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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늘

작성자지존|작성시간12.06.03|조회수133 목록 댓글 3

 

                                                         

                              하                         

                                                                                                                                 池      

  하늘은 대지의 거울이요, 대양의 거울이요. 때로는 우주를 바라보는 양면 거울이기도 하다. 땅을 떠나 하늘에 머무른 세월을 시간으로 모아서 칠백 여일, 나는 그 하늘에 엎드려서 변해가는 사계절의 지구를 보았고, 하늘에 누워서는 일정한 질서 속에서 회전하는 무한한 우주를 바라 볼 수 있었다.

  봄이 오면, 알라스카 매켄리 산봉우리의 빙설(氷雪)이 하얀 털모자의 실오라기를 풀어내고, 아르젠티나 초원에는 온갖 화사한 꽃들이 피어난다. 여름이면 알류산 열도의 검푸른 바다에서 돌고래 행렬이 보오얀 물안개를 뿜어내며 춤을 추고, 록키 산야의 숲은 초록 물감으로 번지어 진다. 가을이면, 아프리카 메마른 사파리 평원에서 코뿔소 무리가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고, 캘리포니아 황금빛 들녘에는 오곡이 무르익어 간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시베리아 설원(雪原)을 시작으로 하얀 눈이 대지를 덮으면서 사계절을 마감한다.

  먼동이 트는 새벽이 되면, 외롭게 남아서 반짝이던 샛별마저도 사라지고, 동녘의 대양에서 끓어오르는 바닷물을 솟치고 떠오른 태양은, 장엄한 낮 하늘의 주인이 된다. 위용(偉容)찬 정열도 시들어지는 석양이 되면, 태양은 하늘을 달에게 인계하고, 서서히 황혼의 노을 속으로 지평선의 눈금을 세면서 숨어버린다.

  어쩌다 달이 지구 뒤편을 비추는 날이면, 하늘에는 까만 융단이 깔려지고 온통 반짝이는 별들의 세상이다. 별의 제왕 북극성 주위에는 카시오피아, 큰곰, 세페우스, 작은곰을 위시한 작은 군웅들이 둘러서서 호위하고, 남지나 해협의 하늘에는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반짝인다. 오리온 소국(小國)들 사이 길섶에는, 밤이 쏟아놓은 보석으로 찬란한 은하수 물결이 오작교 아래에서 출렁인다.

  그믐이 가까워 오면, 북극의 하늘에는 유령이 지어놓은 오로라 동굴 속에서 천태만상의 빗살무늬가 오색창연하다. 황금빛 꽃가루를 뿌리며 떨어지는 유성이 혜성 사이를 헤엄쳐 간다. 차가운 겨울달이 바다에 잠기는 날 밤이면, 하늘에는 달 속에 달이 있어 두 개의 달이 담겨있다. 그래서 우주는 무한대의 별들이 신비롭게 존재하면서, 아무리 벗겨도 끝이 없는 비밀스런 수수께끼의 공간인가 보다.


  지난 40여 년 동안, 하늘은 내 마음의 거울이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잔디에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에는, 해맑은 청춘의 미래가 있었고, 하얀 실구름 사이로 파이럿의 꿈을 향한 내 붉은 마음이 흘러가고 있었다.

  첫 비상(飛翔)을 시작했던 메추리1) 시절에는, 하늘의 의자에 앉아서 땅이 뒤집히는 무중력 공간속에서 빙빙 돌아가는 곡예의 유영을 하였었고, 경륜이 쌓여진 보라매2) 시절의 여유로운 하늘에는, 윤동주 시 ‘별을 헤는 밤’ 속에서 그리운 고향의 친구들과 어머니가 계셨고,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무대에서 마리오란자가 카바라톳시의 통곡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부르고 있었다. 먹구름 사이에서 천둥이 울리고 벼락이 치는 번개 사이를 비켜갔던 찰나에는,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속에서 죽음의 웅덩이가 어른거리기도 하였었다.

  일상의 대지를 떠나 하늘 길로 접어드는 날에는, 어깨에 얹혀있는 금줄 견장3)은 나를 믿고 여행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지킨다는 중압감으로 가슴은 짓눌려지고는  하였었다. 지난 세월 하늘과 함께한 일만 칠천여 시간,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대지와 대양과 우주의 거울 같은 하늘을 여행하면서, 숱하게 헤쳐 왔던 지뢰밭이 새롭기만 하다.

  억수같이 장대비가 퍼붓는 여름날, 잿빛 먹구름을 뚫고 올라앉은 새하얀 구름 방석 위에서 반짝이던 눈부신 햇살, 눈보라치는 겨울밤 캐노피 유리창에 달라붙은 서리로 시야가 가려진채, 조종석의 계기와 레이더만을 신뢰하며 어렵사리 포착했던, 저 멀리 대지에 앉아있는 두 줄기 불빛의 손가락만한 활주로, 그 얼음판 중심선에 정확히 안착(安着)하던 성취감. 모두가 일정한 방향 없이 종횡무진으로 몰아치는 돌풍에 휘말리는 자세의 중심을 수평으로 잡아주는 극복의 순간들이었다.

  이국(異國)에서 보내는 날에는, 경도의 시차(時差)를 잊으면서 거닐었던 생소한 지구촌의 도시들, 그리고 함께하였던 이방인들, 상드리제 거리의 마로니에 숲 벤치에 앉아있는 다정한 연인들의 모습, 소설 ‘폭풍의 언덕’ 배경인 요크셔 린튼가의 저택, 캐서린과 히스크리프의 비극적인 사랑이 엮어진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섰던 테마의 감격. 등, 수없는 다양한 확인과 감동, 그리고 성취의 희열감이 가슴에 간직된 하늘과의 사연들이다.


  오늘은 유난히도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다. 하늘은 항상 그 자리에서 사계절 대지의 변화와, 노도(怒濤)가 출렁이는 경이로운 대양과, 촌치의 공간도 허용하지 않는 정확한 법칙 속에서 일정 궤도를 공전(公轉)하고 있는 우주를 투영하고 있다.   또한 험난한 먹구름 골짜기의 곡예 항로를 헤쳐 오면서, 여리고 두렵기만 했던 나를 강하게 추슬러 주었고, 어린 시절 뭉게구름 둥실거리는 감성과 사색으로 아스라했던 푸른 꿈을 현실로 이루어주고는 하였다. 위험한 고난의 순간도 있었지만, 뿌듯한 보람을 가져다준 진정한 생활의 일터였었다. 하늘은 언제까지나, 지나온 반생(半生)의 세월을 가슴에 반추(反芻)하여 주는 거울이 되어 오래도록 내 마음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면 하루하루 변해가는 모습으로 씁쓸히 웃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남은시간도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정녕 그렇게 이루어지리라는 바램이다.                                

                                                                                                                     (2011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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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추리; 하늘로 막 비상(飛上)을 시작하려는 새를 비유하여 초보 조종사를 부르는 애칭

2) 보라매; 사냥에 능한 보라색을 띤 매의 일종으로 경륜이 높은 숙련된 조종사를 칭하는 표현

3) 견장(肩章); 제복을 착용하는 직업인의 어깨에 붙여서 직위와 책임을 나타내주는 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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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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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지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6.03 昨年 가을에 某 수필집에 발표한 글입니다. 읽어 보시고 느낌을 솔직히 評해 주세요.
  • 작성자봄봄 | 작성시간 12.06.05 글도 너무 아름답고 사진도 넘 좋슴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요셉 | 작성시간 12.06.07 너무 좋습니다. 선생님의 삶과 인생이 동영상처럼 그려지는 멋진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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