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의 원인, 전개과정 ( 과정 ) , 결과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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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대통령은 정권의 붕괴를 가져온 4월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것은 3.15 부정선거였다.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제 4대 정.부통령 선거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급사함으로써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자동적으로 당선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은 이미 85세의 고령이었으므로 언제 사망할지 모로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사후를 생각할때 자유당으로선 부통령을 민주당에 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자유당은 부통령 후보로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했다.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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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2일자 부산일보에 머리와 눈에 최루탄이 박힌채 전날
마산중앙부두에 김주열군은 당시 17세0의 시체 사진이 실렸다.
김주열의 사진이 공개되자 마산에서는 12일부터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의 시위는 3월 15일 시위에 이은 제2차 마산시위였는데, 이것은 8일간이나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시민과 학생들은 매일 수만명씩 몰려나와 시위를 전개 하였고, 마산 경찰서와 파출소,
자유당의 의원이었던 한윤수의 사무실과 반공청년단 사무실에 대한 공격도 계속 되었다.
거리에서는 바리케이트가 설치되었고, 경찰은 실탄 사격을 가하였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멈출줄도 모르고 싸움을 전개하였다.
마산 시위는 사태를 전국으로 확신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4월 18일에는 서울 고려대생 4천여명이 시위를 벌이다가 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많은 부상자를 냈다.
그러자 상황은 급격히 발전하였다.
4월 19일 전국27개대학생이 일제히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은 국회 의사당이 있는 태평로 일대를 완전히 메웠고,
일부 학생들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담판을 요구하면서 경무대로 향했다.
이날의 시위는 2월 18일 대구학생 시위, 3월 15일 마산시위를 잇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가 전국민적 항쟁으로 확산 되었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최대시위였다.
이로써 독재와 부패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마음이 자유당 정권을 완전히 떠나버렸음이 확인되었고,
뒤이어 23일 장면 부통령이 정식으로 사임하고 25일에는 삼엄한 게엄령 아래서 대학교수단의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를 통해 하야 성명서를 발표했고
27일 오후 2시 국무원 사무국을 통해 대통령 사임서를 성식으로 국회에 제출하였다.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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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무궁할것만 같았던 자유당 정권의 붕괴와 권위주의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대중은 자신의 힘과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경험했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진통도적지 않았다.
학생과 혁신세력이 중심이 된 통일운동은 남북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하엿지만,
한편으로는 냉전체제 아래서 군부를 비롯한 보수세력들의 우려감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