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먼저 책망부터 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다음부턴 `죽을 만큼 괴로워서`라는 말을 아끼시길 바랍니다. `죽을 만큼 괴롭다`는 말은 제 견지에서 냉정하게 말씀드리자만 어리광입니다. 물론 란트님은 무척 괴롭고 힘들어서 그런 말을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을 만큼`이란 말은 육체적 신체적 고통이 극단에 이르렀을 때 쓰는 말입니다. 렌트님의 솔직한 심정은 제가 부모님께 거짓말한 게 들통날까 두렵고 무서워요. 정도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은 아직은 아닙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과잉해석하는 것은 결코 좋은 습관이 아닐 듯합니다. 만약 란트님께서 원하는 언론사에 들어갔을 때 단언컨데 부모님과의 갈등보다 훨씬 더 무겁고 두렵고 도망가고 싶은 압박과 책임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앞으로 란트님이나 제 인생엔 정말 죽을만큼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합니다. 우선은 자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실 부모님 생각만 해도 그렇겠지요.
2.
야속하시죠? 힘들게 고민을 털어놨는데 난데없이 책망부터 하니까요. 그런 란트님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도 다소 따끔하게 지적을 한 것은 비단 란트님이 직면한 상황이 렌트님만 겪었던 상황은 아니란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그리고 란트님의 고민은 단지 진로 때문에 부모와 갈등하는 자식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부모에게서 독립해야하는 자식의 문제로 저에게는 읽혔던 까닭입니다. 란트님이 부모님에게 한 거짓말은 란트님과 부모님 사이, 갈등의 단초이고 이는 `생애 보편적인 문제`이죠.
3.
란트님의 글로 파악한 바로는 부모님에게 큰 걱정 끼치지 않고 고분고분 말 들으며 고향을 떠나 유학을 간 대학생. 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은 세상 살아보니 안정적인 공무원이 가장 좋은 것 같다고 당신들의 경험칙을 계속 강조하신 것 같구요. 그런데 부모님 말씀에 고분고분했던 란트님은 어쩌다 인생이 꼬여(?) 언론 쪽에 마음이 갔고 그 마음 때문에 부모님과 갈등을 겪은 듯 합니다.
4.
이런 란트님의 상황은 단지 란트님만의 고민은 아니라고 말씀드리면 조금은 힘이 날까요? 제가 이 공간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올라오는 고민의 글들 중에는 란트님과 비슷한 유형의 고민을 토로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안정적인 직장 예컨대 교사, 공무원, 공사직원, 혹은 좋은 집안의 자제와 결혼을 부모님은 바라지만 나는 기자가 되고 싶고 피디가 되고 싶고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 내 꿈을 위해 부모님께 거짓말 하고 있다. 혹은 부모님 몰래 공부하고 있다. 부모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등등
5.
조금은 마음이 풀리셨는지 모르겠네요. 란트님께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첫 번째는 란트님 부모님만 특이해서 딸의 장래를 당신들의 뜻에 맞게 규정지은 분들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부모님들의 마음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당신들의 경험칙에 따라 자식들이 안정적으로 무난하게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런 부모님들의 경험칙을 저는 존중합니다. 살아보니 편안하고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일상과 정년을 보장하는 직장이 생존의 스트레스를 덜 주는 곳이긴 하더라구요.
6.
란트님의 아버지께서 딸에게 공무원을 강요(?)하시는 것은 자식이 힘든 꼴은 보지 못하겠다는 부성애의 다른 표현입니다. 본인의 처지에선 애지중지 키운 딸이 이 험한 세상에서 날마다 생존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하는 꼴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아비로서 자식에 대한 책임감의 발로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란트님께서 말씀하신 `보수적인 아버지`의 전형성이 보이기도 합니다. 허나 핵심은 그것입니다. 내 딸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렵고 스트레스 받으며 사는 꼴은 못 보겠다.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어떻게 해서라도 (딸은 아직 세상을 모르고 어리니) 딸을 공무원이 되도록 채근해야겠다. 딸은 지금까지 말 잘 들어왔으니 아비의 뜻을 알겠지.
7.
그런 아비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에 란트님은 지금까지 거짓말을 해서라도 착한 딸로 성장했습니다. 여기서 묻겠습니다. 그래서 정말 행복하셨습니까?!. 란트님의 글을 읽고 가장 직관적으로 와 닿은 것은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헤아린 여리고 착한 딸의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부녀지간의 갈등을 회피하려는 란트님의 도피심리도 느껴졌습니다. 역설적으로 딸의 진심과 행복을 제대로 모르는 아비의 슬픈 소외감도 느껴졌습니다.
8.
란트님께서 올린 글에 대해 행동적인 충고를 원하신다면 간단합니다. 지금 당장 하던 일을 작파하고 댁에 내려가 아버지와 면담을 하세요. 부자지간이라면 소주라도 한 잔 했으면 좋을 거라고 덧붙이겠지만 부녀지간이라 어느 방법이 좋은지는 모르겠네요. 물론 그렇게 하기까지 란트님은 숱한 갈등과 마음의 번민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대로 `죽을 만큼 괴로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에서 란트님이 잊고 있는 것은 부모님이 본인에 대해 가진 애정의 본질입니다. 설사 죽일 듯이 혼나고 극단적으로 머리를 깎이는 상황이 오더라도 란트님은 아버지가 아끼고 아끼며 결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외면할 수 없는 `핏줄`입니다. 게다가 란트님의 고민이 `결혼` 문제가 아닌 진로문제기 때문에 란트님이 겁먹은 것보다는 갈등의 밀도가 약할 수도 있습니다.
9.
란트님의 상황을 단지 여기에 올린 길지 않은 글만으로는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 글은 좀 위험하고 단편적일 수 있습니다. 이를 감안하시더라도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 부모님과의 갈등은 렌트님 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결국 우리가 부모와 자식간에 언젠가는 서로 터놓고 싸우고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그러다 아물어야 할 `성장과정`이라는 점입니다.
과거 유교사회의 효자효녀 이야기에 우리는 얽매여 있습니다. 부모와 대립하고 싸우는 것이 마치 천륜을 거스른 죄인인양 교육받아왔습니다. 허나 인간의 성숙과정, 성장과정에서 부모와의 갈등은 불가피합니다. 결국 우리는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개별적으로 사고하고 개별적인 인생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에 불과합니다. 개별적으로 살기 위해선 독립적인 자아와 독립적인 개체성 확보가 불가피합니다. 그 첫걸음이 바로 부모와의 갈등해결 입니다.
10.
부모님과의 관계는 TV 홈드라마의 비둘기 같은 집과 달리 현실에서는 어렵습니다. 천륜이고 핏줄이기에 합리성마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죠. 저 역시 부모님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춘기를 짧지만 독하게 앓았고 아버지와 싸우다 밥상을 뒤엎은 적도, 어머니께서 가슴을 치며 통곡 하고 눈물을 쏟게 할 정도로 모진 말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시작은 부모님에 대한 불만, 부모님의 허물에 대한 실망, 부모님의 위선에 대한 좌절이 계기가 되었죠. 그 갈등과 싸움의 과정에서 저도 부모님도 상처를 받고 서로 죽을 만큼은 아니지만 괴롭고 아팠습니다. 그러나 지금 단언컨데 그 과정이 부모님과 저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지요. 결국 자식들은 나이를 먹어 성인이 되고 부모는 늙어 노인이 되는 우리네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언제까지 저를 책임지실까요? 그렇다면 자식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11.
부모님이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결국 행복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자식을 보는 것. 제가 나이를 들수록 제 경험칙에서 나오는 확신입니다. 부모님 당신 기준으로 보시기에 제 사는 모습에 만족하시지 못하지만 그래도 별 잔소리를 못하는 것은 제가 지금의 삶에 행복을 느끼고 별다른 불만이 없어서 입니다. (물론 제 자신의 행복을 찾고자 개인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고 그 노력이 늘 행복과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노력을 부모님은 인정하시기에 부모님과 현재 특별한 갈등이 없지요. 고맙게도 부모님은 자식이 행복하다는 변명에 별다른 강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행복은 비교가 아닌 본인의 확신에서 옵니다.
12.
글이 길었습니다. 요약하자면. 부모님에게 난 무엇을 해서 행복하다. 라고 말씀을 드릴 만큼 우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부모님과의 관계 때문에 불안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말씀드리며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뭔가 접점을 찾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서적인 에너지가 많이 고갈되고 답답하고 아주 괴롭겠지만. 그 과정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은 렌트님의 부모님께서 충분히 주신 것 같습니다. 어찌 부모가 자식 괴로워하는 모습 보며 행복하겠습니까? 그 아주 단순한 진실만큼은 확신을 갖고 부모님과의 갈등에 정면으로 맞서길 바랍니다. 어찌보면 그런 계기를 가진 것은 다행입니다. 인생의 숨겨진 의미를 탐험할 수 있는 기회라 그렇습니다.
어차피 언론에 종사하고 싶다는 게 숨겨진 뭔가를 찾겠다고 발심한 것 아니겠습니까? 주절주절 두서없는 길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이 과정을 겪고 슬기롭게 지나고 나면 오히려 렌트님의 인생에 한 고비를 넘긴 것이 될 것입니다. 그건 언론인이 되건 공무원이 되건 하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기도 하구요. 부디 확신을 가지고 그 갈등과 마주서시길. 사실 갈등과 정면대결 하는 게 언론의 본질적인 자세기도 하구요. 그 트레이닝을 자체학습하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여기시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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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왼손은그저도울뿐. 작성시간 11.05.17 힘이 되는 구절을 수첩에 옮겨적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민을 남긴 분께서 용기를 내 부모님과 관계를 회복하길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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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zooana 작성시간 11.05.19 월영님,,,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이런 글을 쓰실 때 컴퓨터 앞에 앉아서 생각 나시는 말을 옮기시나요? 아니면 자필로 쓰고 퇴고에 퇴고를 거쳐 완성된 글을 옮겨쓰시나요? 어찌되었든 부럽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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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월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5.19 글마다 다르긴 한데..위에 쓴 글은 그냥 한 시간 정도 자판을 두드린 글 임다..자판에 익숙해지다 보니 자필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네요. 그래서 글이 쓸데 없이 중언부언에 주절주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