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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배움터

영미시 감상

작성자몽유|작성시간06.08.23|조회수245 목록 댓글 2
 

Aunt Helen


   T. S. Eliot


Miss Helen Slingsby was my maiden aunt,

And lived in a small house near a fashionable square

Cared by servants to the number of four.

Now when she died there was silence in heaven

And silence at her end of the street.

The shutters were drawn and the undertaker wiped his feet--

He was aware that this sort of thing had occurred before.

The dogs were handsomely provided for,

But shortly afterwards the parrot died too.

The Dresden clock continued ticking on the mantelpiece,

And the footman sat upon the dining table

Holding the second housemaid on his knees--

Who had always been so careful while her mistress lived.


국역(석우 생)


숙모 헬렌


미쓰 헬렌 스링스비는 결혼 않한 나의 숙모였다.

그는 번화가 근처 작은 집에서 살면서

네 명에 이르는 하인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이제 그가 죽자 하늘 나라는 침묵에 잠기고

그가 죽은 거리에는 침묵이.

덧문이 닫히고 장의사 직원이 그의 두발을 닦는다--

그는 이런 종류의 일이 전에도 일어났음을 알고 있었다.

개들은 후하게 먹거리를 받았지만,

앵무새는 그 뒤에 역시 죽게 되었다.

드레스덴 시계는 벽난로 위에서 계속 똑딱 소리를 내고,

하인은 식탁 위에 앉아서 두 번째 하녀를 그의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있다--

그는 그의 여주인이 살아 있을 때 늘상 매우 조신하였었다.



A Semi-Revolution


   Robert Frost


I advocate a semi-revolution.

The trouble with a total revolution

(Ask any reputable Rosicrucian)

Is that it brings the same class up on top.

Executives of skillful execution

will therefore plan to go halfway and stop.

Yes, revolutions are the only salves,

But they're one thing that should be done by halves.


국역(석우 생)


반혁명


나는 반혁명을 주장한다.

완전한 혁명은 같은 계급을 정상으로

끌어 올리는 문제가 있다.

(평판있는 장미 십자 비밀 결사원 아무나 붙잡고 물어 보라)

그러므로 노련하게 사형을 집행하는 이들은

중간까지만 가서 멈추는 계획을 세울 것이다.

그렇다, 혁명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까지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T. S. Eliot/Robert Frost 시 감상


(1) 에리오트, “숙모 헬렌”


   하나의 연으로 이루어진 “숙모 헬렌”은 내용상 세 국면을 보여 주고 있다. 1) 숙모의 죽음, 2) 앵무새의 죽음, 3) 하녀의 움직임 등이 그것이다. 이 시는 전형적 서사시이다. 서정을 위한 배려라는 것은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형식에서 볼 때 t/re/r 등의 음이 반복하여 보이는 것이 그런 의미에서의 문학적 배려라면 배려이다. 내용을 가지고 보면 숙모의 죽음 에 관한 시인데도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감정--가령 슬픔/절망과 같은--조차도 흔적이 찾아지지 않는다. 그의 위에서의 시는 그저 모래알 같은 글자를 모아서 만들어 낸 사막 같은 글일 뿐이다. 그런데도 지난 세기 가장 뛰어난 시인 둘을 들라면 하나는 예이츠요 다른 하나는 에리오트라고 흔히들 말한다. 에리오트, 그것은 왜 그렇게 유명한 이름인가. 그는 왜 그렇게 유명한 시인인가. 百聞이 不如一見이라고 있다.

   이 시에서는 네 명의 주인공이 있어서 서사의 수레를 끌고 간다. 숙모/장의사 직원/하인/하녀, 이 네 사람이 그들이다. 이 넷이 각기 하나씩 기둥을 차지하는 사각의 집이 서사의 복판에 있다. 숙모는 하녀에 대응한다. 시인이 하녀를 ‘housemaid'라고 지칭하고 숙모를 ’maiden aunt'라고 일컫고 있음은 둘을 대응시키려는 뜻에서였다. 한편 장의사 직원은 하인과 대응관계에 있다. 그런 뜻에서 시인은 장의사 직원을 ‘wiped his feet'라고 설명하고 이에 대응시켜서 하인을 ’footman'이라고 표현하였다. 에리오트의 언어 다루는 솜씨는 마치 도자기 굽는 이나 또는 떡 만드는 이를 연상하게 한다. 그의 글 다루는 기술은 장인의 전형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주인공들이 제각기 수행하는 역할에 유의하여 이들의 상호관계를 보자. 숙모는 장의사 직원과 상응관계에 있다. 죽은 숙모는 장의사 직원에 의하여 매장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숙모의 사후의 세계는 그 직원에 의하여 인도될 것이다. 한편 하녀는 하인과 상응관계에 있다. 하녀는 하인의 인도를 받아서 그의 삶을 꾸려가게 될 것이다. 하인이 하녀를 그의 무릎 위에 앉혔다는 사실이 이 점을 암시하여 준다. 위의 이야기를 하나의 도식으로 보이면 아래에서와 같다.


          A Rectangle:


         a숙모(죽음)                   b하녀(살아 있음)




         a1장의사 직원                b1하인


   이 사각구도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숙모의 죽음이다. 숙모의 죽음과 일정한 관련을 가지는 것이 과학문명이다. 드레스덴 상표의 독일제 벽시계가 그 상징이다. 그것은 벽난로 위에서 쉬임없이 똑딱 소리를 내면서 끊임없이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그 소리는 명확하고 그 길은 정확하다. 그 시계가 집 안에서 네 주역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이것은 과학문명이 네 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서사의 모든 국면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계가 과학문명의 비유적 상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벽시계의 눈 앞에서 일어난 숙모의 죽음, 과학문명을 전제로 해서 전개되는 숙모의 죽음 이야기,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시인은 죽은 이를 숙모/aunt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 숙모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속에서는 숙모의 존재가 무색하다. 그는 죽은 이를 더 이상 숙모로서 예우하고 있지 않다. 숙모를 애도하는 기색이 어디에도 없다. 숙모의 죽음을 지칭하는 표현에서도 시인은 그런 사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을 주는 말을 쓰고 있다. 가령 그는 숙모의 죽음을 ‘died'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her end'라고 지칭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숙모의 죽을 일러서 ‘passed away'라거나 하는 숙모의 지위에 걸맞는 말을 쓰고 있지 않다. 이것은 숙모라고 하는 가족원의 지위, 그 사회적 지위, 그 사회적 범주를 부정하는 일이다. 먼저 숙모라고 부르고 실제의 예우에서는 그와 다르게 하는 것은 반어적/ironical이다. 반어적 기법에 의하여 시인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숙모의 인간화라고 할 수가 있다. 숙모를 하나의 인간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불러 두어도 무방하다.

   시인은 더 나아가 숙모의 죽음을 동물의 죽음과 같은 차원에서 보고 있기도 하다. 그가 숙모의 죽음을 앵무새의 죽음과 동일한 선상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The parrot died too/this sort of thing'이라는 말이 여기서 우리의 주의를 끈다. 앞에서 ’too'라는 말이 심상하지가 않다. 그 말이 있으므로 해서 위의 이야기는 숙모도 죽고 앵무새도 죽었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시인의 인식을 보다 명학하게 해주는 말이 ‘this sort of thing'이라고 한 표현이다. 이 말은 숙모와 앵무새, 그 둘의 죽음이 같은 종류의 일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숙모죽음의 동물화라고 보아 두어도 무방하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침묵이라는 명제를 끄집어내었다. 시인은 말한다. “숙모가 죽자 하늘 나라가 침묵에 잠겼다/when she died there was silence in heaven"고. 그리고 이어서 시인은 ”silence at her end of the street/그 거리 그녀의 죽음에 침묵이"라고 하였다. 그녀의 죽음을 굳이 ‘end'라고 말한 것은 죽음의 시간성을 보이기 위함이다. 이것은 ’그 거리‘의 공간성과 일정한 유대/결합/조합을 염두에 둔 문학적 배려이다. 지점과 시점, 공간과 시간, 이 둘의 만남에 결정적인 쐐기의 구실을 하는 표현이 “at her end/그 녀의 죽음에”이다. ’end'는 시점/시간을 뜻하고 'at'는 지점/공간을 뜻한다. 이 표현에 의하여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조화를 이룬다. 시간과 공간이 하나가 되는 곳에 시인은 ‘침묵/silence'를 정확하게 배치하였다. 시인이 여기서 말하는 침묵은 무의미 그 이외의 것이 아니다. 위에서 말한 인간화/동물화 그 모두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시인의 이런 인식은  숙모죽음의 무의미화라고 불러 두어도 좋겠다. 어디에서도 어느 때라도 숙모의 죽음은 무의미하게 되었다고 시인은 선언하였다.

   숙모는 죽어서 가족원의 지위가 박탈되었다. 그의 죽음은 그가 키우던 앵무새의 죽음과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시공간적으로 그의 죽음의 의미는 통째로 실종되었다. 시인의 싯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에리오트는 피도 눈물도 도덕도 없는 시인인가. 숙모의 죽음이, 인간의 죽음이 언제 어디서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니. 그러나 우리는 냉정하게 그를, 그의 시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그가 그의 절망의 노래를 읊기 전에 드레스덴 시계의 상징을 통하여 현대의 과학문명이 숙모의 죽음과 그 뒤 전개되는 여러 국면의 변화를 모두 주재하게 배려하였음을 상기하여 둘 필요가 있다. 그의 시는 이러한 비극적인 사태가 현대과학문명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위의 시는 과학문명 속에서 우리는 가족을 잃고 인간성을 잃고 그리하여 마침내 비극의 절벽에, 절망의 벼랑에 서 있다고 말한다. 위의 시는 그러한 현대인의 서글픈 초상을 그려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위의 시가 여기서 끝나고 만다면 우리는 바쁜 시간에 에리오트를 가슴 속에 넣어 둘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절망을 노래한 시인이 어디 하나 둘인가. 에리오트 시의 위대성은 그 절망을 뛰어 넘어 새로운 전망을 문학적으로 기막히게 잘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그 새로운 전망을 보여 준 주된 기법은 역설이다. 위의 시는 깊은 연못과 같다. 그 깊은 물 어딘가에 감탄할 정도의 역설드라마가 숨겨져 있다. 에리오트는 어떻게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소생으로 끌고 가고 있나. 위에서 평자는 서사의 사각구도를 말하였다. 이제 그 사각의 집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점을 관찰할 차례이다. 우리는 그 관찰의 끝에서 한 시인의 위대한 생각을, 아름다운 세계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위 시의 서사는 시간의 변화에 조응하여 세 개의 국면으로 전개된다.

   첫 번째 시기는 숙모가 생존하여 있던 시기이다. 숙모는 4 명의 하인의 시중을 받으면서 혼자 살았다. 애완견이 두 마리 이상 있었고 앵무새도 한 마리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앵무새가 죽었다. 두 번째 시기는 숙모가 죽은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는 하인이 하녀와 결합하는 시기이다. 다시 정리하면 첫 번 째 시기에 앵무새가 죽고 두 번 째 시기에 숙모가 죽었다. 세 번 째 시기에는 하녀가 하인과 결합하였다. 이 일련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 시기이다. 시간적으로 앞서 일어난 일들이 여기서 하나의 매듭을 짓게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하인의 결합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시 서사의 전체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서 무엇보다도 긴요하다. 

   문제의 하녀에 대하여 에리오트는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하녀가 주인 숙모가 생존하였을 때에는 조신하였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하녀가 주인이 죽은 지금은 하인의 두 무릎 위에 앉아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두 가지를 암시한다. 하나는 하녀의 지위가 예속적인 것에서 자주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하녀의 행동이 구속에서 자유로 해방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가 제 1/제 2/제 3 국면 전환의 역동속에 드러나고 있다.

   국면의 전환은, 그 역동적 변화는 반드시 인과률/causality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옳다. 인과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물의 변화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 1 국면에서 제 2 국면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인과관계가 파악되지 않는다. 그것은 에리오트의 작업상 未備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이 평자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탓인지도 혹 모르겠다. 다행이 제 2 국면에서 제 3 국면으로의 변화, 숙모의 죽음과 하녀의 등장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局面의 三轉를 통하여 서사가 도달하는 종착역에 하녀의 변신이 있다. 그 하녀의 변신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는 무엇일까.

   하녀의 변신이 가지는 의미의 핵심은 다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녀가 주인의 독신/고독을 극복하고 결혼/행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주인의 죽음/침묵/무의미를 극복하고 삶/소리/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그저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앵무새의 죽음과 숙모의 죽음의 계기적/발전적/역동적 변화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앵무새의 죽음과 숙모의 죽음 뒤에 필연적으로 찾아온 것이 하녀의 소생/행복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앵무새의 죽음과 숙모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녀의 소생이 가능하였다는 논리를 이끌어 낼 수가 있다. 죽어야 산다든가,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든가는 물론 역설이다. 그 역설의 이야기가 문학의 언어로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 에리오트의 “숙모 핼렌”이다.

    과학문명에 의하여 유린된 인간성, 그래서 찢긴 그 인간성을 찾아 헤메는 현대인에게 건네는 에리오트의 역설의 말이 진실로 다가오지 않는가. 숙모 죽음에 대한 시인의 냉정함, 그 자체가 역설적이다. 숙모의 사랑에 대한 뜨거운 헌사가 따로 있다고 한들, 그것이 시인이 보여준 차가운 사랑, 이보다 더 인간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숙모의 죽음에 대한 통곡의 애도가 따로 있다고 한들, 그것이 시인이 보여주는 살아 있는 죽음, 이보다 더 감동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다 역설의 미학이리라. 모두가 다 문학의 축복이리라.


(2) 푸로스트, “반혁명”


   앞서 본 에리오트의 “숙모 헬렌”은 13 행 1 연의 시이다. 짧은 시에 죽음/과학문명/현대 등 무거운 주제들이 모두 용해되어 하나의 미학의 세계를 일구어내고 있다. 그것은 에리오트가 모던니스트답게 절제된 정확한 언어를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물론 문학적으로 적절하게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쓴 결과이다. 위에 쓴 그의 영어는 중학교 교과서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의 쉬운 영어이다. 문법에 어긋나는 글쓰기조차가 없다. 콤마 마침표까지도 정확하게 어법에 맞는다. 문학의 기법에서도 자잘한 자꾸 꾸미기는 아예 해당사항이 없다.

   로버트 푸로스트의 “반혁명”에서도 에리오트의 시풍은 그대로 느껴진다. 그의 시는 7 행에 지니지 않는다. 마치 일본의 하이꾸 시나 우리의 시조를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 단 몇 줄에 그는 혁명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7 행시가 마치 혁명론을 주제로 쓴 장문의 논문이라도 되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혁명의 목적과 방법은 물론이고 그 본질에 대하여서조차도 정연한 논리의 체계로써 압축적으로 함축적으로 문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도 중학교 교과서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쉬운 영어에다가 문법에 어긋나는 게 없다. 푸로스트는 예이츠나 에리오트처럼 노벨문학상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에 못지않은 시인이었다. 우리에게는 케네디의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를 받았고 그와 가까웠던 시인이었다고 더 알려져 있다.

   푸로스트는 위의 시에서 혁명을 말한다. 그는 완전혁명은 문제가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완전혁명을 하게 되면 혁명주도자/혁명계급이 정상에 올라오게 되어서 않된다는 것이 그 논거이다. 그러나 주도계급이 정상에 올라 정권을 잡는 것이 바로 혁명의 본뜻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이야기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도 사실을 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은 반어/아이러니이다. 주도계급이 정상에 올라오면 않되기 때문에 시인은 반만 이루는 혁명을 주장한다고 한다. 반만 이루는 혁명을 어떻게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인가.

   시인은 말한다. 사형집행인이 사형을 반만 집행하고 그치는 방법대로 하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 방법론도 말이 되지 않는다. 사형집행에서 반만 하는 것이란 있을 수가 없다. 사형집행의 성공여부는 사형수의 목숨이 끊어졌는가 아닌가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이외의 기준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실제에 있어서도 사형집행이 반만 이루어지는 그런 예는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찾아지지 않는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시치미 딱 떼고 우기는 것, 시인은 문학의 언어에서 반어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줄줄이 반어의 기법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하여 궁극적으로 그가 이 시에서 말하는 것은 가능한 혁명이라는 역설이다.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상식적 담론을 뒤집어서 가능한 혁명(시인이 하는 말로는 total revolution/완전혁명)이라는 새로운 명제 새로운 담론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위의 시이다. 문학이 가지는 묘미를 어찌 이리도 멋지게 일러줄 수가 있을까. 문학이 감동의 원천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까닭이리라. 


    

      

          자연과 인간, 그리고 움직이는 예술:

                동영상 “봄, 그 눈부심으로”부터의 영감


                    2004년 3월 31일/구례/석우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9)는 낭만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뒤 그는 불란서의 상징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말년에 가서 그는 모더니즘의 경향이 짙은 시를 쓰게 되었다. 자연이 그의 시에 이러한 여러 문예사조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그의 초기 시에는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자연이 무엇보다도 큰 주제를 이루었다. 특히 자연을 찬양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기의 시가 되어서는 인간이 강조되었다. 상징주의의 영향을 입게 된 결과이다. 특히 인간의 절망와 허무와 부정 따위가 논의의 초점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예이츠가 말년에 이르러서 시 속에서 예술을 유난히 강조하게 되었다. 그의 새로운 소망이 싹튼 것이다. 예술의 힘으로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지양을 꿈꾸게 된 것이다. “비잔티움 항해(Sailing to Byzantium)," "학생들 속에서(Among School Children)," 그리고 ”비잔티움(Byzantium)" 따위와 같은 말년의 시 속에 그의 이러한 꿈이 잘 드러나 있다.

   자연과 인간과 예술,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와 모더니즘, 그 변증법이 예이츠가 말년에 던져 놓은 명제이다. 그의 시 속에 자연은 끝까지 남아 있지만 찬양은 사라졌다. 인간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절망은 사라졌다. 그는 보들레르 등이 대표하는 불란서 상징주의의 부동의 명제 ‘절망의 미학’을 단호하게 부정하였다. 그는 “학생들 속에서”에 다음과 같이 또렷한 말로 잘라서 말하였다.


       The body is not bruised to pleasure soul,

       Nor beauty born out of its own despair,

       (the 8th stanza, "Among School Children", p.525,

       The Norton Anthology of Poetry)


       몸이 망가져야 영혼이 즐거운 것은 아니며

       몸이 절망해야 아름다움이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자연을 비껴 놓은 자리에 예이츠는 인간을 세워 놓았다. 절망과 퇴폐와 허무를 지워낸  자리에 예이츠는 불멸과 불후와 영원의 꿈을 심어 놓았다. 인간의 불멸을 이루어낼 수 있게 되기를 예이츠는 예술에게 빌었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시인들은 아직도 인간의 허무의 그림자를 이끌고 숲 속을 배회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한 세기 이전의 낭만주의의 나무를 매만지면서 상징주의의 절망을 노래하고 있다. 그들은 70년 전 한 늙은 시인의 이러한 고뇌에 찬 생각을 듣고 있지 못한 것일까. 질풍노도도 흐느적거림도 이제는 우리의 주위에서 그 위세가 좀 낮아졌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불멸의 미학이 우리 시인들의 새로운 화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자연과 인간의 화해와 화합과 합일은 동양사상의 핵심을 이루어 왔다. 게다가 많은 시인들은 실제에 있어서도 그러한 생각을 보듬고 그러한 방향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러므로 예이츠가 자연과 인간의 변증법을 말하였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그 무엇일 수는 없다. 그러나 예이츠처럼 자연과 인간의 지양을 위하여 작품 속에서 예술을 그 촉매제의 상징으로 직접적으로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다는 시인의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다. 금으로 만든 새가, 비잔티움의 예술작품이, 비잔티움이, 인간의 절망을 묻고, 인간의 허무를 허물고, 인간의 불후를, 인간의 영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을 아름다운 시의 언어로써  형상화한 시인이 따로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는 구례에 살면서 가끔 예이츠의 시를 떠올릴 때가 많다. 주위에는 절망 속에 사는 이들이 많다. 어쩌면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한지도 모른다. 절망, 그것은 살아있는 자의 운명이리라. 인간사의 사정이 그러한데도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자연은 오히려 제 세상을 만난 듯 환희에 들떠 있다. 그들의 계절, 그들의 봄이 찾아 온 까닭이다. 꽃들이 더욱이나 그러하다. 매화가 산기슭 잔설을 헤집고 피어서 아직도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얕은 산골짜기에는 산수유가 만발하다. 뒤미처 벚꽃이 막무가내로 화사한 모습을 들이밀고 있다.

   매화와 산수유와 벚꽃, 흰색과 노란색과 분홍색, 저마다 빛깔이고 저마다 꽃이다. 그들 사이에 다툼이란 없다. 그렇다고 서로 사이에 다름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다르기마저도 없이하고 모두가 하나가 될 수는 없을까. 하나의 색이 인간의 절망을 이울게 하고, 하나의 꽃이 인간의 불멸을 영원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러한 우리의 소박한 꿈을 꽃피울 수는 없을까. 인간이 하나의 꽃이 되어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 한 조각이 내게 있다. 다만 어떻게 그러한 소망을 이루어 낼 수가 있을까가 문제이다. 예이츠의 예술은 물론 위대하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나는 오랫동안 고민하여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홀연히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다. 번개처럼 생각 하나가 나의 머리를 스쳐갔다. 예이츠의 비잔티움을 움직여 보면 어떨까.


       Miracle, bird or golden handiwork,

       More miracle than bird or handiwork,

       Planted on the starlit golden bough,

       Can like the cocks of Hades crow,

       Or, by the moon embittered, scorn aloud

       In glory of changeless metal

       Common bird or petal

       And all complexities of mire or blood.

       (the third stanza, "Byzantium",

       The Norton Anthology of Poetry, p. 526)


       기적, 금으로 빚어 만든 새,

       기적은 그 이상이야,

       금으로 빚은 나뭇가지 위에

       별빛에 젖어 자리하고 있거니,

       저승에 사는 까마귀의 부리처럼,

       비애에 젖은 달 옆에서,

       소리를 내어 비웃을 수 있겠지.

       여니 새나 꽃잎을,

       그리고 모든 게 얽혀 있는 진창이나 피를,

       변하지 않는 쇠붙이의 영광을 위하여.

       

   불변을 다짐한 쇠로써 예이츠가 새와 가지와 꽃잎을 빚어 놓았다. 그의 시 속에서 말이다. 그러나 그 수공품들에게서는 맥박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예이츠가 정성을 다하여 빚어 놓았지만 그 정교한 수공제품에 아쉽게도 심장이 없다. 심장이 뛰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쇠의 약속을 믿을 수 있을까. 우리가 마음을 변하지 않겠다는 쇠의 맹세를 무슨 수로 믿을 수가 있을까.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비잔티움 예술품을 움직이는 것이다. 비잔티움 전체를 움직이자. 이러한 생각이 한 순간에 나를 사로잡았다. 동영상 “봄, 그 눈부심으로”가 내 영감의 뇌관에 불을 당겨준 것이다. 

   “봄, 그 눈부심으로”에는 흰색 꽃과 노란색 꽃과 분홍색 꽃이 있다. 그 셋이 움직임 속에서 하나의 색으로, 하나의 꽃으로,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의 이름으로 살아서 숨쉬고 있다. 구례 벌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매화꽃과 산수유꽃과 벚꽃이 비로소 하나의 꽃의 이미지로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내 마음의 한 구석에서 불멸의 꽃이 새로이 피어나게 될 전망이다. 움직이는 비잔티움, 움직이는 예술, 움직이는 예이츠, 그것에 힘입어서 말이다. 움직임의 비밀스런 의미를 내게 일깨워준 “봄, 그 눈부심으로”부터의 영감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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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자유 | 작성시간 06.08.27 에리오트, 프로스트, 예이츠까지...좋은시와 해설... 감사합니다...
  • 작성자lucas | 작성시간 07.07.11 꼬부랑 글씨 땜시..지쳐습니더..! 공부 열심히 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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