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6학의 경사란 경전과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경의 교육이란 뜻입니다. 즉 개경의 교육과정이란 뜻입니다. 국자감의 교육과정이 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으로 6개의 교육과정이란 뜻입니다.
관학7재는 내용(과목)에 따른 구분이고, 경사6학은 신분에 따른 구분입니다.
인종 때 경사6학제도가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경사6학에 들어갈 학생의 신분을 3품, 5품, 7품이상, 8품이하로 구분한 것입니다.
태조 때부터 개경에 있던 학교(경학)을 성종 때 개편하여 국자감으로 설립하여, 문종때 와서 경사6학제도가 거의 완성됩니다.
그 후 사학이 발전하면서 학생들이 사학으로 몰리면서 12공도가 생겨나고, 그 중인 하나인 문헌공도에서는 9채의 건물(9재학당)에 건물별로 과목을 달리하여 가르쳐, 교육의 전문화를 기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점점 더 사학으로 몰리게 됩니다. 이에 관학인 국자감에서도 예종 때 7채의 건물(7재)에 건물별로 과목을 달리하여 가르치기 시작하며 관학의 부흥을 꾀합니다. 그 후 인종 때 국자학 태학 사문학의 신분에 따른 구분을 국자학 3품, 태학 5품, 사문학 7품이상으로 확립하여 나누고, 기술학인 율학,서학,산학은 8품이하로 구분하여 기존의 경사6학제를 신분에 따라 재정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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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초에 태조가 학교를 세웠다는 기사나, 989년에 교육에 공로가 많은 태학조교(太學助敎) 송승연(宋承演)을 국자박사에 제수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국초부터 신라의 국학(國學)을 이은 국립대학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다가 성종대에 당·송의 제도를 참작하여 정식 국립대학으로 개편된 것으로 보인다. 국자감의 명칭은 고려 후기에 몇 차례 개칭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간섭으로 관제를 개편할 때 국학으로 개칭했다가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즉위하여 성균감(成均監)으로 고쳤다. 성균감은 1308년에 충선왕이 다시 즉위하면서 성균관(成均館)으로 고쳤다. 그뒤 1356년(공민왕 5)에 반원개혁의 일환으로 관제를 복구할 때 국자감으로 환원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으로 개칭되어 조선으로 이어졌다. 학사로는 강학소(講學所)인 돈화당(敦化堂:뒤의 明倫堂)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재(齋)가 있었고, 그밖에 생도들의 공궤(供饋)를 맡는 양현고(養賢庫)가 있었다. 명칭 변경에 따라 국자감의 성격도 변해갔다. 국자감에서는 국자학(國子學)·태학(大學)·사문학(四文學) 등의 유학부 외에 서학(西學)·산학(算學)·율학(律學) 등의 잡학부가 추가되어 문종조(1047~82)에는 경사(京師) 6학이 갖추어졌다. 이런 편제에도 불구하고 국자감은 재정의 어려움과 사학(私學)의 발달로 인해 위축되었다. 1102년(숙종 7)에는 국학폐지론까지 대두하기도 했다. 이에 예종은 관학진흥책을 써서 1109년에 국학에 7재(七齋:7종의 전문강좌)를 설치하고, 1119년에는 장학재단인 양현고를 설치했다. 예종의 뒤를 이은 인종대(1122~46)에도 관학진흥책은 계속되어 학식(學式)을 상정(詳定)했다. 그뒤 주자학이 전래되어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을 중요시하면서부터 유학만을 중시하게 되었다. 1298년 충선왕은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고치면서 여기에 명경학(明經學)을 더하여 7학을 이루었다. 마침내 1389년(공양왕 1) 잡학을 분리시키고 유학만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개편했다. 이때 10학을 새로 설치하였는데 잡학을 예속시켜, 율학은 전법사(典法司), 산학은 판도사(版圖司), 서학은 전교시(典校寺)에서 교육을 받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