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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국(갈라파고스군)이 SBS를 그만둔 이유 #5

작성자갈라파고스군|작성시간22.04.30|조회수2,596 목록 댓글 0

 

 

고현국이 SBS를 그만둔 이유 #5

 

영화와 드라마의 노동 방식은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두 노동 현장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바로 속도다. 드라마 쪽이 하루에 찍어내는 컷과 씬 수가 훨씬 많다. 영화도 요즘은 일일 작업량이 꽤 많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하루에 열씬에서 많게는 스무씬 넘게 소화하는 드라마에 비할 바는 아니다.

 

2019년 4월 말. <빅이슈>는 대망의 마지막 촬영주를 맞았다. A팀은 여전히 삐걱대는 현장의 잡음을 딛고 악몽같은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15부를 찍다 보니 16부가 전달됐다. 마지막회 대본의 60%가량은 리조트 호텔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첩보전이었다. 하이스트 무비의 장르 구성을 차용한 대본은, 작가님이 단기간에 쓰셨다기엔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고 완성도가 높았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작가실은 할 일을 다 했다. 이제는 제작팀이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방송을 내는 일만 남았다.

 

마지막회 스케쥴표를 받아들곤 입이 떡 벌어졌다. 찍어야 될 씬이 너무 많았다. 복잡한 씬과 씬들이 맞물리며, 중간중간에 CG로 삽입될 CCTV 화면, 편집상 필요한 인물들의 상상, 작전 내용 설명을 위한 이미지컷을 비롯한 몽타주식 촬영분. 대본을 헤집어 작업량을 환산하고 나니 16부 한 권으로도 족히 웬만한 대본 한 권 반 분량은 되는 것 같았다.

 

섭외팀이 의정부에 새로 오픈한 리조트형 호텔을 통째로 빌렸다. 자잘한 씬들까지 세 보니 리조트 첩보전 씬들만 90개였다. 중간 중간 한 두컷으로 처리할 수 있는 간단한 씬들도 있었지만, 효율적으로 팀을 운용하며 찍는다고 해도 족히 나흘은 필요할 분량이었다.

 

정신없이 첫 날 분량을 찍다가, 저녁쯤 제작부에서 딜이 들어왔다. 리조트 씬 90개 전체를 이틀 안에 소화하면, 16부 마지막 엔딩 시퀀스 세트 촬영은 B팀에게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제작부는 리조트 촬영을 3일 이상 끌게 되면, A팀이 엔딩까지 촬영해야 한다고 했다. B팀 감독이 미리 팀 자체 쫑파티 일정을 확정해두었다는 이유였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오랜 기간 휴식도 없이 달려왔던 A팀 스텝들의 눈이 흔들렸다. 스텝들은, 하루라도 빨리 지옥같은 촬영 스케쥴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다. 일찍 전체 촬영 스케쥴을 끝내주겠다는 제작부의 제안은, 하루라도 촬영일을 줄이고 제작비를 아끼려는 당근을 가장한 독배였다. 스텝들의 밤샘 초과근무를 강제해 고혈을 뽑겠다는 의도임에 뻔했다. 한창 방송 스텝들의 주당 노동시간이 도마에 오르던 시기였다. 스텝들이 이 조건에 합의한다면, 그들은 스스로가 오버타임 노동을 감내하겠다는 선언을 한 셈이 되므로 후에 권리를 주장하며 문제제기를 할 수 없게 된다는 논리였다.

 

나는 각 팀 퍼스트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뒤 어느 쪽이건 결정해주면, 스텝들의 결정에 따르겠다 말했다. 나도 촬영, 조명 감독님들도 내심, 여기까지 와서 마지막 엔딩 시퀀스 촬영분을 B팀에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시간을 들여 리조트 분량을 소화하고, 엔딩 시퀀스를 포함한 마지막 촬영까지 A팀과 함께 마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내 오기이자 욕심일 뿐이었다. 결정은 스텝들의 몫이었으니까.

 

이윽고 의견이 모였다. 이틀에 90씬 모두를 끝내자는 쪽이었다. 스텝들을 불러 모아 의기를 다졌다. “오케이. 이틀 안에 90개. 그렇게 찍기로 결정된 거라면, 합시다. 어렵겠지만 어디 한번 해 봅시다. 여러분과 제가 처음 합을 맞추던 시기라면 조금은 삐걱거리고 서걱거릴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이라면 해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도 꽤 손발이 잘 맞는 팀이 됐으니까요. 자, 찍읍시다. 빠르게, 잘 찍고나서, 끝내고 쉽시다.”

 

그 때 부터는 사실,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찍어대기만 했다. 대본을 앞뒤로 훑어가며 한 장소에서 한 컷을 촬영하고는, 같은 장소에서 촬영해두면 좋을 이후 서너 컷과 그 밖의 두세 씬을 함께 계산하는 식이었다.

 

사흘 째 넘어가던 새벽, 동이 터올 무렵이 되어서야 마침내 촬영이 끝났다. 씬에 빠진 컷이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서, 마침내 내가 A팀에서의 마지막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쳤다. 스텝들 모두가, 입을 모아 우렁차게 수고하셨습니다, 소리를 질렀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피땀어린 헌신을 헌신짝 취급하는 SBS를 대신해서,

저라도 진심어린 경의를 담아 감사를 드립니다.

 

@sbsdrama.official @sbsnews @netflixkr @netflix

 

원문 보기

 

http://www.instagram.com/overforce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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