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친 말의 수기> -- 마광수 장편소설 | 베리스타 | 2011-09-08 |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5104756
희망이란 과연 유용한 것일까? 아니 희망이란 과연 있는 것일까? 극한 비관론자의 자아도취 같은 말이지만 아직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오지 못한 희망이란 놈을 알고 있다면 희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판도라는 인류 최초의 여자이자 모든 선물을 합친 여인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모든 남성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천하절색의 여인이라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에피메테우스와 결혼한 판도라는 신들에게 선물 받은 상자하나를 가지고 지상에 내려온다. 누구도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였지만 호기심이 많은 판도라는 상자를 열고 만다. 상자 안에 갇혀있던 것은 질병과 재앙, 그리고 희망이었다.
문제는 질병과 재앙은 재빠르게 빠져나와 인간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느림보인 희망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희망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재앙과 질병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희망만이 인간을 보호해줄 유일한 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희망마저 판도라의 상자를 빠져나갔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재앙, 질병, 희망이 뒤섞인 혼돈의 세계가 되었을까? 아니면 인간사회는 희망이 담긴 ‘달콤한 마취상태’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까? 희망은 인간이 생각했던 것보다 우호적이지 않다. 오히려 희망은 필요이상의 낙관론을 지배한다. 이는 현실이라는 한계상황을 회피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며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을 심어준다. 이게 마광수의 생각이다.
야한 남자 마광수 교수의 <미친 말의 수기>, 그의 전작을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그가 추구하고자했던 야한 책의 본능적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는 책이다. 그의 발상은 스스로 창의적이라 할 정도로 세상이 바라보는 시각과는 상당한 차이를 느낀다. 그래 이렇게도 사고할 수 있겠구나 란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마광수 교수의 에피소드는 술술 읽힌다. 그는 타고난 본능의 소유자다. 자신의 철학으로부터 민감한 성의 주제까지 거침없는 의견을 발산한다. 하지만 어느 것도 추하지 않다. 오히려 감추는 자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런데 왜 우리사회는 아니 학문풍토는 획일적이지 못하면 팽을 당하는 것일까?
그의 일관적인 주제는 본능이다. 인간은 본능을 속일 수 없다. 단지 억제하거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려할 뿐이지 결국 모든 것은 본능으로 회귀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야한 본능은 극히 일상적이다. 단지 그는 본능적인 자아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의 이러한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책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마 교수의 딴지걸기는 책의 제목에 대한 가벼움과 <프라하의 봄>으로 재해석된 영화의 가벼움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가벼움에 대한 해석을 인간과 사회로 구분을 짓는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무거운 존재로 인식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세상엔 가벼운 관계가 훨씬 많아 보이며 무거운 주제엔 별다른 관심이 없다. 하지만 사회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사회는 무거운 주제에 익숙하다. 특히 문학에서 창작의 가벼움은 무거움에 대한 도전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마음을 이끌고 있는 것은 가벼운 주제다. 절대적인 무거움과 상대적인 가벼움, 정작 인간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존재가치마저 잃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는 비판적이고 복종하지 않고 기존의 패러다임에 반항하는 이들에게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언론이 앞 다투어 그런 상황을 정리해 버린다. 사물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음에도 일방적인 사고를 강요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마광수 교수의 수기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해체시켜 버린다. 삶을 대하는 그만의 태도와 자세, 왠지 거북하지만 쿨하다. 그만이 전하는 생의 메시지가 본능을 조금이라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과 우정과 인연에 관한 그만의 에피소드를 가볍게 들어보는 것도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