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광야는 메마른 곳입니다. 광야는 거칠고 맹수가 우글댑니다. 이처럼 우리의 내면은 광야처럼 메말라 있습니다. 사랑이 메말라 있습니다. 정서가 메말라 있습니다. 인정이 메말라 있습니다. 도덕성과 영성이 메말라 있습니다. 점점 인간의 내면은 기술과 물질 문명으로 광야와 같이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아파트와 아스팔트 문화로 인해 내면은 사랑이 메말라 거칠어만 갑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세지는 메아리가 아니라 소리였습니다. 메아리는 희미하고 다시 되돌아 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메세지는 메아리에 불과했습니다.
백성들의 내면에 전혀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메세지는 소리가 되어 백성들의 심령을 꿰뚫고 들어갔습니다. 그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죄 문제에 도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과 질병 문제, 학과 공부와 성격 문제, 친구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문제는 내면의 죄 문제입니다. 신입생 형제 자매님들의 겉모습을 보면 지성과 낭만이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정욕, 탐심, 거짓, 위선, 미움, 시기심 등 죄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특히 신입생들은 X세대로 인해 감각적입니다.
반면에 극도의 이기주의로 고독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원만치 못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와 함께 삽니다. 눈동자는 풀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이 고통과 고독을 해결하고자 음란 만화, 영화, 비디오를 즐깁니다. 더 심하면 마약을 복용하여 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아름다운 말로 위로하고 동정을 하여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그들을 돕는 것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도우려면 상대방에 대한 섬세한 사랑과 목자의 상한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그를 살리는 길입니다. 그런데 회개하라 하면 다 도망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백성들 가운데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숨은 죄악을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란 단지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죄를 회개한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양들이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복음 역사를 이루려면 어느 정도 환경이 예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늘 환경을 탓하고 조건을 탓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들은 환경과 조건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역사 창조는 여건과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셋째, 세례 요한의 생활 양식(6). 6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약대털로 낮에는 의복을 삼고 밤에는 이불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가난한 자들이 먹는 석청과 메뚜기를 잡아 먹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아주 단순하고 검소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성전에서 마음껏 먹으며 좋은 가운을 입고 좋은 환경 속에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검소하게 시대와 구별된 생활을 했습니다. 바로 그의 능력은 그의 단순한 생활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금욕적인 삶이 아닌 사명을 중심으로 한 삶입니다. 생활인은 생활을 중심으로 살지만, 사명인은 사명을 중심으로 삽니다.
넷째, 세례 요한의 증거의 내용(7,8). 그는 메세지나 삶에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회개의 세례를 전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선전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예수님을 선전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당시 세례 요한의 인기는 날로 상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눅3:15). 그는 백성들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자신은 예수님의 신들메도 풀 수 없는 비천한 존재요, 예수님은 자신과 비교할 수도 없는 고귀하고 위대하신 분임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신분면에서 뿐만 아니라 하는 일에서도 근본적으로 다름을 증거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물 세례는 회개의 세례로써, 죄 사함을 받도록 마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죄를 사하여 주고 소멸합니다. 우리를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 성령 세례는 죄를 회개하고 자복한 자에게 임합니다(행2:38). 세례 요한은 물 세례를 주는 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위치와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자기를 낮추고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여자가 난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눅7:28). 우리가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을 지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다섯째, 복음 역사를 준비하신 예수님(9-13).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요단 강까지 먼 길을 오셨습니다. 백성들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가 없으십니다(히4:15).
그런데 예수님은 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첫째는 죄인된 인간과 동일하게 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인간과 함께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 있는 인간의 모습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인간과 똑같은 입장에서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갈4:5, 마3:15).
둘째는 메시야로서의 공포입니다.
예수님은 이 때까지 갈릴리 나사렛에서 조용히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메시야로서 공생애(public life)를 시작하셨습니다.
셋째는 역사 계승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독자적으로 복음 역사를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루어 놓으신 역사를 이어 받으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단절의 역사이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승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입니다(마1:1).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실 때 무슨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10)”
‘하늘이 갈라진 것’ 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하신 것’ 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위로부터 덧입으신 것을 말합니다.
성령 강림은 일찌기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의와 지혜의 신, 총명과 모략의 신, 재능과 지식의 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을 충만히 받으셨습니다(사11:1,2).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 듯 하심으로 예수님은 착한 일을 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행10:38). 성령은 지혜와 능력의 근원이요, 사단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로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이 음성은 복음 역사를 시작하시는 예수님께 큰 힘과 소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역사를 감당하실 때 많은 환난과 시련과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당한다 할지라도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실 수 있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 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수님이 사단에게 시험받으신 것은 성령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홀로 사단과 영적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을 보면, 40일간 광야에서 먹는 문제, 명예와 안일 문제, 영적 경배에 대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아담은 부족함이 없는 에덴에서 시험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험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아담은 사단에게 패배하여 모든 인류를 사단의 종으로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승리하심으로 모든 자에게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복음 역사는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사명인의 삶을 살고자 할 때 반드시 시험이 있습니다. 사단은 물질과 명예, 안일과 영적 교만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참소하고 대적합니다. ‘따뜻한 봄 날씨에 반드시 1:1성경 공부를 하여야 하는가? 세상 재미를 즐기며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는가? 꼭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하는가?’ 이런 사단의 유혹과 싸우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영적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위대한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단의 유혹과 참소와 대적은 우리의 힘과 지혜와 의지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을 덧입을 때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단의 세력을 파하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능히 사단의 대적과 유혹과 참소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구원의 복음, 하나님의 복음, 죄 사함의 복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복음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에게 시작됩니다. 이 새 봄에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