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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및 수필]초추(初秋)의 양광(陽光) ...................................... 마광수

작성자광마|작성시간11.10.19|조회수1,519 목록 댓글 0

초추(初秋)의 양광(陽光) ............................... 마광수

 





오늘은 정말로 기가 막히게 청명하고 기분 좋은 가을 날씨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높푸르고 맑게 활짝 개어 있었다.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보다 더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자연의 선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초가을의 햇볕’이라고 말하기보다는 ‘初秋의 陽光’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유식함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같은 의미라 할지라도 한문으로 썼을 때 미묘한 ‘엿보기 심리’에 의한 쾌미(快味)가 곁들여지게 되고, 따라서 상징적 의미의 모호한 확산작용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자가 일종의 차폐물(遮蔽物) 역할을 해주는 셈이다. 그러면 같은 뜻의 말이라 할지라도 명확하고 상식적인 인상으로서가 아니라 반투명 유리 비슷한 것에 가려져 있는 물건처럼 무언가 우리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대상으로 다가온다.

나의 시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영어로 번역해서 읊으면 왠지 한글 원문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달콤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LET'S GO TO THE ROSE INN

When I am with you,
I hate to just talk.
I even loathe to pretend
To be a noble speaker.
Love is touch,
Love is feeling.
Let`s go to the Rose Inn.

When I am with you,
I hate to dine in a fancy restaurant
And to drive in a fancy car
With my empty pocket
Love comes in a moment
And becomes eternity
I only love body language without a word.
Let's go to the Rose Inn.

When you are with me,
You love to talk about
Philosophy, Life and Religion.
You even worry about the world
As if it is your fate.
Your coffee is Choice,symphony is Karajan.
I am dying to kiss your lips
But O, my love only wants to talk.
Let's go to the Rose Inn.

When I am with you,
I hate slow dance.
I even loathe disco.
I want to smell your feet
To be intoxicated by that smell.
I also want to comb your long hair.
I want to paint your sharp fingernails
With different colors.
Let's go to the Rose Inn.

Love is touch
Love is feeling

‘초가을’을 ‘初秋’라고 표현할 때 한자가 맡고 있는 역할과 마찬가지로, 영어가 그와 비슷한 기능을 해주고 있었던 셈이다. 한자든 다른 어떤 외국어든, 그 명료한 의미와 뉘앙스를 우리가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유행가 가사나 외국의 유행가 가사나 그 내용이 상투적인 센티멘털리즘으로 이루어져 있기는 다 마찬가지인데, 외국 노래 특히 프랑스의 샹송 같은 것이 더 멋지고 우아하고 기품 있게 들리는 것은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엿보이는 것, 우리가 안쓰럽게 엿볼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름답다. 실 한 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있는 여인의 누드보다, 슬쩍슬쩍 희미하게 안이 들여다보이는 반투명의 시스루(see through) 스타일의 의상을 휘감고 있는 여인이 더 섹시하게 보이는 것도 같은 이치에서다. 연애도 마찬가지, 한 사람을 차폐물로 이용하면서 또다른 한 사람과 안쓰럽고 감질나는 교제를 할 때, 즉 삼각관계 속에서 엿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한결 매력적으로 돋보인다.

한여름에는 그토록 얄밉기만 하던 뜨거운 햇살도 초가을로 접어들면서부터는 한없이 자애롭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맑게 개인 푸른 하늘은 더욱 높아만 보이고, 대기는 청정한 공기로 가득 차 사람들의 마음속 깊숙이까지 신선한 희망을 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가을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나뭇잎이 다 떨어져버린 늦가을의 스산한 풍경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햇살은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더해준다. 초가을, 반드시 초가을의 햇볕이어야만 한다.

우리나라 날씨는 춘하추동의 구별이 있어 좋다고는 하지만, 요즘은 어떻게 된 노릇인지 여름과 겨울만 있는 것 같은 생각조차 든다. 봄도 짧고, 가을도 짧다. 특히 그 지겨운 여름! 습도가 높고 불쾌지수가 높은 무더위가 6월 중순부터 9월 초순까지 계속되는 셈이니 나처럼 더위를 잘 먹는 체질의 사람에게는 정말 죽을 맛이다. 1년 내내 초가을 같은 날씨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 마음도 지금처럼 악착스럽지가 않고 좀더 순유(順柔)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쳐다보아도 절대로 눈이 부셔오지 않는 초가을의 밝고 따사로운 햇볕을 바라보자, 나는 갑자기 지난 여름 내내 학교의 연구실에서 겪어야만 했던 일이 생각났다. 빛…`…, 빛…`…, 빛…`…, 빛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모든 생명체들을 그리로 이끌어 들이는 것일까.

에어컨이 없는 학교 연구실은 여름 내내 무덥고 짜증나는 열기의 지옥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안에 틀어박혀 한여름을 지낼 수밖에 없는 신세인데, 언제나 가장 골치 아픈 것이 나방 따위의 곤충들과 여러 가지 벌레들이다. 아무래도 여름엔 저녁이 늦게 찾아오기 마련이어서 난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꾸부리고 앉아 원고를 끄적거리게 되곤 했다. 해가 진 뒤에야 비로소 조금 더위가 가셔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숲 곁에 지어진 문과대학 건물은 밤만 되면 어둠 속에 잠기게 마련인데, 내 방의 불빛을 보고 여러 가지 날벌레며 곤충들이 미친 듯이 열려진 창문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들어온 것까지는 좋은데(내 몸 여기저기를 물어대어 괴롭긴 하지만, 그래도 난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살충제 하나 안 뿌리고 참아낸다. 아,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께서 대자대비한 이 내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으련만!) 내가 창문을 잠그고 퇴근할 때가 문제다. 그냥 퇴근해 버리면 날벌레들이 방 안에 갇혀 미친 듯이 방황하다가 새벽녘에는 그만 지쳐서 죽어버린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해 보면 방안 여기저기에 비참하게 죽어 너부러져 있거나 아직도 목숨이 조금 붙어 있어 안간힘 쓰며 미칠 듯 버둥거리고 있는 나방 따위를 볼 수가 있다.

그 정상이 너무나 불쌍해 보이고 안타까워서, 나는 퇴근하기 직전 날벌레들을 창밖으로 다시 내보내려는 의도에서 부채를 들고 이리저리 허우적거리는 게 정해진 일과처럼 되었다. 그래도 다 내쫓을 수 없으면 방 안에 있는 불을 모두 다 끄고 앉아서 기도하는 자세로 그들이 제 발로 창밖으로 나가주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창 바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로등이 하나 있긴 있다고 해도, 그 불빛의 유혹만으로는 날벌레들이 좀처럼 방에서 나가주질 않는다. 창문이 열려 있는지 닫혀 있는지조차 그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유리창이 그들에게는 뻥 뚫어진 공간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옆에 창문이 열려진 공간이 빤히 보이는데도 그들은 유리 앞에서 왱왱거리며 가미가제 특공대식의 공격을 감행해 댈 뿐이었다. 다시 그들을 내쫓아 보내려고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또 10~20분. 그러다 결국 내가 지쳐버려서,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한번 죽을 목숨인데 그냥 내버려두자, 하고 생각하며 문단속을 다시 하고 연구실을 나서게 되는 게 한여름 매일 밤마다 치러내야 했던 가슴 아픈 의전 절차였다.

빛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덤벼드는 불나비들. ‘밝음’이란 과연 그렇게도 좋은 것일까. 나 역시 원래 기(氣)가 약하고 양허(陽虛)한 체질이라서 음식점이든 술집이든 간에 어두컴컴하게 조명을 한 곳보다는 환하게 밝은 곳을 좋아한다. 기는 양(陽)에 속하고 기허(氣虛)하다 보면 양허하게 되어 양의 상징인 밝은 불빛을 좋아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아무래도 내가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에 접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대체로 사람이 늙어간다고 하는 것은 양기(陽氣)가 점점 적어지고 음기가 점점 성해지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일수록 어두컴컴한 카페나 다방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직도 양이 과다하여 음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기가 약해서 그런지, 아니면 관음증(觀淫症)을 당당하게 즐기고 싶어하는 색정적 기질을 타고나서 그런지, 청춘시절에도 데이트를 할 때마다 항상 밝은 곳만을 찾아다녔었다. 막혀진 공간 속에서 여자와 벌거벗고 헤비 페팅(heavy petting)을 즐길 때도, 나는 언제나 환하게 불을 켜놓고 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한테는 불나비 같은 속성이 천부적으로 배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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