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작품 감상실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김선우 4시집 감상

작성자자유/유기영|작성시간12.11.18|조회수447 목록 댓글 0

   김선우시인은 1970년 강릉에서 태어났고, 1996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는 김선우시인의 네 번째시집으로, 2012년 3월에 출판된 가장 최근의 시집입니다.

 

  작품을 감상해보면 아시겠지만, 김선우시인의 글들은 상당히 사회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 사회성이 인간과 자연의 생명과 정신에 밀접하게 접목되어 있지요. 이러한 김선우의 글을 비평가들은 대체로 에코페미니즘 사상에 기초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에코페미니즘이란 <에코-생태. 환경, 페미니즘-여성인권운동> 의 합성어로 남녀의 성차와 빈부의 계급차, 인간과 자연의 분열 등을 넘어 모든 것이 공생하는 세계를 지향하는 철학경향입니다.

 

  그럼 작품감상에 들어가겠습니다. 이곳에 올린 글들 외에도 좋은 글이 많이 수록된 시집이니, 관심있는 분들은 구입해서 꼼꼼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바다풀 시집

 

 

  백수인 걸 부끄러워한 적 없어요

  출퇴근, 이런 말이 나오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도망다녔조 굶지 않을 만큼 글 써서 벌고

  죽지 않을 만큼 여행할 수 있으면 족했죠

  그런데 이제 취직하고 싶어요

  생애 최초의 구직 욕망이에요

 

  바다풀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발명되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이력서를 쓰고 있어요

  바다풀 공장에 취직하고 싶어요

 

  나무들의 유령에 쫓겨 발목이 자꾸 끊어지는

  잊을 만하면 덜컥 나타나는 악몽이 지겨워요

  청동구두 같은 종이구두가 무서워요

  (저 좀 들여보내주세요)

  나무들에 대한 진부한 속죄는 말고

  바다풀 냄새 가득한 공장에서 일하고 싶어요

  내가 만든 종이로 바다풀 시집을 엮고 싶어요

  시집 자서(自序)엔 딱 두 줄만 쓸 거예요

 

  나무들의 피냄새가 가시지 않아 아주 지겨운 날들이었어.

  나는 그만 손 씻을래.

 

 

 

  이건 누구의 구두 한짝이지?

 

 

  내 구두는 한짝, 한켤레란 말은 내겐 폭력이지 이건 작년의 구두 한짝 이건 재작년에 내다버렸던 구두 한짝 이건 재활용 바구니에서 꽃씨나 심을까 하고 주워온 구두 한짝, 구두가 원래 두짝이라고 생각하는 마음氏 빗장을 푸시옵고 두짝이 실은 네짝 여섯짝의 전생을 가졌을 수도 있으니 또한 마음 푸시옵고 마음氏 잃어버린 애인의 구두 한짝을 들고 밤새 광장을 쓸고 다닌 휘파람 애처로이 여기시고 서로 닮고 싶어 안간힘 쓴 오른발과 왼발의 역사도 긍휼히 여기시고 날아라 구두 한켤레야 너희가 누군가의 두 발을 단단하게 덮어줄 때 한쪽 발이 없는 나는 길모퉁이 쓰레기통 앞에서 울었지 울고 있는 다른 발을 상상하며 울었지 내 구두는 한짝, 구두가 무조건 한켤레란 말은 내겐 폭력이지 내가 만든 이 얼음구두 한짝은 누구에게 선물할까 두짝 네짝 여섯짝의 전생을 가졌던 구두 한짝은,

 

 

 

  구석, 구석기 홀릭

 

 

  나, 구석 홀릭이 있어 그녀가 말하고 나는 춤춘다 응? 구석기 홀릭? 나는 사로잡혔어 최초의 동굴벽화를 그린 손에

 

  큰 달님을 그려야지 아직 계급이 나뉘지 않았을 때 사냥한 물소를 골고루 나누던, 흰 물소의 영혼이 우리를 용서하던 때

 

  구석에서 그녀가 푸르르 몸을 떤다 달의 중심으로 날아가 박히는 깃털들, 살이 점점 무거워져······ 이러다 나는 법을 영영 잊어버리겠어······ 그녀가 스르르 주저앉는다 잠이 와······ 나, 구석 홀릭이 있어 구석엔 구겨져도 아픔을 모르는 착한 혼(魂)들이 살지

 

  큰 달이 뜬 들판에서 춤추며 꽃을 따던 구석기의 여자를 생각하네 나는 생각하고 그녀는 구겨지네 너는 이제 은빛 늑대의 혼을 걸쳐도 좋으련만 은빛 속에 고운 잠 들어도 좋으련만

 

  불면이 깊은 그녀는 구석 홀릭, 비틀거리며 잠을 자러 구석으로 오지만 45억살 먹은 별에 깃들어 살게 된 백만년의 은빛은 벌거숭이라 아직 추워

 

  나는 말하고 그녀는 춤춘다 구석 홀릭의 무거운 혼, 구석기의 잠 속에서만 우리는 춤춘다

 

 

 

  시체놀이

 

 

  배롱나무 아래 나무 벤치

  내 발소리 들었는지

  딱정벌레 한마리 죽은 척한다

  나도 가만 죽은 척한다 바람 한소끔 지나가자

  딱정벌레가 살살 더듬이를 움직인다

  눈꺼풀에 덮인 허물을 떼어내듯 어설픈 몸짓

 

  어라, 얘 좀 봐, 잠깐 죽은 척했던 게 분명한데

  정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

  그럼 나는 어떡한담?

  햇빛 부서지며 그림자 일렁인다

  아이참, 체면 구기는 일이긴 하지만

  나도 새로 태어나는 척한다

  태어나 처음 햇빛 본 아기처럼 초승달 눈을 만들어 하늘을 본다

 

  바람 한소끔 물 한 종지 햇빛 한 바구니 흙 한 줌 고요 한 서랍 ······

  아, 문득 누가 날 치고 간다

  언젠가 내가 죽는 날, 실은 내가 죽는 척하게 되는 거란걸!

 

  나의 부음 후 얼마 지나 새로 돋는 올리브 잎새라든지

  나팔꽃 오이넝쿨 물새알 산새알 같은 게 껍질을 깰 때

  내 옆에 있던 기척들이 소곤댈 거라는 걸

  어라, 얘, 새로 태어나는 척하는 것 좀 봐!

 

 

 

  그림자의 키를 재다

                      

마무드 다르위시*가 죽었다. 팔월이었다.

                      나는 일기장을 펼치고 이렇게 썼다.

           "하나의 유랑이 끝나고 또다른 유랑이 시작되었다."

               그는 다시 올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또다시 이스라엘 지배하의 팔레스타인으로?

      오, 이런! 나는 다시 일기장을 펼치고 이렇게 썼다

     "팔월에 그는 돌아갔다. 유월에 다시 오기 위하여."

 

 

 

  죽는 순간 아주 살짝,

  키가 준다고 생각하는 부족이 있다

 

  안녕히! 나는 찢어진 당신 그림자에 인사한다

  심장에 흰 제비꽃 무덤이 돋은 나를

  내 그림자는 알고 있고

  풀 무덤의 무게만큼 가벼워진 그림자를 나는 사랑한다

  그러니 안녕히! 당신 그림자의 키를 잰 최초의 여름이

  풀꽃처럼 웃으며 지나가는 저녁이다

 

  찢어진 그림자가 사뿐히 공중에 떠오른다

  가벼워진 당신 그림자에 드리는 첫 입맞춤

  걱정 말아요 아주 살짝, 키가 주는 것일 뿐

  당신은 잘 싸웠어요

  잘 사랑했어요

  쉼표처럼,

  살짝 키가 주는 것

  쉼표처럼,

  살짝 쉬는 것

 

  팔월에 그는 돌아갔다

  유월에 다시 오기 위하여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끝은

  최초에 지나지 않는 최후의 그림자가

  떨어진 조그만 흰 꽃으로 정성들여 입술을 닦았다

 

 

  * 마무드 다르위시: 팔레스타인의 저항시인

 

 

 

 

 

  얼음놀이

 

 

  살처분, 이라고 했다.

  집단 살해,라고 말할 수 없으니까.

  TV를 끄고 나는 구역질을 시작했다.

 

  얼음놀이를 시작해 얼음집에 들어오면 얼음닭 얼음돼지가 되어 살 수 있어 병들지 않았는데 왜 내가 죽어야 해요? 왜 함께 죽어야 해요? 질문은 용납되지 않아 얼음집에 들어와 얼음놀이 할 테야 닭이, 오리가, 돼지가, 소년이, 소녀가 쿵쾅쿵쾅 얼음! 얼음! 외치는 소리

 

  '몸서리치다'

 

  얼음집 주련에 내려진 붉은 글씨

  이 말은 얼음집의 절창

  몸속에 서리가 들어차는 것

  몸 밖에 서리가 들이치는 것

  몸에 내린 서리를 치우고 싶은 것

  치우기 위해 치떠는 것

  치떨며 온몸에 서리가 꼭꼭 들어차는 것

 

  서리: 살처분할 수 없는 물들의 깍지 끼기

 

  몸서리치는 새들아 돼지들아 얼음집에 들어와라 쿵쾅쿵쾅 얼음! 얼음! 슬픈 마녀의 머리카락처럼 자라라, 얼음아, 얼음집을 머리카락 그물에 넣어 먼 하늘로 날아갈 테다 머언먼 하늘에 서리를 풀듯 너희를 풀어놓을 테다 따뜻한 햇살 닿아 얼음이 녹으면 너희는 새로운 날개를 얻어라 존중받는 발굽과 쫑긋한 청력을 얻어라

 

 

 

  축구장 묘지

 

 

  축구장이 응? 응? 자꾸 딴소리로 모래를 흘렸어요 아이들보다 더 빠르게 사막이 자라나요 축구장을 헤매며 아이들이 우는 동안, 축구장은 귀를 뒤적여 검고 메마른 모래를 조용히 털어냈어요

 

  축구장은 우리 마을의 자랑이었죠 모두가 축구장을 사랑했어요 며칠째 축구장으로 죽은 사람들이 밀려드네요 죽은 사람들을 빨리 파묻기 위해 축구장에 긴 고랑을 팠어요 흙을 덮고 아이들이 물을 부었죠 축구장을 꼭꼭 밟아주었죠 깨진 돌에 이름을 적어 문패처럼 꽂아주었죠 문패에 대고 소리쳤죠 엄마도 삼촌도 축구장 밑으로 들어가버렸거든요

 

  봉쇄가 풀리고 사람들이 돌아왔어요 길거리에 대충 묻어놓은 사람들을 축구장으로 옮기는 중이에요 운 좋게 살아남은 아이들이 물뿌리개를 들고 축구장을 뛰었어요 땀이 나게 뛰었어요 저녁은 짧고 저무는 해를 차며 아이들이 달렸어요 축구장에 떨어진 해님은 해골처럼 덜그럭거렸죠 해골은 딱딱해서 발이 아프지만 공 없이 축구장을 뛰는 것보단 낫죠

 

  더이상 축구를 하지 않는 어른들은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적기 위해 돌을 주우러 갔지만, 아이들은 상관없어요 돌은 언제나 사람보다 많으니까요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아이들은 그것도 걱정 없어요 모두들 축구장 안에 있으니까요

 

 

* 2004년 미군의 팔루자 학살로 사망한 민간인은 최소 2천여명에서 4천여명, 이라크전쟁 이후 오폭과 학살로 숨진 민간인은 4만명에서 10만명으로 추정되지만 미군은 민간인 희생자는 '부수적 피해'라며 따로 집계조차 하지 않고 있다.

 

 

 

  연분홍 시집

 

 

  7백년 전의 연꽃 씨앗이 출토되어 피워낸 꽃 한 송이 바라보다 나는 턱을 괴고 낮잠에 든 듯······ 코밑 간지러워 앞발을 들다가 연꽃 보러 온 나비를 친 듯······ 졸지에 발 하나를 잃어버린 흰나비 가만히 흘린 눈물자국 같은 걸 보아주는 누군가의 눈동자······ 그 눈동자 속에 연꽃 같은 홍채가 떠 있는 걸 본듯······ 그러다 결국 나비의 얼굴로 내가 그를 올려다보았던가······ 입가의 꽃잎이 조금 찢어진 채 말갛게 웃은 것도 같은······

 

  꽃 한 송이를 오래 보고 있으면 꽃 한 송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네 꽃잎 한장 한장 꽃술 하나 하나······ 꽃 한 송이 속의 그 많은 한 송이 꽃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네 아스라이 글썽이는 나는 누구인가 꽃이 진 후에도 꽃 한 송이가 졌다고 말할 수 없네 꽃 한 송이를 영영 모르는 얼굴로 나는 오늘 연꽃 핀 호수를 떠다니는 소금쟁이들의 발 치수 같은 것을 재러 가고 싶은데······

 

  누가 자꾸 연분홍 시집을 뒤적이며 시를 읽어달라고 하네;

  꽃 한 송이에 앉았다 떠난 나비의, 과거와 미래가 함께 진다, 꽃 한 송이가 질때,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2011년을 기억함

 

 

  그 풍경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가녀린 떨림들이 서로의 요람이 되었다

  구해야 할 것은 모두 안에 있었다

  뜨거운 심장을 구근으로 묻은 철골 크레인

  세상 모든 종교의 구도행은 아마도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의 신이 되는 길

 

  흔들리는 계절들의 성장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마른 옥수숫대 끝에 날개를 펴고 앉은 가벼운 한 주검을

  그대의 손길이 쓰다듬고 간 후에 알았다

  세상 모든 돈을 끌어모으면

  여기 이 잠자리 한마리 만들어낼 수 있나요?

  옥수수밭을 지나온 바람이 크레인 위에서 함께 속삭였다

  돈으로 여기 이 방울토마토꽃 한 송이 피울 수 있나요?

  오래 흔들린 풀들의 향기가 지평선을 끌어당기며 그윽해졌다

 

  햇빛의 목소리를 엮어 짠 그물을 하늘로 펼쳐 던지는 그대여

  밤이 더러워지는 것을 바라본 지 너무나 오래되었으나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번져온 수많은 눈물방울이

  그대와 함께 크레인 끝에 앉아서 말라갔다

  내 목소리는 그대의 손금 끝에 멈추었다

  햇살의 천둥번개가 치는 그 오후의 음악을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다만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합니다

  받아줄 바닥이 없는 참혹으로부터 튕겨져 떠오르며

  별들이 집이 여전히 거기에 있고

 

  온몸에 얼음이 박힌 채 살아온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해

  빈 그릇에 담기는 어혈의 투명한 슬픔에 대해

  세상을 유지하는 노동하는 몸과 탐욕한 자본의 폭력에 대해

  마음의 오목하게 들어간 망명지에 대해 골몰하는 시간이다

  사랑을 잃지 않겠습니다 그 길밖에

  인생이란 것의 품위를 지켜갈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압니다

  가냘프지만 함께 우는 손들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을 위해 눈물 흘리는

  그 손들이 서로의 체온을 엮어 짠 그물을 검은 하늘도 던져올릴 때

  하나의 그물코,

  기약 없는 사랑에 의지해 띄워졌던 종이배들이

  지상이라는 포구로 돌아온다 생생히 울리는 뱃고동

  그 순간에 나는 고대의 악기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태어난 모든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말한다

  살아가고 있다!

  이 눈부신 착란의 찬란,

  이토록 혁명적인 낙관에 대하여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온갖 정교한 논리를 가졌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옛 파르티잔들의 도시가 무겁게 가라앉아가는 동안

  수만개의 그물코를 가진 하나의 그물이 경쾌하게 띄워올려졌다

  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

  무한 하늘 한녘에서 하나의 그물코가 되는 그 순간

  별들이 움직였다

  창문이 조금 더 열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뾰족한 흰 싹을 공기 중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의 가녀린 입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처음과 같이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어른이라는 어떤, 고독

 

 

  좁은 골목길 언덕에서 소녀가 칼등을 잡고 햇빛을 자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반달칼을 손톱에서 꺼내 허공을 긋던 소녀가 소년을 안는다 비닐봉지가 부푼다 흘러내리는 새싹들, 부서지는, 일종의 꿈들

 

  있잖아 난 결국 너랑 자지 않을 거야

  어제 배운 그 시 기억나?

  응 그림자를 팔아먹은 지 오래되었어

  응응 그림자가 없으니 어른이 되어도 우린 함께 자지 못할 거야

 

  침묵이 엄마인 검은 바람의 말, 담장 밑 깨진 화분에 가득 고인 소음들, 잃어버릴 집도 돈도 부모도 가진 적 없는 꽃씨들, 떠도는, 일종의 방패인 칼들

 

  그림자가 없는 소녀와 소년이 한낮 골목길 언덕에서 시를 이야기하는 것이 다행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애들에게 들릴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인사한다

 

  미안해······ 나도······ 사생어른이야······

 

 

 

  쓸쓸하다

  그림자의 사전3

 

 

  쓸쓸하다,는 형용사

  하지만 이 말은

  틀림없는 마음의 움직임

 

  쓸쓸하다,를

  동사로 여기는 부족을 찾아

  평생을 유랑하는 시인들

 

  유랑이 끝날 때

  시인의 묘비가 하나씩 늘어난다

 

 

 

  연두의 내부

 

 

  막 해동된 핏방울들의

  부산한 발소리 상상한다

  이른 봄 막 태어나는 연두의 기미를 살피는 일은

  지렁이 울음을 듣는 일, 비슷한 걸 거라고

 

  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운다고

  상상해본다 최선을 다해 웃는다고도

  최선을 다해 죽는다거나

  최선을 다해 이별한다거나

  최선을 다해 남는다거나

  최선을 다해 떠난다거나

 

  최선을 다해 광합성하고 싶은

  꼼지락거리는 저 기척이

  빗방울 하나하나 닦아주는 일처럼

  무량하다 무구하다 바닥이 낮아진다

  아마도 사랑의 일처럼

 

 

 

 

  아직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꽃 피지 않는 봄이 올 것이다

  시인의 부음이 그전에 당도할 것이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이주하는 구름들의 해진 눈꺼풀 위에 문 닫은 나무들의 냉담 위에

  비린 바람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붉은 바람이

 

  여러번 태어나도 매번 처음인

  매번 연습이 모자라는 생

  아직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며 깃발을 흔드는 죽은 시인이여 장미 열매를 쪼개고 뜨거운 붉은 차돌을 꺼내 손에 쥔 아직 살아 있는 시인이여

  가로수 밑 식탁에 작년 꽃의 두개골을 올려놓지 말 것

  기억을 두려워해 기억을 배신하는 눈보라

  아직 때가 아니라고

  웅얼거리는 하얗게 혼이 빠진 천둥소리 밑에서 불면을 향유하는 잠입자여

  돈 때문에 질병 때문에 절망 때문에 질투 때문에 분노 때문에 전쟁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경쟁 때문에 증오 때문에 냉소 때문에 무지 때문에 무수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시취를 맡았다는 개들 아직 없고

  미래가 중단되었다는 진단서 아직 없고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라는 방부된 속삭임,

  아직 살아 있는 시인은 죽을 때를 기다렸다

 

  희망은 아프다 아픈 곳에서 태어나는 게 희망이므로

  나는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불치의 것들과 함께 끝까지 갈 것이므로

  저 숱한 죽음의 이유는 비루하다 최선은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이런 말을 지껄이는 시인의 매장을 바라는 은밀한 마음들을 애도하며 시인은 썼다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불명예다

 

  내 시는 명예의 쪽인가 불명예의 쪽인가

  검은 밑줄이 시인이 남긴 마지막 기록이었다

  밑줄의 오른쪽 끝에 힘이 들어가 씨앗처럼 잠시 반짝였으나

 

  꽃은 피지 않았다

  아무도 사랑 때문에 죽지 않게 된 지 오래되었으므로

 

  아직

  사랑해서 죽은 자,

  마지막 시인이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