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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심층적 상업주의, 그리고 그의 마광수 비판 / 강준만

작성자광마|작성시간12.04.12|조회수484 목록 댓글 0

이문열의 ‘심층적 상업주의’, 그리고 그의 마광수 비판 ............... 강준만

이문열도 누구 못지 않게 상업주의를 개탄하는 인물이니, 이문열에게도 물어야겠다. 우리 는 흔히 좀도둑만을 도둑이라고 생각하고 고위 인사가 높은 자리에 앉아 부당하게 그러나 점잖게 부를 축적하는 건 도둑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 사이비 기자라고 하면 지방의 작은 신문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이고 서울의 거대 일간지들에선 나올 수 없 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잘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문학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문열의 상업주의가 비판의 대상으로 잘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까지 공범으로 연루된 이른 바 ‘심층적 상업주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명민한 머리를 가진 이문열이 그걸 모를 리 없다. 이문열은 자신의 이중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한 가지 편리한 정당화 기제가 있는데, 그건 바로 그의 ‘위선적 구조의 순기능’에 대한 신념이다. 어디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볼까? 그는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 사회의 위선을 비판한 마광 수의 글이 “사회 일반의 동의에 바탕을 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며 비판적인 말 을 한다. 우선 그때 마광수 교수가 동아일보에 쓴 글을 보자. <우리 나라의 문화 상황에 국한해서 얘기하겠다. 21세기를 맞고나서 한국에 태어난 내가 가장 뼈아프게 절망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가 여지껏 끌어안고 있는 ‘수구적 봉건윤리’ 에 기초한 ‘문화적 촌티’다. 그리고 그런 ‘문화적 촌티’가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고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상이 바로 ‘성에 대한 이중성’과 ‘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 억압’이다. .......수구적 봉건윤리의 핵심은 ‘건강한 성’을 빙자한 ‘생식적 섹스’ 위주의 ‘성기독재(性 器獨裁)’에 있고, 성기독재는 항상 ‘유희적 성’이나 ‘개성적 성 취향’을 지향하는 ‘비생식 적 성’을 억압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는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은 모두 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식의 ‘자아분열’을 겪게 되고, 범국민적 자아분열 현상은 온갖 부정부패와 거짓말 을 난무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마광수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이문열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우리가 문명이나 문화라고 부르는 것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위선적 구조와 그 위선적 구 조의 순기능에 대해 조금이라도 유의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논지에 선뜻 동의하기 는 어려울 성싶다. 위선의 굴레에 갇혀 있는 것이 하필 성 표현뿐이겠는가. 폭력과 잔혹 취향, 물신숭배 등 엄연한 우리 본성의 일부이면서도 그런 위선적인 굴레에 갇혀 있는 열 정과 욕구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모든 법과 윤리가 바로 그 위선적 구조에 의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마교수의 개인적인 신조의 진술이며 동아일보의 견 해와는 다를 수도 있음이 밝혀져야 한다.> 어련하실까. 마광수로 말하자면 이문열이 "<즐거운 사라>를 읽고 나는 구역질을 했다. 그 소설은 당연히 법으로 작가를 처벌하고 유통을 막아야 할 불량상품이다"라고 비판한 소설가이다. 그리고, 또“이 나라에서 글쓰는 사람들 중에 가장 못마땅해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인데다 이문열로서는 “그가 어떤 공인된 절차를 거쳐 우리 소설 문단에 데뷔했는지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마광수를 소설가로 부를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문열! 참으 로 진기한 연구대상이다. 그는 과연 20세기의 인물일까? 어떤 주장에 대해 “사회일반의 동의에 바탕”을 두었는지 그거나 따지고, 소설가는 “공인된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 하는 그의 화석(化石)화된 두뇌가 이 나라의 작은 영역에서나마 문화적 리더십을 행사한 다고 생각하면 이 나라의 문화가 과연 어찌될 것인지 가슴이 아프다. 이문열이 말하는 ‘위선적 구조의 순기능’은 일리 있는 말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마광수가 말하는 위선이 과연 이문열이 말하는 위선과 같은 차원의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건 이문열이 자신의 상업주의에 대해서도 그렇게 자기 편리한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부가적으로, 마광수가 이문열을 '교양주의자'라고 비판한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교양주 의란 다름아닌 관념주의다. 마광수는 관념적인 소설을 싫어하여 한국 문단에서 소외된 왕따가 되었고, 이문열은 관념적 문학을 해서 돈도 벌고 문학권력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이문열의 장편소설들은 왜 그렇게 성공했던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답하기 위해선 부르 디외가 <예술의 규칙>에서 한 것과 같은 정밀한 문학사회학적 접근이 요구된다. 이는 해 방 이후 1970, 80년대 문학권력/출판권력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한국의 폐쇄 적인 출판, 문단 문화로 보아 현시점에서 객관적 자료의 입수가 가능할 지는 미지수이다. 해서 우린 우회로를 택해보기로 하자. 마광수가 <즐거운 사라>로 큰 물의를 일으켰을 때, 이문열은 마광수에게 <문학을 뭘로 아 는가?> 하고 호되게 비판한다. 이문열 논지의 핵심은 마광수 소설이 문학이 아니라, 문학 을 가장한 도색 소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린 그럼 이문열이 말하는 진정한 문학이 뭐 냐고 물을 수 있다. 이에 대해 그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교양"이다. 여기서 우린 이문열과 마광수의 서머셋 몸 찬양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혀 다른 성 향같이 보이는 이 두 사람이 오늘날엔 그다지 문학적 평가를 받지 못하는 서머셋 몸을 이 구동성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이 둘을 하나로 만든 것일까? 그것 은 서머셋 몸 소설이 가지고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성"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이문열 중단편 소설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들 대부분은 서머셋 몸의 영향하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문열 단편소설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윤리적 회의주의는 더욱 그렇다. 마광수 소설에서도 우린 흥미진진한 "이야기성"을 찾아볼 수 있다. 한데, 이문열과는 달리 그는 서머셋 몸의 세계관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벼움'과 '쾌락" 자체에 무게 중심을 둔 그의 입장에서 회의주의 역시 무거움을 가장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직접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즐거운 사라>는 그다지 야한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아 무 문제없이 지금도 팔리고 있는 <권태>라는 소설이 더 음란한 소설이다. 하지만, 왜 <즐 거운 사라>만이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바로 여기에 이문열 비판의 핵심이 있다. 음란한 묘사가 즐비한 <권태>의 기본 주조는 관념적이다. 한데, 그다지 야하지 않은 소설 <즐거 운 사라>엔 바로 이런 관념성이 부재한 것이다. 이문열이 생각하는 진전한 "문학"이란 바로 이런 관념의 유무에 기반하고 있고 이는 다른 말로 "교양"의 유무이기도 하다. <변경>에서 이문열의 분신으로 등장하는 이인철은 문학 서클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국문학을 완전히 무시했는데, 그것은 바로 "교양주의 전통의 결여"(11권: 118쪽)때문이었고, 그가 <광장>을 읽고 감동한 것은 순전히 최인훈 소설에 나타나 있는 교양주의와 관념성 때문이었다.(11권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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