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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 이 야 기 들

아랑 초창기....ㅇㅇ(토토가 보고 괜히)

작성자월영씨|작성시간14.12.28|조회수1,776 목록 댓글 2

과거 지향적인 분위기에 편승해 10년전 이 카페에 썼던 글 하나 다시 퍼서 올려봅니다...세월이 흘러 어느덧 저도 기성세대가 되고 밥벌이가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이 되긴 했지만..10년전 백수일 땐 이 곳에서 다른 회원님들과 함께 이렇게 토론(?)도 하며 게시판을 달구긴 했습니다. 그게 일종의 지적허영이고 자뻑일지라도 나름 논리를 세우고 서로 입장이 다르다 하더라도 예의를 지켜가며 이야기를 나눴던 거 같습니다.  그러한 20대의 특권을...우리가 마지막으로 누린 건 아닌가 싶어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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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이야기하기로 했던 아름다운 칼과 그것에 의해 쓰러지는 자에 대한 연민. 이 논의는 10월 말로 미루겠습니다. 지금 소드님께 드리는 이 글은 달빛이 저리 밝지 않았으면 쓰여지지 않았을 겝니다. 그냥 자려고 했더니 달빛이 너무 밝아 눈이 감겨지지 않더군요. 그러던 차에 까페에 들어왔고. 칼과 연민보다는 한결 수월하게 쓸 수 있는 주제일 것 같아서 편하게 자판을 두드려봅니다. 하니 너무 예리한 시선으로 제 글을 분석하지는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유와 행동에 있어 우열을 나누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봅니다. 예컨대 <'행동'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행동하면 될 일이지, 타인이 행동하지 않음을 문제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타인이 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합니다.“>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의견이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는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불의의 상황에서 행동하지 않음으로 인해 일신의 안락을 보장받고 그 사유만 하도록 처해진다면 지식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때 저는 행동하지 않는 사유인에 대한 비판은 온당하다고 봅니다. 

쉬운 예로 나치 정권하에서 기독교는 종교로서 그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히틀러도 기독교를 부정하지는 못했지요. 적지 않은 독일 목사들이 나치에 협력하며 그들의 신분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치즘이 과연 기독교의 본래 의미와 상통했던가요? 나치하에서 지하운동을 벌이던 목사 본 회퍼는 결국 그것이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집니다. 이때 그는 이런 비유로 나치즘에 저항한 자신을 설명합니다. 

버스에 탔는데 미치광이 운전사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 이 미치광이 운전사는 승객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태세이다. 그 버스 안에서 목사는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 미치광이 운전사의 잘못된 운전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에 이른 승객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진정한 목사라면 그 미치광이 운전사로부터 운전대를 빼앗아 승객들의 안전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비합리적이고 자신의 양심에서 어긋난 상황에 직면한 지식인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 권력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행동에 피로서 응징을 한다면. 그때 사유와 행동을 같은 무게로 놓을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소드님께서 말씀하신 상황은 물론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전제로 놓으신 것이 아니겠지만. 작금의 정상적(?)상황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사유가 아닌 행동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자유와 정상(?)을 맛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행동이 때로는 사유보다 우선하는 지식인의 선택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브레히트의 작품은 제게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브레히트는 나치에 저항했던 대표적 독일 지식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언급했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같은 경우. 히틀러가 미친 짓을 하고 있는데 자신은 차마 운율을 맞추며 서정시를 쓰기 힘들다고 토로한 시입니다. 물론 그 당시 나치즘에 상관없이 묵묵하게 독일의 서정시를 발전시킨 시인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개인의 세계로 침잠하지 않고 옆에서 벌어진 불의에 대해 분노한 브레히트의 모습에 더 공감을 하고 존경의 마음을 보내게 됩니다. 그 까닭은. 제가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저는 개인의 세계로 침잠했을 것이 거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브레히르 같은 사람을 보면서 제 자신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겠지요. 왜냐하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자신에게 해가 될 것임을 각오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테니까요. 그리고 그 행동의 근거가 바로 평소 자신의 사유의 결과이겠지요. 

하여 소드 님께서 예로 드신 건축설계사와 그것을 짓는 사람의 예는 미스베이커님이 애초에 말씀하고 싶었던 요지와는 다소 무관한 예로 보였습니다. 미스베이커님은 전술하셨다시피 브레히트의 시를 읽으며 행동과 사유의 괴리에 대한 자괴감을 토로하신 것으로 읽혔습니다. 그것은 저 역시 평소에 하고 있는 고민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심리적 동조를 일으켜 브레히트의 시를 리플로 달았던 것입니다. 
소드 님께서 드신 예는 그 예 자체로서 논리적 흠결은 없으나 미스베이커님이 자신의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상관없는 예로 보였습니다. 사유와 행동의 우위 혹은 행동하지 않는 자 말하지도 말라는 배제의 논리가 아니라. 행동해야할 때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의 괴로움을 저는 그 글에서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가 차례 때 남은 곡주를 한 잔 했기에 논리가 정교하지 못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소드 님처럼 제 자신이 쓰는 글에 대해서 철저하게 검증하거나 자료에 근거하는 성실한 타입의 사람이 아닙니다. 소드 님을 보며 저와는 세계관이 다른 사람이지만. 그런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존경의 마음이입니다. 제가 가지지 못한, 제 게으름으로 지니지 못한 글 쓰는 사람의 태도이기에 그렇습니다. 덕분에 종종 무릎을 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쓸까 했던 것인데 말 나온 김에 적어보겠습니다. 소드님의 글을 읽다보면 신라시대의 원효와 의상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저는 요석공주와 바람도 피고 길거리 저자에서 민중과 어울려 한 생을 살았던 원효대사를 더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필히 소드 님은 원효보다 의상을 더 맘에 두지 않을까 싶더군요. 

원효는 신라의 민중불교를 통해 중생들의 구제에 부처의 길을 보았고 의상은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그네들의 앞선 불교 교리를 익히고 신라에 돌아와 귀족과 지식인들을 대상으로한 화엄종의 거두가 됩니다. 각기 다른 길을 걸었지만 두 분 모두 불가에서는 큰 족적을 남겼지요. 

둘의 운명을 가른 것은 아시다시피 해골에 고여있던 썩은 물이었습니다. 원효는 그 자리에서 마음이 곧 부처에 이르는 길이라 깨달았고 의상은 그 해프닝에서 별다른 깨달음을 얻지못했습니다. 의상에게는 당나라의 선진 학문을 익히겠다는 열의가 남달랐기 때문이지요. 이는 곧 택스트와 학문. 혹은 실증적 데이터에 대한 의상의 확신이라고 보입니다. 객관화된 문자세계가 부처에 좀더 가까이 이르는 길이라고 의상은 믿었던 것이겠지요. 

소드 님을 보면서 님의 지향점이 의상과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앞서 말했다시피 원효에게서 진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 길의 우위가 있네, 없네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식인 세계가 아닌. 학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 일반 평범한 대중들을 상대로 글을 쓰겠다는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의상의 학문적으로 뛰어난 철학적 언어보다. 원효의 쉽고 단순한 언어가 더욱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언어뿐만 아니라. 그 대중을 향한 마음 역시. 대중을 굽어보는 의상의 마음보다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같은 눈높이에 있으려 했던 원효의 마음이 더욱 어울리겠지요. 

물론 이런 저의 글 쓰기가 팩트에 대한 성실한 조사를 외면하려는 얄팍한 술책일수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방에 달빛이 가득 차 눈 붙이기가 어려운. 한가위입니다. 건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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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comm95 | 작성시간 14.12.30 하...소드님...그 당시 대단했던 기억이 나네요. 늘 혼자(?)였던 모습도 생각나고...ㅎㅎ 치열했지만, 감정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쓰던 때...ㅎㅎ. 책잡히지 않으려고 도대체 생각을 몇 번을 하고 댓글을 달았는지...ㅎㅎㅎ토론방이 조용할 날이 없었죠,,그때 군필에 4학년 정도면...대략 95학번 ㅎㅎㅎ 백수였으나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 아~~토토가.....
  • 작성자이노센트맨 | 작성시간 15.03.18 엇 이글...언시생때 읽은 기억이 새록..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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