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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 이 야 기 들

영화 변호인을 보고

작성자희망있는슬|작성시간14.01.11|조회수808 목록 댓글 3

영화 변호인을 보고 문득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나 많은 고민으로 머리가 무거웠다. 


내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한 계기는 고등학교 역사수업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때는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의 의무가 지금보다는 다소 약했고, 내가 다니던 학교의 역사 선생님은 실제 정치현상과 역사를 엮어서 설명해주셨다. 특히, 근현대사 시간에는 정치인들 관련 비화나 야사 등에 관한 얘기도 서슴없이 얘기하곤 하셨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권력의 감시자로서의 언론의 역할을 고민하고 막연하게 기자가 되야겠다고 꿈꿨을 때가. 나는 운 좋게도 고3 올라가는 겨울방학에 지방교육청이 주관한 역사캠프 등의 일환으로 금강산관광에 다녀왔다. 부모님은 입시생이 무슨 관광이냐며 싫어하셨지만, 그 여행이 내 마음을 적셨다. 


내가 살아보지도 못했던 70년대의 분위기를 풍겼던 38선 초입에서는 버스로 올라타 승객을 검열하던 군인들의 매서운 눈매가 있었다. 양동이를 이고 물을 나르던 까무잡잡한 아이도, 철길 옆 신호등에서 깡통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던 어린 군인들도 생생하다. 나는 그렇게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하고, 날마다 9시 뉴스며 조중동이니 하는 일간지 등을 챙겨보았다. 대학시절 간행물코너에서 때마다 나오는 사상계 등의 잡지도 독파하고 마르크스는 누구인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공부했다. 


내가 공부했던 학교는 보수도 진보도 아닌 그저 학자로서의 삶을 묵묵히 걸어가시는 선생님들로 존경할만한 분들이 많이 계셨다. 경영학이며, 잘나가는 전공들을 부전공하는 친구들과는 다르게 나는 전공수업을 거의 다 수강하였다. 남들보다 허약체질이였고, 말하기 좋아하던 나는 기자의 삶을 사는 선배들과 술을 마실때면 이내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내가 꿈꿨던 기자의 열정보다는  삶의 무게가 더 많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나는 여러가지 핑계로 대학원에 입학하고 졸업하여 국책연구원을 떠돌아다니며 정부의 하위정책의 최말단에서 연구보조를 하다 미국 유학을 준비중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애국이 무엇이냐, 국가가 무엇이냐 묻던 치안경감의 대답은 인지부조화의 절정이다. 


나는 내 행동과 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어떤 논리로 무장하고있는지 고민했다. 내가 준비하던 기자의 길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아서, 혹은 공부를 하고 미국을 다녀오면 교수가 되기 수월할테니까, 교수가 되면 사회적인 지위나 영향력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 여러가지 물음 속에서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애국과 미디어전공자로서의 내 연구가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애초에 생각하던 나의 이상과 조금 멀어졌지만, 세상 어디에서 내가 고민했던 흔적들을 갖고 만들어내는 결과물들이 좋은 영향력을 만든다면 그 또한 의미있는 삶이 아닐까 자위한다. 


노무현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자정이 넘은 시각에 당선인 소감을 하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국민여러분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을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났다. 어제 봤던 영화 속의 또 다른 그가 만들어낸 말이 비수에 꽂혔다. 내 안에 만들어진 작은 이슬이 켜켜이 쌓인 우리 역사의 한줄기를 애통해하는 마음인 것을 이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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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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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에드몽당테스 | 작성시간 14.01.21 트로츠키주의에서 스탈린주의로, 홍군에서 백군으로.
  • 작성자1980 | 작성시간 14.01.26 신나게 공부하고 오세요~
  • 작성자꿈을지니고 | 작성시간 14.02.15 저도 감동이었어요. 꼭 멋진 기자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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