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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렸던 오기 / 마광수

작성자광마|작성시간15.09.05|조회수273 목록 댓글 0

내가 부렸던 오기 ..................................................... 마광수

1976 년 2 월쯤 되었을까? 내가 여자에게 좀 치사한 오기를 부려봤던 경험이 있다. 그때 난 어떤 여자를 매우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날 이따금씩 만나주기는 하면서도 좀처럼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 자기는 내가 그저 친구로만 생각될 뿐, 좀처럼 이성 으로 느껴지지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 자존심을 꾹꾹 눌러 참으며 그녀에게 나 의 사랑을 애소(哀訴)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까짓 게 언젠가는 나한테 두 손 들고 항복해 오고야 말겠지......" 하는 끈적끈적한 미련과 역시 그놈의 '오기' 때문이었다. 그 날도 우리는 이화여대 앞의 어느 으슥한 카페에서 만났다. 칸막이가 있는 술집은 아니 었으나, 조명이 워낙 어두컴컴하고 또 우리가 앉은 테이블이 아주 구석이었는지라 나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계속 떠들어댈 수 있었다. 음악 소리도 굉장히 커서 남에게 나 의 큰 목소리가 들릴 염려도 없었다. (내 목소리는 너무 우렁차서 술집에 가면 언제나 주 인에게 야단을 맞는다) 그 때는 나도 그 여자 친구한테 구애하는데 좀 지쳐었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 날만은 어떻 게 해서라도 뿌리를 뽑고야 말겠다는 야심으로 계속 하소연, 협박(?), 토론 따위를 반복적 으로 되풀이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반응은 여전히 냉정 그 자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죽 어도 나한테는 사랑을 못 느끼겠다고 버텨대는 것이다. 만나주는 것만도 감지덕지 고마워 할 일이지 언감생심(焉敢生心) 사랑은 뭐 얼어죽을 사랑이냐는 식이었다. 그 때 나에게 괴상한 오기가 발동했다. 하도 건방지게 약을 올리는데는 빈약한 내 몸뚱이 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옆에 앉은채로, 이년 너 죽어라 하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내심으로는, 아무리 그녀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으리만큼 냉정한 성격이었 지만 그래도 폭력엔 약해지고 말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좀 드라마틱한 제스처를 써야 만 뭔가 통할 것 같은 예감도 있었고.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아무리 목을 세게 졸라대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 안하는 게 아닌가. 비명도 안 지르고 나를 한심하다는듯 쳐다보더니, 자기의 이빨로 목 조르는 나의 오른손 손등을 용케 붙잡아 마구 깨물어대는 게 아닌가.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살점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결과는 내가 항복. 물론 그녀를 목졸라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고, 말만으로라도 "제가 잘 못했어요. 너무 건방졌나봐요" 라는 말을 들어보려고 했던 나의 치사한 오기는 수포로 돌 아가고 말았다. 한 달 동안이나 나의 오른손은 붕대 신세를 져야만 했고.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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