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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 이 야 기 들

저질렀습니다.

작성자눈부신햇살|작성시간12.07.26|조회수3,375 목록 댓글 25

거진 1년 전 쯤인가...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산다는 글을 올렸던 전직 기자입니다.

하하...전직이라니 굉장히 기분이 묘하네요.

6개월을 치열하게 고민했고 사직서를 내기까지 또다시 2개월을 끙끙 앓았는데...결국 저지르고야 말았습니다.

 

네, 저 백조 됐습니다.

 

총선때 바쁠 걸 알기에, 거기다 올해에는 몇 달 뒤 대선까지 정신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 내버렸습니다. 사.직.서.

 

총선도 지방선거도 대선도 몇차례 치렀으니 이번 선거까지 하고 그만둘까 생각했었지만, 곧 접었습니다. 마음이 떠난 마당에 부질없다 느껴졌어요.

 

일하는 가장 큰 기쁨, 사람. 그 기쁨의 색이 희미해지고 기자란 무엇인가 근원적인 물음이 내내 떨쳐지지 않았습니다. 꿈과 현실은 참 달랐고...어린아이가 아니니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기엔 이 직업의 무게가, 의미가 묵직했습니다. 남이 하면 기사감일진데, 내가 하니 관행이 되는 것들도 싫었고, 점점 더 시야가 좁아지는 걸 순간마다 체감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개를 무는 걸 찾고 행간과 행간 사이에서 비판과 비난을 읽어내려 하고...가끔은 불난 집 옆에서 부채질하고 싸우라고 부추기는 못된 시누이같다는 자괴감이랄까...그런 기분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덧붙여 상사와의 트러블까지 겹쳐 견디기 괴로웠습니다. 새로 오신 상사분은 좀...예민한 부분이 있으셨는데 지쳐있던 절 패닉으로 몰고가셨지요. 덕분에 그만둘 당시 자존감 바닥 자신감은 개뿔 투지는 개나줘였습니다. 어찌나 절 끔찍히 생각하시는지 야근에 현장취재에 지방 출장까지 차곡차곡 몰아주셔서 과로에 위염에 시력이상에 기타등등 다채로운 병들이 제 품에 안겼습니다. 병원에서 제명대로 살려면 일 좀 쉬라고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곧 있음 10년인데 참자참자참자...참을인을 수만번 썼는데 일 지키다 나를 못 지킬 판이라 질렀습니다. 과감하게 사직서를요.

 

후회? 합니다. 고민? 마빡 터지게 합니다. 하지만 모처럼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 대해 배우고 되묻습니다.

 

사직서를 내고 처음 몇주일은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주말에 일 안하는 것도 밤에 일 안하는 것도 빨간날에 노는 것도 모두 다.

정말 꿈꿔오던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혼자 여행도 가고 처음으로 휴가다운 휴가를 지냈습니다. 재밌는 드라마 챙겨보고 인터넷 게시판 보면서 낄낄 거리고 주말에는 부모님 모시고 자식노릇도 하고 남들 다 하는 일 잊고 살았는데 몇 년만에 하려니 신기한 기분도 들더군요. 그러면서 눈에 들어온 건...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더군요. 억울한 사연도 가지가지, 분통터지는 민원도 구구절절 발에 채이는 게 아이템이더군요. 기자라면서, 세상사 돌아가는 일에 빠삭하다면서 그렇게 생각했건만...전 헛똑똑이였습니다. 기자를 하면서 보지 못했던 진짜 세상, 날 것 그대로의 세상을 다시 배웁니다. 사회 초년생같은 기분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이쪽일을 하다보면 실제 생활에 어두운 경우를 종종 봤는데, 제가 그랬네요.

 

다시 기자를 하겠느냐 누군가 묻는다면 아직 잘 모르겠네요. 실은 제 패스워드와 아이디를 삭제하지 않은 채 제게 시간을 줄테니 좀 쉬고 돌아오라던 윗분들의 권유가 있었는데...막상 그 아이디와 패스워드가 삭제된 날은 가슴이 쿵 내려앉기도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어보려고요. 1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좀더 세상을 겪어보고 느껴본 뒤에 결정해볼까 합니다. 눈과 귀를 맑게 닦고 이것도 저것도 내려놓고 산 다음에 가슴이 끌리는 길대로 가려고요. 

 

기자를 안 하면 죽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아직 직업병을 버리지 못해서 누군가와 통화하다가 습관적으로 메모하고 부당한 게 있으면 관계기관에 내용 파악부터 하지만 차차 나아지겠죠? 굉장히 홀가분하고 좋은데 다만...일을 그만두고 안타까운 것이 하나 있다면...기자들에게 노트북이나 뷰파인더 너머가 아닌 보통의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런 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그 수혜를 더 많은 기자들이 받도록 만드는 일에 내가 보탬이 되도록 노력을 했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 정도.

 

기자를 꿈꾸시거나 현직에 계신 분들! 지치지 마시길...더 넓고 더 미세하게 관찰해주시길... 큰 정의는 결국 작은 정의가 모일 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주제넘지만 전직 기자가 몇자 끄적입니다.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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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산타너구리 | 작성시간 12.08.02 건승하세요^^ㅎㅎ
  • 작성자당면한것을당면할뿐 | 작성시간 12.08.10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는지 좀 더 써주실 수 있으신지요? 아니면 쪽지를 드려도 괜찮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눈부신햇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8.15 이제야 확인해서...쪽지 한번 주세요. 뭐가 궁금하신지는 모르겠지만...^^;
  • 작성자아멘 | 작성시간 12.09.09 아주 오오오오오랜만에 아랑 들어왔는데... 진짜 제가 느끼는 거랑 똑같네요 ㅠ 저도 기자 초년생.. 님과 같은 방황하는 인생... 하지만 님과 다르게 아직 결정을 못내린...
  • 작성자방황하는 청소년 | 작성시간 12.10.05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이네요. 머리 굴리지 않고 세상을 보면 더 많은게보일텐데. 기자가 된 후 머리만 굴리는 못된 버릇만 늘어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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