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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 이 야 기 들

살아야 한다.

작성자comm95|작성시간04.09.23|조회수593 목록 댓글 0
'출정전야'라는 노래가 있다. 90년대 중간 학번쯤 되는 사람들에겐 "어 뭐였더라"하며 기억 저편을 더듬을 만한 집회歌다. '폭풍전야'와 헷갈렸던 기억도...

지금이 또한 폭풍전야인 듯싶다. 몇 시간 후면 또 얼마나 많은 언시생들이 이 엄청난 폭풍에 떼밀려 허우적댈지 모를 일이다. 몇년 동안 꽤 많은 폭풍을 맞은 나지만, 그래서 익숙해지고 단련됐을 법도 하건만 다가오는 태풍이 무섭기는 매한가지다.

출정전야를 부를 땐 대부분 앞에 시커먼 전경들과 대치해있을 경우였던 것 같다. 제법 많은 집회 경험이 있어 나름대로 딸려가지 않을 만큼 노련한 선배들이 주로 '사수대'라는 이름으로 맨 앞에 전경과 대치해 있었다. 새내기의 눈엔 그들의 뒷모습이 마냥 든든하기만 했었는데, 그들도 두렵기는 매한가지였을 터. 내가 본 건 항상 그들의 뒷모습뿐이었으니까. 내가 사수대가 되었을 때, 그들 아니 우리의 바짝 긴장된 눈을 처음 볼 수 있었고...

아! 이 폭풍이 언젠가 한 번은 꼭 한 번은 나를 비켜갈 거라는 바람과 기대를 먹고 산 지 수년째다. 나름대로 갈라진 제방도 살피고, 돈과 시간을 들여 축대도 정비했다. 시시각각의 일기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이번 폭풍은 나를 피해갈 거라는 예보에 환호도 해봤다. 나와 같은 지역에 살며, 이 모진 폭풍을 피해보자고 의기투합했던 '동지'들은 잦은 침수와 강풍을 겪다 못해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히 흩어진 상태다. 폭풍의 안전 지역으로 둥지를 옮긴 동지들은 이맘때면 안부를 묻기도 한다. "어떻게 이번 폭풍은 피할 수 있을 것 같냐? 야 너도 살 길을 찾아야지..." 그들의 말에 이사를 고려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목소리에 묻어난 고향에 대한 그리움 혹은 아쉬움이랄까. 그런 것들이 역설적으로 나의 이사를 막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기일까, 집착일까 아니 난 어쩌면 이 폭풍과의 싸움을 즐기고 있는 걸까?

여전히 폭풍이 무서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숱하게 푹풍을 맞아대면서 얻은 게 없는 것은 아니다. 폭풍은 계속된다는 사실. 그렇다면 언젠가 이 모진 폭풍도 한 번쯤 나를 피해갈 날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내가 폭풍을 피하는 게 아니라 폭풍이 나를 피한다. 질기게 살아 있어라. 특히 溺死를 조심하라. 내가, 우리가 할 일은 다음 폭풍을 피하는 행운을 잡기 위해 오늘의 폭풍에 살아남을 테크닉을 꾸준히 연마하는 것. 지쳐 부실한 축대를 때우지 않고, 피곤해 수로를 파지 않으면 생매장 혹은 오호호 익사다.

출정전야는 폭풍전야만큼이나 고요하고 또 긴장스러운 순간이다. 흥분지수도 엇비슷하다. 이번 폭풍은 몇 안되는 초대형 태풍이니만큼 기쁨과 좌절의 간극도 이 못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간 열심히 '폭풍을 피하는 법'을 열공한 분들, 한국사회를 앞에 놓고 새로운 출정전야를 부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열공은 했으나 폭풍을 맞아야만 할 수많은 언시생들, 폭풍은 또 온다. 그때 피하면 된다. 관건은 살아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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