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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 이 야 기 들

요즘의 멘붕.

작성자HailofHell|작성시간13.02.12|조회수3,266 목록 댓글 19

#1.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은 책도 편식하면 안된다고 나를 나무라셨다.
나는 소설, 그저 소설만 읽었으니까. 장래희망은 늘 작가, 내지는 소설가였다.
하지만 곧 중학생이 된 나는 그 꿈은 굶어죽을 꿈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외교관, 내지는 변호사가 그 자리를 채웠다. 
뭐 그렇다고 당장 변한 것은 없었다. 여전히 문학, 또 문학이었다.
고등학교 땐 일본소설을 탐독했다.
오쿠다 히데오,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릴리프랭키
그리고 가끔은 만화, 영화, 드라마.

 

좋아했다. 너무 너무 좋아했다.
반짝반짝 빛이나는 문장들이 좋았다. 실재하지 않는, 하지만 실재하는 그 이야기들을 사랑했다.
그런데 계속 좋아하면 안될 것 같았다.
어떤 순간이 오면 여기서 등을 돌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건 그냥 재미있는 거지 그 이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밥 먹여 줄 수 없다는 건 현명하고 경험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2.
대학 원서는 2군데 썼다. 한 곳은 정외과, 한 곳은 영문과.
당시엔 정외과가 훨씬 더 가고싶었지만 영문과만 붙은 건 정말이지 신의 한 수 였다.
현대시, 현대소설, 다민족문학, 문화이론. 강의실에 앉아있던 매 순간이 행복했다.
문학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항상 반짝반작 빛이 났다.

2중 전공은 인문학 통합과정, 문과대학 수업들은 모두 취미가 맞았던지라 A가 쏟아졌다.

 

하지만 또 고질적인 불안감이 밀려왔다. 이 공부들은, 나를 먹여살려줄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래서 잘하던 2중 전공 때려치고 사회과학 통합과정을 신청했다.

경제학, 경영학, 정치외교학의 향연에 물론 학점은 수직낙하했다. 모두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취미에 안맞았다.

그래도 행정고시, 외무고시, 공기업, 로스쿨. 그런 게 내가 꾸는 꿈이니까 견뎌야한다고 생각했다.

 

평생 굶을 일 없고 잘 하면 성취감도 맞볼 수 있는 전문직. 그게 정답인 줄 알았다.

 

#3.
하지만 막상 진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자 나는 내가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경제학 수업에 치여 영문과 수업에 제대로 집중 못하는 것이

서러워 울고있었다. 경제학은 아무리 못해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전공은 달랐다.

좋아하는 걸 잘하지 못하는 건 참을 수 없이 서러웠다.

 

그만큼 좋아하는 걸 버릴 순 없었다. 이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꼭 문학이 아니어도 되지만 문학적인 일을 하고 싶었고, 꼭 창작은 아니어도 창조적인 일을 하고싶었다.

내가 하고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교집합을 찾아가다 보면 굶어죽지 않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 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었다.

그냥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기자, 혹은 카피라이터. 내가 찾은 교집합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조금 늦게 찾은 것.

가끔은 너무 늦게 찾은 것 같아 너무 불안하다는 것.

 

"모든 건 결국 글을 쓰는 거야, 보고서도 기획서도 모두 글로 쓰는 거잖아. 논술로 대학입학했던 네 글재주 무슨 일에서든 요긴하게 쓰일 수 있어. 꼭 글만 쓰는 일일 필요 없는거야."

 

아니 그렇지 않다. 분명히 다르다.
다르니까 이렇게 그 길을 못갈 생각을 하면 슬픈 거다.

 

준비하면서 깨달았다. 글 꽤나 쓴다는 소리 못들어본 사람, 이 바닥에 없다.
나는 평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카피를 쓰려면 문체가 탁월해야 할 것이고
기자를 하려면 필력이 탁월해야 할텐데
난 탁월한 게 아무것도 없다.

 

못하는 거 잘해보겠다고 낑낑대던 그 시간에 책을 한 권 더 읽었더라면
글을 더 연습했더라면, 생각이라도 더했더라면. 지금 이렇게까지 추락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더라면 지금의 나는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난 날들에 대한 후회가 매일 치민다.

 

#4.
요새는 대체 웃을 일이없다. 인턴은 언론사고 광고회사고 떨어지기 일수고
한번의 탈락도 쿨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스트레스 풀겠다고 술먹다가 어떤 남자에게 번호를 줬다.
처음으로 술먹다 만난 사람과 연락을 했다.
연락한지 3일이 되자 그는 나에게 수줍게 자신의 이상형을 밝혔다.
"속궁합 잘맞는 여자요."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너랑 자고싶은거라 꽥꽥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귀는 멍멍하고 마음은 먹먹하다.

뭐가 다 이러냐. 평소같으면 웃고 넘길 일도 아프다.

 

하고싶은 일을 못하면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한 가정이라도 꾸려야할텐데 그것조차 여의치않아 보인다.

그것조차가 아니라 애초에 이건 직업적 성취를 이루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야 알게됐다.

오른손잡이가 왼손 열심히 쓴다고 왼손을 오른손만큼 쓰게될 수는 없고,

왼손잡이가 오른손 열심히 쓴다고 오른손을 왼손만큼 쓰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수학을 너무 못해서 고등학교 3년 내내 언어, 외국어는 손도 못대고 수학만 공부했는데도

언어, 외국어는 1등급, 수학은 결국 3등급이었다. 논술 60% 찬스로 겨우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때는 모든 걸 내가 선택할 수 있었는 데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3학년때부터 시작한 제 2전공은,

본전공 영문학에는 손도 못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논술 찬스가 없다. 이미 나는 너무 녹슬었으니까.

 

지금부터라도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자고 결심도 해본다.
그래도 어느 순간은 눈물이 난다.
이미 같은 꿈을 꾸는 다른 사람들보다 너무 뒤쳐진 것은 아닐까?
내가 원하는 삶, 내가 원하는 길, 못 가게 되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불안감, 후회, 우울함. 모두 이겨야 하는 데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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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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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무엇이되든어떻게살든 | 작성시간 13.02.13 그럼에도 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가진 매력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모두 힘내요! 화이팅
  • 작성자1980 | 작성시간 13.02.14 하하. 비슷하네요. 전 27살(남)에 깨달았는데.. 지금은 어케저케 변변찮게나마 글로 먹고 살고 있어용. 차이라면 이전에는 더 먹고 살기 힘든 걸 하려다 타협해서 온 곳이 기자라는. 괜찮아요. 좋아요. '세상공부.글공부'로 먹고살겠다는 소박한 꿈이라면.. 기자도 할 만 할 듯 해요. 제 경우만 보면.

    아. 나중엔 진짜 글로만 먹고 살고 싶다는..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뭐 노력해야죠ㅋ 고고
  • 답댓글 작성자홍준 | 작성시간 13.02.14 곧 따라잡겠습니다. 현직 기자님^^
  • 작성자on air | 작성시간 13.02.16 제 처지랑 너무 비슷해서 완전 공감하면서 읽었어요^^ 글 잘 쓰시는걸요... 저도 제가 못하는거에 매달리기보다 제가 잘하는걸 더 개발시킬걸...하고 얼마전까진 후회했답니다. 하지만 그 경험또한 저에게 어떤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요^^
  • 작성자일찍자자 | 작성시간 13.02.17 대학 때는 모든 걸 내가 선택할 수 있었는 데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저도 이걸 7학기가 되어서야 깨달아서 좀 후회가 되는데.. 이제라도 안 게 어디냐며 혼자 위로하고 그래요.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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