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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 이 야 기 들

[[끼적임]]자소서 쓰다가

작성자월영|작성시간11.05.12|조회수4,849 목록 댓글 66

1.

제 부정확한 기억에 따르면 제가 입학 당시 등록금과 입학금까지 합쳐 180만원 정도였습니다. 이후 한 학기 등록금 150만원 정도였죠. 참고로 저는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의 문과대를 나왔습니다. 당시 우리학교 등록금이 싼 편에 속하긴 했죠. 제대하고 21세기가 되어 등록금을 냈을 때 200만원 가량 낸 것 같습니다.

 

2.

예전부터 대학교를 우골탑이라고 했습니다. 등록금이 비싸서 소 팔고 논 팔아야만 다닐 수 있다는 뜻에서였죠. 저희 집도 여유롭지 않은 형편이라 부모님이 등록금 마련하시느라 애를 쓰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 용돈이나마 벌어보고자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을 했는데 한 달에 50시간을 일하고 12만원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거기에 부모님이 주신 용돈 10만원을 합쳐서 한 달에 22만원 정도 가지고 용돈을 썼죠. 과외를 하면 좀 더 수입이 좋았겠지만 과외 할 시간에는 술 먹고 놀아야 했기 때문에 과외는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누굴 가르칠 능력도 되지 않았구요.

 

3.

방학 때는 택배 아르바이트나 식당 아르바이트 등을 하면서 목돈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등록금에 보탰습니다. 경제관념이 그다지 정확하지 않아서 대학시절 정확한 수입지출은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었는지는 기억합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 버는 과정이 하나같이 녹록치 않았던 탓이겠죠.

 

4.

뜬금없이 예전 등록금과 제 아르바이트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요즘 대학생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등록금과 그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그리고 그로 인해 다른 친구들보다 스펙을 쌓지 못해 미리부터 좌절을 토로하는 모습을 이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읽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입사하고 보니 생각보다 여유있게 공부를 하고 입사를 한 사람들이 많아서 솔직히 놀랐습니다. 주변에서 늘상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었기 때문이죠. 경제적인 압박에서 다소나마 자유롭게 대학생활을 영위한 친구들은 그 만큼 다양한 경험도 쌓았더군요. 그 경험이 입사과정에서 단순한 아르바이트 경력보다는 면접관들의 호기심을 더 유발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6.

우리 집이 좀 더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더라면 나도 대학시절 돈 버는 것에서 좀 자유로워 어학연수도 가보고 경력도 쌓고 학점도 더 높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 마음 한켠에는 자격지심도 생겼습니다. 경제적 고민을 하지 않고 살아온,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심리적 반발감도 생겼습니다. 너희들이 세상을 아냐? 하는 삐딱한 시선도 함께 따라오더군요.

7.

최근 이어지는 언론사 채용공고를 보면서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을 여유롭지 못한 상황의 후배님들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주변을 보면 다 자기보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것 같고, 또 그런 사람들의 취업소식만 들려오기에 점점 더 초라해지고 무언가 위축되는 그런 후배들에게 뭔가 말이라도 건네 보고 싶었습니다.

 

8.

하지만 그런 마음을 먹고 나서 글을 쓰려니 쉽게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일단 미친 등록금 버느라 힘든, 사회에 나가도 몇 년간은 등록금을 갚는데 미래를 저당 잡혀야 할 후배들의 사정이 제가 봐도 지금 이 사회의 경쟁시스템에서는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20대였을 때의 한국사회보다 지금 20대들이 겪는 한국사회의 경쟁시스템이 확실히 더 치열해지고 한 때의 낙오와 실패에 대해 기회를 주지 않는 상황으로 변화된 것을 부인할 수 없어서였지요.

 

9.

예전에 제가 쓴 글을 찾아보니 건방지게도 글을 잘 쓰는 방법. 뭐 이런 치기어린 글도 있더군요. 그 글에선 나름 경험을 통해 노하우를 적었던 듯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혹은 힘내라 격려하거나 지나면 다 좋아진다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등록금 버느라 고생한 아르바이트가 입사에 큰 도움이 되더라고도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10.

그래도 굳이 이렇게 자판을 두드려 글을 남기는 까닭은 그저 한 가지만 확인시켜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설사 모든 것에 비관적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싶은 것, 무언가에 대한 꿈이 간절히 있다는 것만큼은 세상 누구도 뺏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 간절함은 결과를 떠나 인생에서 반드시 경험해야 할 그리고 충분히 가치가 있는 `느낌`입니다.

 

자소서를 쓰기 위해 백색의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다 등록금 버느라 정작 쓸 경력이 없어 우울한 지금. 자신의 신세가 막막하고 속상해 한 글자도 못 쓰고 있을 후배님들이 이 글을 우연히 읽기를 바랍니다. 

 

간절하기에 당신은 남의 비교와 무관하게 삶의 밀도를 높여 살아왔다고. 그 사실만큼은 당신 삶에 자산으로 쌓이고 있고 누가 뭐라해도 스스로 떳떳하게 자긍심을 가져도 될 사실이라구요. 스스로마저 스스로에게 가혹하고 자학하지 말라구요. 정진과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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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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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porori527 | 작성시간 11.05.21 아 진짜 눈물........... 격려에 감사합니다 ㅠㅠ
  • 작성자돌아가자앞으로 | 작성시간 11.06.01 정말 고맙습니다. ㅠ.ㅠ 중반부부터 눈물이 또르르.. 다시 힘낼게요! 언젠가 저도 이런 글을 남길 수 있도록 다시금 추스려야겠어요 ㅠㅠ
  • 작성자굳은 살 | 작성시간 11.06.12 밀도있게 살아왔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잊고 있었던 큰 마음을 일깨워주셨어요! 감사합니다:)
  • 삭제된 댓글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월영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9.08 밀도를 올린 경험치는 당장 도움이 되진 않더라도 인생 살다보면 확실히 뭔가 버텨낼 수 있는 바탕이 되곤 하더라구요. 원하시는 결과 얻으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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