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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 이 야 기 들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작성자1980|작성시간13.03.02|조회수3,978 목록 댓글 7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기자 생활한 지 만 4년 반. 새삼 기자란 직업은 뭘까 생각해 봤습니다. 절대적인 능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연봉을 받을 가능성이 높고, 예전만큼 대우도 못 받는 직업, 기자. 왜 아직도 사람들은 기자직에 관심을 갖는 걸까요. 전 왜 기자생활을 하는 걸까요. 물론 아직까지는 마냥 재밌어서 한다고 하지만 저 역시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히겠죠. 실제 주위에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혼란스러워하거나 재미를 잃어버린 기자도 많습니다.


전 일단 예전부터 기자가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일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현실 속에선 너무 이상적이잖아요. 직업윤리 정도라면 모를까 본질은 아닙니다. 공무원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고 기업인이 주주나 소비자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이딴 식. 현실 속 기자들 대다수는 그닥 윤리적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게 비윤리적이지도 않지만.

 

참고로 제 경우 단순히 ‘글로 먹고산다’는 전제로 기자 일을 준비하고 시작했다죠.

 

물론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한다’는 좋은 명분이 있습니다. 사실 이 얘기가 가장 기자직의 원론적인 정의에 가깝겠죠. 자기들끼리 정보를 독식하는 정치.행정.사법.문화.경영 등 특정 전문분야의 정보를 대중과 이어주는 매개체, 기자. 캬. 표현 좋네요.


TV든 인터넷이든 신문지든 이런 매개체를 토대로 생업에 바쁜 일반 국민이 알아야 할 내용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게 가장 듣기 좋은 기자직의 정의겠네요. 제가 언론관련학과를 나오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학문적으로도 아마 이렇게 가르치고 배우지 않을까요.


역사 속 최초의 신문 발행인은 누굴까요. 아마도 로마 시대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기원전 1세기니까. 전업기자가 아닌 정치인이긴 하지만 카이사르는 로마의 의사결정권을 독점하던 원로원(국회의원)의 회의록을 대외적으로 공개해 의사결정권이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원로원을 견제합니다. 같은 이유로 전쟁 수행 중에 원로원에 제출할 보고서를 곧바로 대중을 위한 책으로 펴냅니다.


좋습니다. 국민의 알권리 충족. 명분도 서고 폼도 나면서,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정보만을 제공하는 현실 언론과의 속성과도 부합하네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 역시 원론적인 직업윤리라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모두가 이걸 지켜야 좋고 또 많이들 그러려고 노력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란 게 워낙 다양하니까요. 막말로 요즘 같아선 돈 한푼 안 주는 국민이 뭐가 사랑스럽다고 이들의 알권리를 충족해 줍니까. 댓글로 욕 먹어가면서. 그래서 기자 입장에서, 조금 다르게 생각해 봤습니다.

 

기자란 표현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제가 시작한 경우와 비슷한데요. PD나 (편집)기자, 아나운서나 카메라/방송기술직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말 같기도 해요. 언론인이 매력적인 건 월급을 꼬박꼬박 받습니다. 원래 창조자의 절대다수는 배고프거든요. 물론 이렇게 치면 기업의 마케터, 카피라이터, 애널리스트, 대변인도 있죠. 월급 받는 창조자. 하지만 언론계 종사자가 이들에 비해서 운신의 폭이 더 큽니다. 꼭 자기가 원하는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비교적 자기 의도대로 표현할 수 있죠. 대중이 원하는 것에 한해.


저 역시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뭔가를 표현하고, 그걸 사람들이 공감해주는 가운데서도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온다는 즐거움에 기자생활을 합니다. 물론 기사를 쓸 때 ‘이 내용이 국민의 알권리에 도움이 되나. 잘 전달되나’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아주 가끔이에요. 그보다는 자기 만족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사실 매한가지 얘기지만 제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더 와닿더라고요.


그렇다면 기자를 비롯한 언론직은 ‘(배 곪지 않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셈이죠.


하지만 기자란 직업을 이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매우 중요한 요소가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취재. 기자는 심층이든 잠입이든 웹서핑 혹은 구글링이든 혹은 기자실에 앉아서 전화를 돌리든 어떤 방식으로든 취재를 합니다. 기자의 능력을 판단하는 가장 큰 기준은 얼마나 더 정확한 고급 정보를 캐 오느냐는 취재력입니다.


좋은 언론이 단독기사를 쓰며 정보의 가치를 높일 때는 물론이거니와 못된 언론이 광고주들을 협박할 때, 심지어 기자 개개인이 출입처에서 밥 한끼 더 얻어먹고자 할 때도 취재력, 즉 정보력이 핵심입니다. 정보력이 곧 내 만족이요, 내 밥줄이자 연봉협상의 근거입니다. 특히 요즘 같이 언론계가 복잡할 때엔 더더욱 그렇습니다. 나중에 정치인이 되겠다, 기업이나 개인사업을 해 한몫 벌어보겠다.. 딴 생각을 하는 사람도 정보력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정보력이 없는 기자는 앙꼬 없는 찐빵.


물론 잘 취재해서 이를 잘 표현하는 사람이 궁극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나중에 잘 취재하는 기자와 잘 표현하는 기자 양 부류로 나뉘더라고요. 굳이 선택할 수 있다면 잘 취재하는 기자가 현실 속에선 압도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습니다. (개중에는 줄 잘서는 사람, 잘 베끼는 사람 등등도 있지만.. 생략ㅋㅋ) 간혹 잘 표현하는 기자가 주목받기도 하지만 극소수일 뿐 대부분의 인정받는 기자는 정보력을 갖춘 경우입니다.


즉 기자를 생활 직업인으로 보면 정보꾼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정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정보로 먹고 사는 프로 정보꾼. 정보원을 관리하고, 정보를 취득하고, 이를 취합하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이를 활용하는 일을 합니다. 국민의 알권리라는 그럴 듯한 명분 아래서 자신이 가진 정보를 본인 혹은 조직의 이익에 최대한 부합하게 활용하는 일. 이게 슬픈 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현실 속 기자는 이런 모습인 것 같습니다. 물론 정보를 좋은 쪽으로 활용하는 언론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보면 청와대 비서관, 국회 보좌관, 외교관, 브로커, 상사맨, 스파이, 기업 홍보팀(기획조정실) 국정원 직원 모두 프로 정보꾼이란 점에선 동종업종이죠. 취합한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차이일 뿐. 다만 언론은 적절한 시기에 이를 대중에 널리 알릴 수 있다는 점. 다른 어떤 정보꾼도 정보를 보편적으로 알리기 위해선 언론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겠죠.


참고로 노련한 기자는 많은 정보를 알지만, 아는 정보를 그때그때 다 활용하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 취재원과 지속적인 신뢰관계를 유지할 수 없거든요. 다양한 상황을 고려해 적기에 정보를 오픈합니다. 물론 제 경우 정보를 알아야 이걸 활용하든 말든 하겠죠ㅋㅋ


지금까지 생각을 쭉 정리해 보면, 제가 생각하는 기자의 정의는 이렇네요. ㅎㅎ어때요?


‘프로 정보꾼. 특히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킨다는 대의명분 아래, 월급을 꼬박꼬박 받으며, 비교적 자신의 의지가 많이 반영된 콘텐츠를 대중에 전달할 수 있다. 사적 기관인 언론조직에 속해 있으나 대중에게는 공공의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는 직업윤리 의식을 요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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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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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히스토리시커 | 작성시간 13.03.03 과연 대의명분과 사심의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가.... 싶네요
  • 작성자흠냐리 | 작성시간 13.03.03 기자가 정보생산자라는 말은 처음 듣네요..
    기자는 정보영업직입니다
  • 작성자공중전화 | 작성시간 13.04.03 아..왜 난 이 글을 이리 늦게 읽었을까요?
    기자는 정보생산자도, 정보영업직도 맞지만 정보홍보직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 작성자willly | 작성시간 17.07.18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 작성자종이와펜 | 작성시간 23.01.09 국민이 뭐가 이쁘다고 알권리를 충족시켜 줍니까? 이 대목 너무 공감합니다. 댓글 쓰는 꼬라지들 보면 다들 망했으먄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나죠.. 그리고 도대체 정보력은 어떻게 키우는 걸까요. 누군가는 인맥이라고들 하는데.. 버닝썬게이트 최초 보도한 이문현 기자처럼 한따까이 하고 싶지만 현실은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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