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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 이 야 기 들

오늘 저희 학교에 추적 60분 구수환 피디님 강연하러 오셨었는데 (강의내용 요약)

작성자울트라넘이야|작성시간11.09.27|조회수2,890 목록 댓글 29

 

좀 아쉬웠던게 그래도 후배들이랑 대화하는건데 허심탄회하게 하지 못하고

 

 

2시간 20분 가량을 강의로 꽉꽉 채우시더라구요 ㅠㅠㅠ 질문할게 많았는데

 

 

근데 사실 질문할 게 없기도 한게, 잘 생각해보면 강의 내용안에 예상 답변들이 다 들어가 있더라구요.

 

 

워딩을 다 풀긴 좀 뭐하고 간략하게 강의 내용 공유하고자 올립니다.

 

 

시간상 좀 짧게 묶다보니까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 있을수도 있는데,

 

그건 제가 표현을 잘못한거니까 저한테 지적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내용

 

 

 

 

1. KBS에 입사하고 1년 만에 강릉 지국으로 발령이 났다. 보통 출생지를 중심으로 발령이 나는데

 

난 대전에서 나고 자라서 학교도 대전에서 나왔는데, 뜬금없이 강릉으로 발령을 받았다. 왜 그런가 하니 당시는

충청과 강원이 같은 권역으로 묶여있었다. 뜬금없는데서 새로 시작하려니 막막하더라.

 

당시 강릉에는 고발프로그램이 없었는데,

 

집주인들의 횡포로(어떤 횡포인지는 졸다 놓침 ㅠ)

집을 잃을 위기에 놓인 노인들의 이야기를 아침 주말프로에 방송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목욕탕에서 방송분을 봤는데, 다들 그 보도를 뚫어지게 보면서 각자 속 시원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화면에 간간히 내가 나왔는데 다들 모르더라. 아무튼 그 때 피디로써 보람을 느꼈다.  

나중에 이 노인분들이 고맙다며 재차 전화를 걸어왔다.

 

그분들에게 그렇게 보도가 됨으로써 무언가가 일이 해결됐는지 물어봤다. 그건 아니란다.

아무도 자신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는데

그렇게 보도를 해주니 그게 그냥 고맙다는 것이었다. 그때 많은 생각이 들었었다. 기분도 좋고

 

더불어 (반값 등록금 문화제에 참가한 학생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가 지금 국장급 연차면서 현장에서 계속 일하는 이유는 저 눈빛 때문이다.

 

어떤 논리적 이유도 아닌, 아무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제발 자신의 억울함을 들어달라는 저 간절함 때문이다.

 

작가를 뽑을 때, "왜 작가가 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자신이 작가를 해야 하는 이유를 각자 잘 이야기 한다.

하지만 최근에(반값 등록금 문화제 같은) 사회적 이슈가 되는 장소에 직접 가봤냐?라고 물으면 답을 못하더라.

 

진정성은 현장에서 나온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2. 그리고 나서 다시 중앙지국으로 발령이 났다. 서울에 발령을 받은 후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지방대(사립) 출신에 대한 차별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다.

 

방 하나에 스무명 정도가 일을 하고 있으면 그 중에서 네다섯명은 서로 같은 학교 출신이었다.

(모두 4,5명씩 한 조마냥 같은 학교 출신으로 묶여있었다는 이야기인듯 합니다.)

 

다들 동문회도 같이가고

 

밥도 끼리끼리 먹고, 사람들은 저놈은 사교성도 없이 혼자 밥먹는다고 평가도 좋지 않았고

프로그램 평가할때도 유독 혼자 깨지고 프로그램 배정 시간대도 황금시간대랑 거리가 멀고 그랬다.

 

구체적인 증거? 라는건 없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인사고과에서도 이런저런 불이익이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방송대상을 받을 때도 이건 분명 내 작품인데?

공동수상으로 처리되서 상을 받는 순간에 난 그저 옆에 서 있기만 했다. 

 

 

3. 이런저런 차별을 겪다보니 오기가 생겼다.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기회를 탈 틈이 있다.

실력으로 승부해야 했다. 실력으로 승부하려면 차별화가 필요했다.

 

일단 작가가 쓰는 원고 라이팅을 내가 직접 쓰기 시작했다.

촬영분 편집도 모두 내가 직접했다. 당시에는 피디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하기 시작 했는데,

 

덕분에 도저히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내가 라이팅과 편집을 직접 해야 더 진정성이 느껴질 거 같다 생각했다.

 

연차가 좀 쌓이면서는 후배들의 일을 독려하기 위해 회사에서 먹고자고 일했다.

명문대 출신 후배들을 상대로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듣게 하려면 그래야만 했다. 처음에는 후배들이 내 이야기를 

과도한 간섭이라고 불만을 표시하고 했지만

 

나중에는 내가 조언한 현장경험들이 실상황에서 여러모로 적중하는것을 보더니 후배들도 내 이야기를 점차 수긍하더라. 

 

 

 

4. 추적 60분이라는 사회고발 프로그램을 하게 된 이유는 이런 차별에 대한 오기, 실력으로 승부해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프로그램에 헌신할수록 프로그램의 퀄리티도 높아지고 사회적 파급력도 점점 커져갔다. 그럴수록 권력과 점점 부딫히게 됐고

 

또 치열하게 싸워야만 했다. 어떤 때는 재벌과, 어떤 때는 정치권과 싸웠다.

 

수많은 협박과 회유를 받았다. 300억짜리 민사소송을 당하고 검찰수사까지 받았다.

검찰 조사를 받았던 그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집 앞에 누가 박스를 갖다놨는데, 안에 가위가 들어있기도 했다. 정체불명의 차가 미행을 해온 적도 많았다.

그래서 운전할 때 무의식적으로 백미러를 자주 보는 습관이 생겼다. 기억도 안나는 초등학교

동창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그거 보도하면 내가 죽는다"라면서 애원하기도 했다. 그땐 정말 환장하는줄 알았다.

 

사회고발 프로그램을 맡는다는 건, 남의 잘못을 파해친다는 뜻이다. 누가 나의 잘못을 파해친다고 할때 가만히 있겠는가

 

아주 친한 친구가 아니면 술한잔 할 수도 없고, 사람들은 내가 필요할 때가 아니면 연락도 하지 않는 생활이 지속됐다.

촬영을 요청한 사람들도 속으로는 "저저~저놈은 가까이 할 놈은 아니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촬영이 끝나고 나면 전화한통 해오지 않았다.

 

이런 생활을 버틸 수 있겠는가?

 

  

 

5. 그 이후 세계는 지금이라는 곳의 피디를 맡았다. 그곳에 간 이유는, 국제문제를 다루면서 한편으로는 우회적으로

 

한국사회와 정치의 현주소를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오기와 실력으로 승부하겠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외신 보도를 자기들이 취재한 것 처럼 가공해 보도하는 경향이 강했다. 직접 취재로 승부를 보고 싶었다.

 

피디를 하면서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와 하마스의 대장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이렇게 깊이있는 취재를 한 적이 없어서

 

내보내는 족족 특종이 됐다. 주로 중동을 다녔는데, 사실 운이 좋았던게, 피디를 맡던 2000년 당시에 911테러가 일어나면서

중동이 핫 플레이스가 됐다. 911 테러를 저지른, 비행기 납치범의 가족을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런 특종이 연달아 나오니

 

이제는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더라.

 

취재를 하면서 죽을고비도 많이 넘겼다. 헤즈볼라를 취재하려다가 CCTV에 발각당해 억류당하기도 하고, 포탄이 옆에서 막 떨어지는 곳에도 있어봤고, 사람 시신도 직접 만져보고 했다.

 

이후 연세대에서 저널리즘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밟았다. 처음보는 교수들이 전부 내얼굴을 알고 있더라. 강의를 듣는 기간 내내

맨 앞자리에서 지각 한 번 없이 수업을 전부 듣고 모두 A학점을 받았다. 일단 한번 붙어보고 싶었다. 소위 명문대라는 곳의 학생들과

 

내가 아무런 문제없이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각 한 번 없이 수업에 나간 이유)다른 한가지 이유는 다른 이를 비판하는 입장에 선 사람이 불성실한 행동을 한다면 누가 내 방송을 설득력있게 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나왔다.

 

 

6. (직접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울지마 톤즈]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이태석 신부님은

수단이라는 전쟁터에서, 그 중에서도 소외되고 버려진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다. 그들에게 이태석 신부는 아버지와 같다.

 

단순히 베푼것이 아니라 그들과 모든 것을 함께하고 헌신했다.

 

(환자들의 족적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것은 이태석 신부가 직접 환자들의 족적을 그린 종이들이다. 처음에는 왜 이런 데이터를

모아놨나 싶었다. 이것은 신발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프린팅이었다. 이 족적을 케냐로 보내 신발을 제작했다.

 

그리고 한센병 환자의 발을 직접 만져주면서 신발신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한센병 환자들은 당연히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이태석 신부는 오기와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달려왔던 나의 삶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취재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던 건 이때가 유일하다.

 

 

7. 취재도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헌신이다. 이태석 신부를 취재하면서 소록도에서 별도 취재를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 질문만 던졌을 때는 다들 나를 경계하고 짜증내했다. 근데 직접 악수를 하고 스킨십을 하고 자연스럽게 먹고 자고

 

하면서 지내다 보니 사흘째 되던 날 취재에 응하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이 서민정치를 외치는데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신뢰하지 않는건 그들의 행동속에 그런 헌신성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언론인이 되려면 뭘 해야 하나요? 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봉사활동 다니세요."라고 말한다.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무언가를 위해 현장에서 헌신해라. 이태석 신부처럼 멀리 갈 필요 없다. 소록도도 있고 많다.

 

그것은 굉장한 자산이 될 것이다. 장담한다.

 

KBS 채용 면접을 참관할 때가 종종 생기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사람이 현장에 대한 진정성을 가졌는지 아닌지 느껴질 때가 많다.

 

 

마지막으로 해줄 말은, 회사를 들어갈 때 눈을 낮췄으면 한다. 

 

바늘구멍만한 관문을 통과했다고, 남들이 알아주는 직장에 들어왔다고 그것이 행복한 삶을 말해주지는 않더라.

나만해도 탄탄한 직장에 국장급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과연 그 과정이 행복한 것이었느냐? 그건 아니다.

 

내가 국장 제의 거절하고 아직도 현장에서 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름있는 직장이라 하더라도 사는거 별거 없더라.

 

제일 좋은 것은 작지만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회사에 들어가 크게 키우는 게 아닐까 한다.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위에 보여준 헌신성을 갖췄다면, 어디 어느 직장에 나가서도 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헌신성에서 차별성이 나온다. 남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곳을 공격하는 것이 차별화의 시작이다. 그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언론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냐? 지역지에 들어가서도 얼마든지 개인의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거냐

라고 묻고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음. )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학교는 족보와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디서 무얼하든 학교이름이 따라다닌다. 지방대라고 해서, 자기 학교 비하하거나 심하게 욕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은 조상 얼굴에 침뱉는 것과 같다. 결국 자기 욕하는 이야기라는 거다.

 

 

 

 

 

 

헉헉, 뭐 이상이라는.....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도저히 다는 못적겠습니다.

 

 

주로 지방 사립대학 출신으로 사회에 나가 겪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 강의를 여기다 요약해 옮기는것도, 저를 비롯한 같은 입장의 지방대생들이 많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용을 공유하는것이 의미있을거라는 생각을 해서 남깁니다.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자격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하고자 할 때,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 차별화의 시작이다. 그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라는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와닿더군요. 아무튼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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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형광색스티커 | 작성시간 11.10.01 멋지시네요.
  • 작성자웃음소리 | 작성시간 11.10.01 고맙게 잘 봤습니다. 이런 분들의 말을 믿고 살아야지. 힘들어도 신나게!! ^^
  • 작성자세계지도의 비밀 | 작성시간 11.10.03 감사합니다. 정말 잘봤습니다.
  • 작성자zini | 작성시간 11.10.03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글이네요...감사합니다^^
  • 작성자고기자-♡ | 작성시간 11.11.30 이런글 너무 감사합니다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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