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1:14-28) 1.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5).”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구원의 복음, 죄 사함의 복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일군을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사명인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신 예수님(14,15). 14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요한은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시대의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헤롯 왕의 非行을 책망하다가 斬首(참수)당했습니다(막6:17-29). 이제 이스라엘은 희망의 빛이 꺼지고 절망과 좌절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조용히 갈릴리로 물러가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15).” ‘때가 찼다’ 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예언하시고 준비하신 구속 역사가 임했다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 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또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의 再臨이 임박했음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는 領土가 아니라 統治를 뜻합니다. 지금까지 세상은 사단이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폭력, 행음, 시기, 미움, 질투, 살인, 간음, 폭행, 분쟁, 거짓, 술수, 강포 등이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랑과 공의로 통치하십니다. 이로 인해 이 땅에는 평강이 임하고, 공의와 사랑, 믿음과 거룩, 온유와 양선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어두움과 슬픔이 물러가고 빛과 기쁨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습니까? 2) 회개해야 합니다. 15b절을 보십시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회개’란 방향, 삶의 목적, 가치관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나를 중심으로 한 삶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삶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하기 위해서는 죄를 애통히 여기고, 뉘우치고,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멀리하고 거룩과 성결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자는 육신을 쫓던 과거의 삶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육신을 쫓던 삶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갑니다. 중단 없는 전진입니다. 자기의 꿈을 깨고 하나님의 뜻을 좇습니다. 자기를 의지하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2. 둘째로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다’ 는 기쁜 소식입니다. ‘죄’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교만으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는 것입니다(롬1:21a).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 살아 남을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죄는 지독하여 금과 은이나 박사학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생명, 피를 요구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赦함이 없습니다(히9:22). 구약 시대에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짐승을 잡아 피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는 일시적이며 제한적이어서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1) 구약의 피의 제사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贖罪羊으로 삼으셔서 단번에 온전히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히9:11-15). 바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피를 흘리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때 봄바람에 눈 녹 듯이 모든 죄가 사하여집니다. 더럽고 추한 죄가 정결케 됩니다. 주홍 같이 붉은 죄라 할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는 용서의 능력과 죄를 정결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병든 마음과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의 광선이 됩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을 때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내 안에 알 수 없는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단순히 동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동의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와 믿음은 동시적입니다(행20:21).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는 회개하면 구원이요, 회개치 않으면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동시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가 하루에 몇 번이고 죄를 짓지만 회개하고 돌아와 복음을 믿으면 용서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죄를 정당화 해서는 절대로 않될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죄의식에 사로 잡히거나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됩니다. 3. 셋째는 하나님의 일꾼을 부르시는 예수님 1) 하나님의 일꾼을 부르시는 예수님(16-20). 예수님은 갈릴리를 지나가셨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예나 지금이나 물이 맑고 깨끗하여 고기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이 곳 주민들의 생업은 주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이 호수는 갈릴리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요,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며 제자 후보생을 직접 모집하셨습니다. ‘보셨다’는 것은 ‘깊이 관찰하셨다’ 는 뜻입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참으로 멋있는 청년들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빈둥빈둥 노는 청년들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겉모습보다 그들의 내면을 보셨습니다. 그들이 절망의 바다, 허무의 바다, 정욕의 바다에서 삶의 기쁨과 희망이 없이 살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그물을 던지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심령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나를 따라 오너라’ 는 뜻이 무엇입니까? 2)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현재 시몬과 안드레의 삶의 방향은 ‘자기’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란 직장에서 자기를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들의 생의 목적은 오직 자기였습니다. 자기 부모, 자기 아내와 자식, 좀 더 넓게 생각한다면 자기 나라,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 살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원치 않게 남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유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에 여유가 없고, 늘 긴장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서로 뜯고 찢기는 弱肉强食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참 쉼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자기 중심적인 삶은 행복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자기 중심적인 삶을 죄악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의 방향을 하나님을 위한 삶이요, 이웃을 위한 삶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3)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따르라’는 뜻은 ‘가까이에서 좇으라’ 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곧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란 배우는 사람입니다. 이를 볼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잠깐 와서 은혜나 받고 가거나, 병 고침과 인생 문제를 해결받고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곁에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일부분이 아닌 예수님의 전 인격,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 고난과 부활의 권능을 배울 때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만을 좋아하지 십자가의 고난과 그 부활의 권능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 낚는 기술만 배우지 예수님의 아름다운 인격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 생활을 몇 십 년 해도 그 내면이 천박합니다.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격과 십자가와 그 부활의 권능을 배우는 분들은 신앙 경력이 1년 밖에 안 되어도 영적으로 무게가 나갑니다. 그런 분들의 얼굴에는 행복과 기쁨이 젖어 있습니다. 어떤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생동안 예수님의 인격과 십자가와 그 부활의 권능을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생동안 예수님을 푯대로 하여 달려 갔습니다. 4) 부르심은 큰 은총입니다. 우리는 대통령으로부터 부름만 받아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하나님 아들의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거룩한 부르심이요, 영광스러운 부르심입니다. 세상의 권력 자들은 쓸모 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쓸모 없다 싶으면 내쫓아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르신 자들을 끝까지 돌보아 주시고, 책임져 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연약한 자를 강한 자로, 어리석은 자를 지혜로운 자로, 천한 자를 귀한 자로, 평범한 사람을 위대한 자로, 쓸모 없는 자들을 쓸모 있는 자로 키우십니다. 그래서 본 훼퍼는 ‘부르심 그 자체가 은총이다’ 고 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생동안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낚다가 물거품처럼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사라질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그들은 인류의 스승이요, 1세기 역사의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위대케 합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이 말씀은 옛 생활의 청산과 새 생활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반드시 죄악된 삶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식 하나 없이 늙어가는 한 村夫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세상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노예 백성으로 민족의 슬픔과 한을 품고 살 수 밖에 없는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가장 위대한 목자요, 장군이 되었습니다. 또 다윗은 이새의 말째 아들로 양똥이나 치며 형들의 심부름이나 하다 죽을 한 시골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주권자요, 메시야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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