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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 이 야 기 들

포기를 위한 변명

작성자별둘|작성시간17.01.09|조회수7,312 목록 댓글 22

 의심할 수 없었다. 너무 오랜 꿈이었기 때문이다. ‘넌 정말 PD하면 잘할 것 같아. 잘 어울려.’ 이런 말을 들을 때 마다 더욱 확신했다. 어쩌면 너무나 확신에 차있는 내 모습에 그 누구도 쉽게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니까. 한편 나를 ‘의지’의 상징으로 보는 몇몇도 있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꿋꿋하게 나아가는 한 사람. 나의 지난 행적은 그렇게 포장되기 충분했다. 무엇보다 나조차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내 꿈은 PD이며, 굳은 의지를 가지고 끝끝내 꿈을 이루고 말 것이라고 말이다.

 

 가방 속 낡은 필통처럼 내 꿈은 오랜 시간에 걸쳐 나에게 당연해졌다. 누군가 내게 물을 때면 난 준비된 대답을 꺼내어놓았다. “드라마PD를 지망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일을 하고 싶고, 인간과 극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사람들을 잘 통솔하는 저의 능력과도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이란 이야기하면 할수록 더욱 그 꿈에 가까워질 수 있다 믿었다. 쓰면 쓸수록 뚜렷해지는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8년이 지난 지금, 수도 없이 반복해온 나의 오랜 꿈은 닳아있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모른다. 드라마PD가 되는 길은 점점 좁아지는데 내가 남들에 비해 특출 나지 않음을 느꼈던 것이 먼저인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보다 더 다양함을 알게 된 것이 먼저인지. 분명한 건 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 드라마를 보지 않은 채 지내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난 습관처럼 내뱉어왔다. “제 꿈은 드라마 PD입니다.”

 

 MBC는 신입사원을 뽑지 않은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 그나마 정기적으로 사원을 뽑았던 KBS, SBS 중에서도 작년엔 SBS만이 공개채용을 진행하였다. 다시 말해 공중파의 채용은 비정기적이다. 종편 등 케이블 방송사에서는 애초에 드라마PD를 따로 키우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많은 드라마는 누가 만드느냐. 외주제작사에 분포되어있는 ‘스타PD’들이 만든다. 예측컨대 이러한 경향은 점점 더 짙어질 것이다. 외주제작사에서 신입PD를 뽑아 키워주는 일이 드라마PD채용시장의 거의 유일한 변수가 되겠지만 신입PD에게 투자자들이 막대한 자본을 쏟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할 때 외주제작사에 안정적인 인재배출 시스템이 생겨나길 기대하긴 힘들다. 그나마 제작과 송출을 겸하고 있는 CJ가 가능성이 있지만 CJ 또한 안정적인 인재배출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까진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아무리 채용시장이 좁고 치열해도 나의 절대적인 능력치가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은 상관없었을 것이다. 제작사와 방송사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능력 있는 PD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 높아졌다. 그렇다면 능력 있는 PD는 어떻게 될 수 있는 걸까?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은 ‘열정’이라는 단어를 쉽게 입에 올리곤 한다. 드라마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끈기 있게 버티고 배울 수 있는 사람이 경험치가 쌓이면서 능력 있는 PD가 된다는 것이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다르다. 재능이 열정에 앞서는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예체능이다. 드라마PD의 경험치를 쌓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많이 없기도 하지만, 경험치를 실력으로 만드는 능력은 분명히 ‘재능’이다.

 

 나에게 드라마PD를 하는데 필요한 모든 재능이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3년에 걸친 극단 활동을 통해 극 전반을 구성한다거나 배우들의 감정을 이끌어 내는 힘은 스스로에게 확인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남들에 비해 부족하진 않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무대가 아닌 영상을 통한 가장 ‘대중적’인 ‘극’이다. 때문에 드라마를 잘 만들기 위해선 ‘대중성’에 대한 재능 또한 중요하다. ‘대중성’의 재능이란 대중의 취향을 저격할 수 있느냐에 관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난 그런 ‘트렌디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나의 취향은 가볍기보단 무겁고, 트렌디함보다는 고리타분함에 가깝다. 물론 트렌디한 드라마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드라마의 특성상 ‘대중성’은 절대 배제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를 만드는 데 있어 나의 취향은 분명 장점보단 단점에 가깝다. 이와 더불어 영상을 다뤄보지 못했다는 것 또한 나의 취약점이라 생각한다. 나의 재능이 없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분명 뛰어나다고 할 수도 없다. 지극히 평범하게도.

 

 난 여전히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고, 내가 그린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 가슴 깊이 내가 드라마PD가 하고 싶었던 이유는 그대로 남아있다. 쉽게 사라질 마음이었다면 8년 동안이나 같은 꿈을 지속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PD에 대한 마음을 접겠다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드라마PD는 나에게 여전히 매력적이다.

 

 다만, 남들보다 빼어나게 잘난 점도 없으면서, 내가 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좁디좁은 관문을 통과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사라졌을 뿐이다. 날 괴롭게 만들었던 것은 이 불확실성이었다. 가능에 대한 불확실함은 불가능에 대한 불확실함이기도 했다. 꿈을 이룰지 미지수라는 말은 꿈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말이 되기도 하였다. 불확실하기에 너무도 불안했지만, 불확실하기에 포기하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사이, 난, 절실함을 잃어갔다.

 

 비로소 드라마PD에 대한 꿈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나에게 절실함마저 사라졌음을 깨닫게 된 탓이다. 하고자 했던 PD준비는 잘 되어 가냐며 새해 덕담을 건네는 오랜 벗들에게 난 더 이상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는 습관적으로마저도 드라마PD를 계속 꿈꾸고 있다 말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대신 고맙다 하였다. 그동안 나의 꿈을 함께 기억하고 응원해주어 고맙다.

 

 자그마치 8년의 시간이다. 드라마PD를 꿈꿔온 그 시간들이 헛되다 생각이 들진 않는다. 너무 감사하게도 난 그 시간들이 진심으로 행복했다. ‘드라마’를 사랑했던 그 시간동안 나는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또, 그 과정에서 나의 또 다른 가능성도 찾았다. 그러므로 괜찮다.

 

 꼭 오래된 연인과 헤어지는 것 같은 기분에 허한 마음을 술로 달래다 문득, 묘책을 떠올렸다.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드라마PD는 접어두더라도 ‘극’에 대한 사랑만큼은 나의 취미로 남겨둬도 괜찮지 않을까. “평생 ‘사람들의 이야기’만 하면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처음 드라마PD라는 꿈을 키웠던 이 물음에 대하여, 꼭 드라마PD를 하지 않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답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살아가다 언제라도 나의 오랜 꿈이 떠오를 때면 언제든 나의 연극을 올리자고. 그 정도면 ‘평생’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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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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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부지런하면유재석 | 작성시간 17.09.27 응원합니다.
  • 작성자민들레홀씨 | 작성시간 17.10.16 저도 수년동안 꿈을 꾸었습니다. 언론인 준비를 마치면서 결코 후련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방치우다가 스터디 때 쓴 논술같은거 발견하면 많이 아리고요.
    아무것도 아닌게 될까봐 참 두려웠는데, 지나고보니 그런 시절은 또 없을것 같기도 하더라고요. 그리고 또 다른 꿈이 생기기도 하구요 : >
    거의 일년만에 아랑왔다가, 글 잘보고 갑니다. 어디서든 행복하시기 바라요
  • 작성자eagles | 작성시간 17.10.17 글 남겨 주시고 마음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서로 닮은 미래를 그리면서 비슷한 믿음과 비슷한 절망 속에서 살았네요. 위로가 됩니다. 어디서든 가지고 계신 능력 숨김없이 발휘하고 사셨으면! 저도 응원!
  • 작성자someon | 작성시간 18.02.06 멋집니다... 대중성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음을 느낍니다. 전문가들의 말도 소중하지만 역시 미디어를 소비하는 다수는 대중임을 느낍니다.
  • 작성자노흐말 | 작성시간 23.11.07 오랜만에 우연히 다시 읽었는데 기분이 묘하네요. 어떻게 잘 살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모두들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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