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프레시맨 시절 ...................................................... 마광수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처녀 총각 마음도 진달래꽃 빛깔처럼 활활 불타오른
다고 하는데, 내 지나간 시절을 추억해 봐도 확실히 나는 봄철마다 ‘사랑병’을 앓았던 것
같다. 특히 대학시절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나는 원체 몸이 약질인지라, 요즘엔 ‘봄’ 하면 환절기 감기 - 꽃가루 알레르기 - 황사 현상
같은 것들만 생각나고 낭만적인 이미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꽃들이 아무리 흐드러
지게 피어나고 여인들의 의상이 밝고 화사한 색깔로 변해도 그저 덤덤할 뿐이다. 봄마다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는 지독한 기관지염 때문에 별로 연애하고 싶은 유혹 같은 것을 느
껴보지도 못하겠다. 역시 건강은 나이를 따라가는 모양이다.
대학교 때만 하더라도, 아니 20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허약한 몸을 가지고서도
이리 저리 쏘다니길 좋아했고 별로 피곤한 줄을 몰랐다. 그때도 나는 늘 소화불량에 시
달렸는데, 주말이나 방학에 그룹여행이라도 떠나면 오히려 소화가 잘되어 준비해 갔던
소화제를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가져오곤 했다. 요즘엔 어디 여행이라도 가려면 위
경련에 대한 걱정부터 앞서는데 말이다.
그때는 위 기능 자체가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 단지 신경성 소화불량이었던 것이다.
신나게 기분전환을 하고 한바탕 놀아 제끼면 아무리 과식을 해도 음식이 쑥쑥 내려갔다.
그건 여행을 할 때만이 아니라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대학 1학년 프레시맨 시절의 봄, 그 풋풋한 정열과 핑크빛 희망으로 가득 찼던 아
름다운 꿈의 시절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해 봄의 나는 첫사랑을 경험했고, 한껏 낭만
적인 감상에 젖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긴 진짜 사춘기는 16세 전후, 즉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나이에 찾아 오는 것일 것이
다. 하지만 그때 나는 머리를 박박 깍고 시커먼 교복을 입은 모범학생이었고, 이성교제
따위는 엄두도 못 낼 처지에 있었다. 고1 때 국민학교 동창회에서 어떤 여자 동창생한
테 반해 몇 번 전화를 걸어 본 일은 있지만 곧 시들해져 버렸던 것 같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사춘기 때부터 미팅도 하고 데이트도 곧잘 즐긴다고 들었다. 하지
만 내가 사춘기였을 때는 사회 분위기가 그런 걸 허락해 주지 않았다. 국민학교 때 이
미 「금병매(金甁梅)」를 읽으며 독학으로 수음(手淫)을 시작했던 나였건만, 관능적
상상력과 실제적 사랑 사이에는 그만큼 머나먼 거리가 있었다.
1969년 3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내게 찾아온 첫 감동은 "여학생들이 참으로 예쁘구나"
하는 것이었다. 교복 입은 여자애들만 보다가 사복 입은 여대생들을 보니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대학 입학식 때 나는, ‘어쩌면 하나같이 예쁜 여자애들만 입학했을까’하고
마음속으로 놀랐었다.
한 일 년쯤 지난 다음에 보니 다 그저 그렇고 그런 외모들이었는데, 대학 신입생이었던
나의 눈에는 여학생들이 모두 천하절색으로 보였던 것이다. 우리 나라 속담에 ‘기갈(飢
渴)’이 감식(甘食)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확실히 나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여자에 지독
히 굶주려 왔던 모양이었다.
대학 1학년 시절은 거의 여자 쫓아다니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그때 내가 집요하게 추적
했던 여자는 고등학교 시절 교외 서클에서 만난 P였다. ‘한빛’이라는 명칭의 서클이었
는데 남학교는 내가 다니던 대광고와 서울고, 여학교는 이화여고, 숙명여고, 경기여고,
이 다섯 학교 학생들이 섞여 있던 모임이었다.
일종의 봉사 서클이었던 ‘한빛’은 여름마다 농촌봉사를 가고 평소에도 양로원이나 고아
원에 가서 힘 자라는 대로 노력봉사를 하는 서클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땐 P에게 별느낌
을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한 뒤 머리를 길게 기르고 양장을 쏙 빼 입고 나타
난 그녀는 나를 매혹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퍽 얌전한 성품의 아가씨였는데, 특히 호리호리한 몸매가 내 감상적(感傷的) 기분
속으로 파고들어 코스모스를 연상시켜 주었고, 또 나이가 나보다 세 살 위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중학교 때 병으로 2년을 쉬었고, 또 나는 국민학교를 남들보다 한 살 먼저
들어간 관계로 같은 학년인데도 나는 그녀보다 세 살이 아래였다. 그녀는 확실히 누나 같
은 면이 있었다.
편지로, 전화로, 나는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녀는 시골출신
이라 방학 때는 고향에 내려가 있었는데, 여름방학 때 P와 필사적인 담판을 벌이기 위해
그녀의 고향집까지 쳐들어갔을 정도였다. 그녀의 본가(本家)인 충북 제천(堤川)으로 (그
때는 시가 아니라 읍이었다) 떨리는 가슴을 안고 한껏 용기를 내 쳐들어갔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게 느껴진다. 지금의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낼 용기를, 난
그때 괴상한 오기를 가지고 부려보았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와 나는 2학기 중간 때쯤부터
는 고정적으로 데이트 하는 사이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내가 오매불망 P에게 사랑을 바치는 것을 부채질해 준 것은 그때 내 곁에 ‘사랑의 라이벌’
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역시 같은 서클 멤버였던 L이었는데 그는 나보다 더 큰 열
정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필사적으로 P를 추적했다.
그는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나의 우정을 추호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내게 울며 고백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도와 준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전의(戰意)를
가다듬게 되었다. 우정보다 애정이 더 먼저라는 사실을 그때 난 확실히 깨달았다. 오히려
그 친구 때문에 공연히 내 마음속에 괴상한 ‘사랑의 상승작용’이 일어나 나는 P에게 더욱
질깃질깃하게 매달릴 수 있었다. 확실히 남자가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는 데는 사랑 자체
보다 ‘승부욕’ 같은 게 더 작용하게 되나 보다.
L은 내가 P를 추적하고 있는 줄은 추호도 몰랐고, 계속 나에게 작전 지시를 바라며 응원
을 청할 뿐이었다. 아, 그때 내가 가졌던 사악하고 음흉했던 심보! 나는 L 앞에서 겉으로
는 시치미를 떼가며 우정 어린 작전지시와 상투적인 위로의 말, 이를테면 “여자가 별거냐
그깟년 잊어버려라!” 따위의 처방전을 주어 가면서, 속으로는 P가 더욱 아름답게만 느껴
져 미칠 듯한 소유욕으로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부끄럽고 부끄럽다. 우정은 우리가 주식(主食)으로 먹는 ‘밥’이요,
여자와의 애정은 우리가 부식으로 먹는 ‘반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지금으로
서는, 그때 내가 가졌던 그 졸렬한 승부욕과 L에 대해 품었던 이기적 계산이 섞인 우정이
한없이 뉘우쳐질 뿐이다.
지금 L은 내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있고, 나이를 먹을수록 진실된 우정이 참으로 어렵
다는 걸 느끼게 되는데, L은 내 몇 안 되는 소중한 친구 중의 하나이다. 그때 그 피비린내
나던 라이벌 관계를 그나 나나 이젠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다. 그는 그때 얘기를 애써 피
하려고 노력한다. 나도 그에게 지난 시절의 무용담(武勇談)을 들려 주고 싶지 않다.
아무튼 L로서는 너무나 처절한 사랑이었다. 난 그래도 P와 서클 친구의 자격으로 심심한
데이트라도 해 가며 그녀를 추적했는데, 그는 완전히 ‘짝사랑의 열병’으로 끝나 버렸기 때
문이다.
그때 나는 옛날 이야기 책에나 나오는 걸로 생각했던 ‘상사병’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한다
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여자의 매정한 마음씨가 어떤 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남자가 순정을 바쳐 짝사랑의 열병, 상사병의 병고(病苦)를 호소해 봤자 여자들은 더욱
냉담해질 뿐이다. 그네들은 오직 ‘힘세고 냉담한 새디스트’를 원할 뿐 ‘순정파 매저키스
트’를 원하진 않는다. 여자 앞에서 무릎 꿇고 사랑을 하소연해 가며 - 때로는 그녀의 발
바닥을 핥는 해프닝조차 벌여 가며 - 애걸복걸해 봤자 별수 없다. 여자에겐 오직 ‘작전’만
이 적용될 뿐이다.
물론 그때 내가 P에게 쓴 작전이래 봤자 뭐 크게 별달랐을 리가 없다. 다만 내가 L과 달
랐던 점은 내가 L만큼 상사병을 앓지 않았다는 것이요,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마스터
베이션(手淫)’ 습관으로 성욕을 그때 풀어 버렸다는 점이랄까. 나는 P와 벌이는 러브 게
임(love game)과는 별도로, 손톱을 길게 기른 여인, 관능적인 옷차림과 15센티미터 이상
의 굽 높은 하이힐로 나의 육체적 열정을 유린하는 그림책 속의 여인들과 별도의 치정관
계(癡情關係)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주로 애용했던 그림책은 미국잡지 [플레이
보이 play boy]였다.
내가 P에게 쏟았던 열정은 오직 ‘정신’뿐이었던 것 같다. 확실히 사춘기 때의 첫사랑은
육체적 욕구와는 별개의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육체보다 훨씬 더 고상한 것
으로 보이는 ‘정신’의 형태로 찾아온다. 그것이 바로 ‘비극의 씨앗’이다.
P와의 고정적인 데이트는 가을쯤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그녀의 집 (오빠, 여동생과 더불
어 양옥집 이층을 전세내 자취를 하고 있었다)에 수시로 드나들며 어정쩡한 연인 관계를
지속시켰다. 기껏해야 손목이나 잡아 보며 흥분하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풋사랑이었다.
확실히 P는 나이가 나보다 세 살이나 위여서 그런지 누나 같은 데가 있었다. 말하자면
난 그녀에게서 관능적 매력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 역시 너무나 점잖은 타
입이라 나를 육체적 애정의 상대로 대해 주지 않았다. 키스는커녕 뽀뽀 한 번 못하고 1
학년 첫 겨울방학을 보냈다면, 독자 여러분들은 믿어 주실까?
그때 나는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이나 찰스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 또는
헤르만 헤세의 「게르트루트」같은 소위 플라토닉 러브를 다룬 소설책에 심취돼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변태적 애정(육체관계가 전혀 없는, 즉 ‘touch’도 없고 'suck'도 없는
사랑이 오히려 변태적인 사랑이다)을 센티멘털하게 실험해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사랑은 이분법적(二分法的)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육체적 사랑은
더러운 것이고 정신적인 사랑은 깨끗한 것이라는 미망(迷妄) 속에 나는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밤마다 찝찝하게 벌였던 ‘마스터베이션 의식(儀式)’의 뒷맛이 개운했을
리 없다. 나는 나의 성욕을, 나의 관능을, 나의 긴 손톱 취향을 저주하며 마스터베이션
이 끝날 때마다 P의 자애로운 얼굴, 천사 같은 얼굴을 마음속 깊이 그려보곤 했다. 그때
나에게 P는 확실히 천사요, 성모(聖母) 마리아였다.
대학 1학년 때 내가 사랑을 바친 것은 P 하나뿐이 아니었다. 같은 연세대학교에 다니던
H도, 내 영혼과 마음을 사로잡은 여자 중의 하나였다. 그녀와의 사랑은 짝사랑으로 그치
고 말았지만, 어쨌든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애틋한 추억 속의 여인이 되었다.
H를 처음 본 것은 3월 초 대학 입학식에서였다. 무슨 과(科)에 다니는지, 이름이 무엇인
지도 모르는 채 나는 그녀에게 홀라당 반해 버렸다. 마치 서양의 동화책 속에 나오는 귀
엽고, 깜찍하고, 또 귀티 나는 공주님 같은 얼굴이었다고나 할까. 자세히 뜯어보면 전형
적인 미인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얼굴 전체의 이미지가 너무나 청순하면서도 서구적인
인상을 풍겼다.
H를 처음 본 순간 내 심장은 얼어붙는 듯했다. 그 뒤 나는 혼자서 끙끙거리며 희미한 기
억 속의 그녀 이미지를 쫓아 해롱거렸다. 하지만 그녀를 한 번 힐끗 본 것만 가지고는
(눈에 힘을 주어 그녀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볼 용기가 없었으므로. 그때나 지금이나 나
는 그저 여자를 ‘엿보기’나 하는 무기력한 관음자(觀淫者)일 뿐이다). 적극적으로 그녀를
추적할 용기가 없었다. 도대체 어느 과(科) 소속인지라도 알아야 할 텐데, 그게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아니, 설사 내가 그녀의 이름이나 과를 알았다 할지라도 난 결국 그녀를 미리부터 단념
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단지 첫눈에 반했다는 이유 하나만을 가지고, 그것
을 미칠 듯한 정열의 에너지 원(源)으로 삼아 여자를 추적해 본 일이 없다. 우유부단하
고, 게으르고, 용기 없고, 정력에 자신 없는 내 소심한 성격 때문이다. 난 그저 막연히
운명적인 상봉의 기회가 닥쳐오기를 기다리거나, 행여라도 여자 쪽에서 먼저 내게 접
근해 오기를 기다려 볼 뿐이다. 그래서 요즘도 난 별다른 로맨스를 갖지 못하고 있다.
그저 상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신경질적인 수음을 되풀이할 뿐……. 아. 이 얼마나 비
참한 인생이냐 ―!
H를 오매불망 밤잠 못 자가며 사모하기 시작하던 그 즈음에, 대학 입학 후 P를 다시 만
나게 된 것이 H를 잠시 잊어버리게 만들어 준 계기가 되었다. 나는 애써 H의 이미지를
지워 버리며 P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P는 내게 H만큼 강렬한 첫인상을 준 여자는 못 되었다. P는 다만 고교시
절 서클의 멤버였다는 이유로 나의 ‘손쉬운 접근’을 가능하게 했을 뿐이다. P와 끝까지
뽀뽀 한 번 못해 보고 관계를 끝내 버리게 된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P의 이미지가 강
렬한 관능으로 내게 다가오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다만 ‘사랑을 사랑하기 위해
서’혹은 ‘사랑을 연습해 보기 위해서’ P를 추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해 5월 끝 무렵에 H와 다시금 극적으로 맞부닥치게 되었다. 인연은 인연
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선배의 권유로 ‘기독학생회(S.C.A)’라는 교
내 서클에 입회했는데, H 도 입회하는 게 아닌가. 그 서클은 신입생 회원만 해도 100명이
넘는 큰 단체라 다섯 개의 부서로 나뉘어져 활동하고 있었는데, H는 서클에, 그것도 하필
이면 내가 속해 있던 <대학문제 연구회>에 입회하여, 입학식 때 봤던 그 천사 같은 얼굴
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고개 숙여 입회신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의 서클 활동은 신명이 났고, 서클 일보다는 온통 그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만 해도 서클 회원끼리 연애를 하는 것은 완전 금기로 되어 있어서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촌스러웠던 시절이다). 나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가슴만 태울 수 밖에
없었다. 오로지 그저 그녀와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지덕지해야만 했던 괴로운 시
간의 연속이었다.
서클에서 갔던 등산이나 야유회, 그리고 여름방학 때 인천에서 일곱 시간이나 배를 타고
갔던 외딴 섬 이작도(伊作島)에서의 5박 6일 수양회등, 그때마다 나는 H에게 향해 있는
안타까운 마음을 남들에게 들킬까봐, 겉으로는 오히려 냉담한 체 시치미를 떼가며 그녀
를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2학기 말쯤 돼서야 겨우 용기를 내어 장문의 편지를 써
서 그녀의 집으로 부쳤는데, 그녀한테서 회신은 오지 않았고 그녀는 서클을 그만둬 버렸
다.
내가 학교 안에서는 H에게 가슴을 태우면서도 학교 밖에서는 P를 만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내가 뻔뻔한 바람둥이 체질을 타고났기 때문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결국 ‘식사(食事)’와 같은 것이어서 평생 ‘오
직 한 사람’, 즉 ‘오직 한 메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요즘 와서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H는 그때 나에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양식(洋式)’이었고 P는 ‘가까이하기에
어렵지 않은 한식(韓食)’ 이었다. 대학시절에 나는 양식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다. 너무
비쌌고, 너무 기(氣)죽였다. 아무튼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나는 아무거라도 먹어야 했다.
H에게 더 용감하게 접근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쯤에서 내가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만
것은 무슨 까닭에서였을까. 아마도 그녀의 얼굴이나 성품이 내겐 정말 천사처럼 맑고 거
룩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던 셈이랄까. P만
해도 내겐 조금 만만하게 보였기에, 아마도 미칠 듯한 추적이 가능했던 것 같다.
요즘도 대개의 우리 나라 남자들은 섬뜩하리 만치 요염하고 야한 여자를 싫어하는데, 그
건 그런 여자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관능미가 겁나고 ―자기가 완전히 홀려 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 또 정력에도 자신이 없어 도저히 덤벼들어 볼 엄두를 못
내 그러는 것일 게다.
아무튼 그래서 내 프레시맨 시절의 봄은 두 여자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됐고, 그것이 청춘
의 봄, 청춘의 열병으로 연장되었다. P와의 만남은 2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 내 쪽에서 슬
슬 시들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5월 축제를 마지막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역시 첫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인가 보다. 첫사랑이란 결국 풋사랑이요, 처음으로 안경을 쓸 때 도
수를 잘못 재고도 모르는 것처럼, 어정쩡하게 어지럽고 요상망칙하게 흐리멍텅한 채로 지
나가 버리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은 P도 H도 모두 남의 아내가 되어 있다. 두 여자의 남편들은 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다. P는 라이벌이었던 L이 아닌 ‘한빛’ 서클의 다른 친구와 대학 졸업 직후부터 연애하여
결혼을 했다. 그녀는 결국 ‘한빛’서클을 통해 만난 세 번째 남자와 결혼에 골인한 셈이다.
‘3’이란 숫자는 역시 좋은 건가 보다. H 역시 졸업 직후 연대 선배와 만나 결혼을 했다.
그때만 해도 대학 재학 중에 커플이 맺어지긴 어려웠던 것 같다.
최근에 나는 두 사람의 가정을 각각 방문할 기회가 있어 새삼 서글프면서도 달짝지근한
감회에 젖어들 수가 있었다.
봄, 봄, 봄, 청춘의 봄! 이성을 보는 눈이 아무리 어리고 미숙하다 할지라도, 그래도 청춘
의 봄은 아름답다. 그 허망한 꿈과 무분별한 기대와 환상, 그리고 감상적이 눈물이 있어
서 아름답다. 아, 지금의 나에게도 한 번 더 청춘의 봄이 찾아와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프레시맨 시절은 이렇게 지나갔다.
(마광수 지음 <광마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