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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 flex 원우연 사장님의 인생담.(흑흑......)

작성자쪼박사|작성시간02.10.14|조회수660 목록 댓글 0


㈜에스아이플렉스 원우연



원우연,창업의 세븐포인트



원우연의 초이스








그는 인터뷰를 사양했다. 아마 자신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그의 도전이 진행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공은 무지개 같은 것이 아닐까? 나아가는 만큼 물러서는 무지개지만,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삶과 무지개를 잡으러 떠나는 삶은 분명 다르다.

S. I 플렉스 원우연(54세) 사장, 그는 물론 도전을 선택했다.




“제 인생이 드라마틱하거나 극적이거나 하는 것이 없어요. 삼사십년 전에야 다들 먹고 살기 어려운 시기였잖아요. 그때는 참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유복한 환경이었던 것 같아요. 대학 교육을 받았던 것도 큰 행운이었구요.”
인문학 쪽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은 기술을 익혀야만 살 수 있다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동양방송 엔지니어로 취직한다. 학교를 더 다닐 욕심으로 시간적으로 넉넉한 방송국에 입사를 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다시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첫 번째 도전
“그 당시 한국의 전자제품이라고 하면 그저 텔레비전, 냉장고 등이 전부였어요. VCR은 기계가 전자를 제어하는, 기술력이 한 단계 높은 것이었어요. 그런 것들의 원리와 숨겨진 여러 가지들을 찾는 것이 즐거웠어요. 참 재미있게 일을 했습니다. 삼성전자는 좋은 회사예요. 엔지니어들이 재능 있고 능력이 있으면 자금을 뒷받침해줍니다. 대부분의 부품들이 일본에서 수입한 것들이기 때문에 국산화하겠다는 의지가 강했죠. 좋은 선배 만나서 현장 속에서 보고 배우면서 많이 성장했던 시기였어요.”

삼성전자 VCR개발팀에 소속되어 있었던 6년의 세월은 자신의 숨겨진 재능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 계기가 되었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엔지니어의 능력이 숨어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식과 강렬했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던 초기단계를 지나니 일이 점점 지루하게 느껴졌다.

1984년 그는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한국에서 아무도 만들지 못하는 것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이때 자신이 재미있게 일을 한 VCR에 들어가는 스페셔라는 작은 제품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템은 일본에서 수입해 들어오지만 관리하기가 어려운 아이템이라는 것에 착안해 내가 만들어 봐야겠다는 목표를 설정한 것이다.

그는 일본으로 무조건 달려갔다. 그 부품의 재료메이커를 찾아내 재료를 수입할 테니깐 기술 좀 가르쳐 달라고 하자 재료메이커에서는 제조능력이 없다고 했다. 그럼 기술자를 소개해 달라고 하니까 그냥 수입해서 쓰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재료를 돈 내고 산다는데 이렇게 무정할 수가 있냐고 따지면서 도면을 줄 테니까 도면에 맞는 원판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해봐라. 그럼 그 원판을 이용해서 당신네 재료를 쓰겠다고 부탁했다.

며칠 후 재료메이커에서 연락이 왔다. 원판이 다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원판 금형을 한국에 와서 분석해보았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또다시 일본의 재료메이커로 달려가 “원판을 만든 사장을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 그렇지 않으면 이 재료를 살 수 없다.”고 말했다. 마침내 원판 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빈정대며 등을 돌린다.

그 이후 일본 출장이 있을 때마다 그 사장을 찾아갔다. 오랜만이라고 하면서 점심도 같이 먹고 또 지금까지 연구한 성과를 전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열댓 번 정도 하니까 그 원판 사장과 인간적으로 친하게 되었다. 어느 날, 최종적으로 그는 일본인 원판 사장에게 말했다.

“여기까진 왔는데 그 다음은 정말 모르겠다. 당신이 안 도와주면 난 굶어 죽는다.”고 했더니 “당신 정말 대단하다. 내가 자료를 주겠다.”고 했다. “이게 흥할지 망할지 모르지만 만약에 성공하면 기술료로 300만엔을 주겠다. 그러나 망하면 공짜”라고 하자 그는 “안 줘도 된다.”며 자료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드디어 국산화 개발에 성공
일본인 기술자에게 기술을 건네 받고 비슷하게 부품이 나오는 데만 7개월이 걸렸다.
그 사이 퇴직금은 다 날아갔고 그의 주머니에는 돈 한푼 없었다. 아버지를 찾아갔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아버지 역시 집 한채가 재산의 전부였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일어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그 좋은 직장 때려 치우고…”이제 드디어 부품을 개발할 수 있는데, 생산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데, 생산비가 없었다. 그때 같이 삼성에 근무했던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너 할 줄 아는 것 있으면 무조건 해봐. 내가 도와줄게.”그는 삼성전자의 친구를 만나 그 동안의 일을 설명하면서 책임은 내가 질테니 납품 좀 할 수 있게 해달고 부탁했다. 친구는 “한번 말해보겠다.”며 긍정적인 눈빛을 주었다.

그 말을 믿고 성수동에 4평짜리 지하실을 얻고 세일물산이라는 상호로 여사원만 한명 두고 청계천의 한 업체와 기계를 만들어 갔다. 밤을 새워가며 기술지도를 하고 품질관리를 했다. 실험용 기계가 완성되고 드디어 부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100%의 재료를 넣어도 부품은 30% 정도만 완성이 되었다. 그만큼 불량률이 많았다.

드디어 삼성에서 승인이 떨어졌다. 일본에서는 30원에 수입을 하는데 이제 시작하는 단계니까 10% 깎자는 것이다. 그는 다시 아버지에게 달려가 삼성에서 승인 받은 서류를 보여주며 생산설비 비용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흔쾌히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주셨다.

삼성전자와 첫 사업
삼성은 규모가 있는 회사여서 자본금, 시설, 장비 등을 실사한 후 업체등록이 가능하다. 공장을 구의동 40평 정도의 지하실로 옮겼지만 삼성측에서는 초라한 공장규모가 눈에 찰리가 없었다. 그만 업체등록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 동안 힘들게 일한 것이 한순간에 무너진 듯해 서러움과 회한이 소나기처럼 내리 꽂혔다. 그래도 언젠가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동경에 있는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삼성에서 승인은 받은 상탠데 공장이 작다고 업체등록을 안 시켜주네요.”

“그렇지 않아도 그 부품이 골치 아픈 아이템이거든. 그럼 내가 이 물건은 쉬핑을 안 할게. 그럼 너네 제품을 쓰겠지 뭐.”

선배는 한국에서 전화가 오면 그 제품은 한국에서 개발됐다는데 왜 굳이 일본제품을 쓰려고 하냐며 공급을 중단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삼성의 구매과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계속 공급받았으면 좋겠습니다.”

6개월 납품을 하고 받은 돈이 6백만원짜리 어음. 처음으로 어음을 구경한 날, 드디어 장사꾼이 되었다는 벅찬 감동이 오랫동안 진한 여운으로 남았다.



또 한번의 시도
그는 항상 새로운 꿈을 꾼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그는 지금 생산하는 부식시설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제품이 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때 작은 부품 중 하나인 플렉시블 PCB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일본에서 수입해 사용하는 업체는 있었지만 한국에서 생산하는 기술은 없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조사를 했다. 전자관련 잡지를 훑어보며 광고를 낸 회사에 전화를 했다. 처음에는 손님인 줄 알고 잘 대접하다가 기술정보를 알아내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면 무시하고 대꾸도 안 했다.



그러나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재료회사에서 알아낸 정보를 갖고 그 다음 회사인 화학약품 회사로 찾아가고, 그 회사에서 일련의 정보를 습득한 뒤 또 다음 회사인 설비회사로 찾아갔다. 이렇게 업체별로 열 개의 회사를 방문하니 얻어들은 정보들이 하나의 기술로 요약이 된다.


각의 특성을 종합해 감을 잡게 되고 한국에 와서 비슷하게 샘플을 만들어 본다.
그러나 샘플을 만드는 기계의 수입가는 당시 우리 돈으로는 1억 5천만원.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어느 날, 일본에서 본 기계와 비슷한 것이 눈에 띄었다. 일본기계는 6단기어였지만 이 기계는 4단기어밖에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값은 일본기계의 1/3정도인 5천만원선. 당시 13평 아파트값 정도였다. 일본에서 구입한 재료를 넣고 여러 방법을 동원해 기계를 움직여 봤지만 계속 불량만 속출한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면서 1년쯤 해나가니 서서히 완제품을 만드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다.



시련을 넘어서
처음으로 플렉시블 PCB를 친구가 공장장으로 있는 S전기에 5만개를 납품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S전기의 친구는 납품한 PCB가 모두 불량이 나 큰일났다고 말했다. 대기업인 L사 역시 나름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 이중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L사를 찾아가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애국심에 호소를 했다.

그러자 L사에선 그럼 납땜만 되면 되니까 납땜을 해 가지고 다시 납품을 해보라고 말했다. 그는 5만개의 부품을 일일이 손으로 납땜을 해서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한번의 실수는 치명적이었다. S전기에서 일본으로 발주를 돌린 것이다. 그도 오기가 났다. 일본에서 수입해 들어오려면 석달 정도 걸리는 것을 알고 지금 이 순간부터 S전기의 공급을 전면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회사에 잠시 들른 아버지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말씀하셨다.
“네가 입장을 좀 바꿔봐라. 도와줄 때 은혜를 벌써 잊었니?”
그는 다시 마음을 돌려 일본제품이 도착할 때까지 납품을 하라고 지시했다. 드디어 일본제품이 들어오는 날. 마지막 납품을 하고 온 직원의 얼굴에 기쁨이 만연했다. 일제도 불량이 났다는 것이다. S전기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네 것밖에 없다. 다시 납품해 줘라. 금형 값도 줄께."

회사는 신바람이 났다. 납품요청이 공급을 따르지 못할 정도다. 그런 그에게 노아의 방주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는 다시 한번 시련을 안겨 주었다. 1주일간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빗줄기에 지하공장이 침수된 것이다. 모든 기계들이 물에 잠겼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고객들과의 약속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납품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머리 속에는 스파크처럼 외주업체들의 상황이 팍팍 튀고 있었다.

다시 기계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전자 시스템을 접목시키고, 눈시울이 붉어질 때마다 맨주먹으로 시작했던 초심을 생각했다. 워낙 신용을 중요하게 생각한 그는 누구보다 고급의 기술을, 싸고 빠르게 공급했다.

그래서 이 나라의 경제가 땅으로 내리 꽂히던 IMF 때도 전체 물량의 70% 정도를 수출했기 때문에 몇 배의 이득을 보았다. 그는 그 일대의 공장들을 사들여 창업한 지 10년만에 1천5백평의 부지에 군포공장을 확장했다.

유망중소기업 에스아이 플렉스 설립
2000년에 상호를 에스아이 플렉스로 변경, 1988년 이후 지금까지 연성회로기판을 국산화해 수입을 대체하는 효과와 더불어 수출도 하고 있다. 단면 PCB 개발을 시작으로 윈도형식의 연성인쇄회로기판을 생산하고 있으며 일본 소니와 산요, 마스시타 등 일본 계열회사에 70% 정도의 물량을 공급하고 삼성 SDI 등에도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연성회로기판은 유연한 특성으로 인해 항상 지속적인 운동이 있는 곳에 이용되며 휴대폰과 게임기, 카메라 등 대부분의 전자제품에 사용되는 제품이다.

1996년에는 기술연구소를 설립해 Rigid-Flex 단자반용, VHS 형식의 VTR 로터리 트랜스 단자반용 등 고가의 정밀 연성인쇄회로기판을 자체 개발했다. 최근에는 양면 다층 윈도 타입의 연성회로기판을 대량생산하기 위한 생산시설 확충과 품질안정을 도모하고 있다.

에스아이 플렉스는 지난해 매출 460억 중 85%를 수출해 외화획득에 일조를 하고 있으며 특허권 4건, 실용신안 4건(일본 1건) 등을 보유해 외국업체와 비교해도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0년 유망 중소기업으로 선정되었고 1994년 삼성항공산업에서 외주품질혁신상, 경기도지사에게서 으뜸 일터상, 1998년 한국산업안전공단에서 무재해 3배 달성상 등을 수상했다. 또한 작년 9월에는 벤처기업으로 인증을 받았다.

그러나 작년 3월, 그에게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군포본사의 4배정도 되는 4천평의 부지에 설립한 에스아이 플렉스 인천 남동공장에 불이 난 것이다.

당시 새로운 생산기법을 연구하던 중이었다. 실험용 장비를 시험하다 화학약품을 공급하는 호스가 빠져 연구원이 손에 화상을 입었다. 연구원은 급한 김에 화장실로 달려갔고 그 사이 호스에서 화학성분이 빠져 나오면서 불길이 당겨졌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불길 속에 잠겨있는 건물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11년 전에는 홍수로, 이번에는 화재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는 5백만원을 갖고 시작했는데 지금은 5백만원은 더 있지 않은가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또한 그 동안 즐겁고 재밌게 일했으면 됐지 하는 생각도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불길은 건물의 반만 태우고 꺼져 버렸다.

비온 뒤의 무지개처럼 빛나는 삶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그는 낙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도전하자는 각오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기업은 사람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 같아요. 영업, 자금, 관리, 기술, 이 네가지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하거나 무리하면 일이 터져요. 네가지의 밸런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꾸준히 좋은 사람을 투입해서 중용을 지켜나가면 회사는 순항할 수 있습니다.”그는 고대 화학과를 나온 동생과 회사 초창기부터 함께 일하고 있다. 외향적이고 급하고, 돌파력이 있는 형과 차분하고 생각이 많은 동생은 이상적인 콤비라는 것이다.

“회사라는 것이 끊임없이 돌파만 하면 곤란하죠. 제가 앞으로만 나가려고 할 때 동생이 뒤에서 잡아줘요. 좀 천천히 가라고. 혼자 뛰어난 것보다는 둘이 합쳐져서 하나인 것처럼 뛰어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는 탁자 밑에 있는 사진첩을 꺼내 보여주며 인천에 있는 남동공장 건물도 소개하고 중국 해주와 위해에 위치한 공장사진도 보여준다. 숱한 시련 속에서 꽃피운 그의 결실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애정에 가득 차 있다.

도전과 시련의 극복으로 점철된 원우연 사장을 만나고 나오며 도전하는 사람만이 성취할 수 있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용기 있는 삶이야말로 비 온 뒤의 무지개처럼 찬란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에스아이플렉스 원우연



원우연, 창업의 세븐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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