지 하여 모든 일상생활, 특히 가장 즐거운 노동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먹는 일’까지도 모두 다 시녀나 시동(侍童)들의 손을 빌려 해결했던 것이다. 자신은 죽은 듯이 무심히 누워 있고, 시녀나 시동들이 손으로 음식을 떠서 먹여주거나 입 안에 머금어 가지고 와서 먹여준다. 이것은 자궁 속의 태아와 아주 흡사한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애초에는 왕이나 귀족들만이 남녀를 불문하고 길게 손톱을 기르던 관행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민주주의 개념의 확산과 더불어 일반인들에게까지 파급되게 되었다. 현대 여성들은 이제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손톱을 얼마든지 길게 기르고 색색가지 매니큐어를 칠할 수 있다. 자궁회귀본능이 ‘권력의 획득’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었던 전제주의 시대와는 달리, 이제는 그것이 권력과는 무관한 ‘미의식’에 결부되어 일반 평민들한테까지도 합법적으로 허용되게 된 것이다.
반면에 현대 남성들은 손톱을 마음놓고 기를 수 없게 되었는데, 이는 참으로 묘한 ‘불평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남성들은 사회 윤리가 요구하는 ‘씩씩하고 건실한’ 남성상에 짓눌려 권력추구본능 또는 자궁회귀본능을 미적(美的)으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현대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힘든 노동’이나 ‘병역의 의무’로부터 아직은 비교적 자유롭다. 그리고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자유’ 또한 남성들보다 훨씬 더 보장받고 있다. 그런데 현대 남성들은 그저 여성을 바라보며 자궁회귀본능을 간신히 대리해소(代理解消)시키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