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곡동 성당 - 서울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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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표정한 외관을 뒤로한 하늘로 열린 중정을 만나다.

2008년 12월 7일 우면동 성당에서 아직 남은 가을을 느끼고 온지 20일도 채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겨울이 돼버렸다. 지니는 빙판길을 우려했지만 난 란도가 새 타이어를 달아서 괜찮다는 말로 지니와 방글이를 데리고 우리 부부만의 주말보내기 두번째 장소로 선택한 중곡동 성당으로 향했다. 자세히 둘러보기로 맘먹고 방문한 승효상의 두번째 작품(첫번째 작품은 Dr. Park Gallery)이기도 한 중곡동 성당은 다세대 다가구가 밀집해 있는 중곡제일골목시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노출 콘크리트는 가장 종교적인 재료다. 시공의 완결성과 진지함이라는 부분에서, 노출 콘크리트 공법은 종교적 제의에 비견될 만큼 숙연하다. 그리고 색채다. 콘크리트의 무채색은 무표정하다. 상징과 장식을 걷어낸 중성적 노출콘크리트가 오히려 성당의 주체인 사람을 가장 잘 부각시켜준다."
-Words from 승효상 in interview with vm space 2001.8-
Navigation의 안내를 따라 가다 마지막 우회전을 하는 순간 혼란스런 Context에 우뚝선 노출콘크리트의 중곡동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성당은 5층(연면적 4,265㎡)의 높지 않은 높이임에도 그 무표정한 입면만큼이나 거대하게 느껴졌다. 건물은 남쪽에 특별한 개구부가 보이지 않는 본당 Mass와 북쪽에 사제관 및 기타 사무실들이 배치된 Mass사이에 3층 보다 더 높은, 십자가가 서 있는 3개의 Box로 전면도로와 면해 있었다. 이렇다할 개구부가 없어서 그런지 더 답답해 보이는 성당의 첫인상은 그러나 북쪽 Mass와 남쪽 Mass를 연결하는 몇 개의 Bridge아래를 통과하는 순간 하늘로 열린 중정과 필요 이상으로 넓다고 느껴지는 -필요이상으로 넓기 때문에 더 가치있는- 계단으로 인해 건물의 첫인상은 금방 잊혀진다.


"지역 공동체, 신앙 공동체로서의 중곡동 성당은 도시 내에 있는 성당이다. 순교지를 기리는 기념성당이 아니며 성사를 기념하는 순례자의 성당도 아니다. 말하자면 평범한 도시 성당이며, 따라서 지역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 지역적 종교 공동체이다. 지역의 종교 공동체로서의 건축 공간은 전례를 위한 내부공간인 대성당 외에 분과활동을 위한 대소 교리실을 위시하여 관혼상제나 여러 Event, 혹은 교우 상호간의 교류를 위한 공간 등 다양한 종교 활동을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승효상&이로재, 건축과 환경-
김정신이 설계한 우면동 성당에서도 언급했지만 성당은 일정부분 그 관할구역 신자들의 Community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각 성당마다 그 목적을 담아내는 공간은 모두 다르다. 우면동 성당의 Sunken garden만큼 중곡동 성당의 중정은 그 모습은 무척 다르지만 Community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은 성공적이다. 실제로 내가 방문한 날도 그 곳에서는 신자들이 모여 여러가지 물건을 주고 받고 있었고 심지어 지나가는 걸인도 공공에 개방된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었다.

The Image of Masterpieces is overlaped.

승효상은 김수근의 첫번째 종교건축물인 마산 양덕성당을 건설할때 책임 Designer로 지목된 사람이다. 그는 당시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김수근에게 -세상을 뜨기 전에는 천주교 신자가 됐지만- 신학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성당건축의 통시적인 측면에서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후 김수근이 만든 두번째 종교건축물인 경동교회 설계때도 책임 Designer로 일했다. 이런 배경때문인지 중곡동 성당에서 본당과 사제관을 Bridge로 연결하여 풀어낸 방식은 마산 양덕성당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중곡동 성당을 둘러보면서 내 머릿속에는 마산 양덕성당 보다는 Ando Tadao와 Le Corbusier 작품들의 Image가 먼저 떠올랐다.


"기독교에서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것이 미덕이 아니다. 그리고 마음의 가난은 신앙을 통해 영적인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결핍의 상태를 말한다. 승효상의 기독교 신앙과 관련해 볼때 '빈자의 미학'의 핵심이 되는 말은 침묵이다. 침묵은 논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침묵은 소리와 언어를 통해서 설정될 수 있다는 명제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 Susan Sonta의 말처럼 '침묵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소리나 언어환경을 인정해야 한다.'(-The Aesthetics of Silence, Susan Sontag-) 침묵은 그 자체로는 느낄수도, 알수도 없다. 기독교 교리로 보자면 절대 침묵은 곧 신이다."
-감각의 단면-승효상의 건축, 배형민-
지니와 난 방글이에게 찬바람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해 본당 입구로 들어서지 않고 유아실로 바로 향했다. 그래서 미사가 끝난후 넓은 계단을 통한 정상적인(?) 접근 과정을 다시 느끼기 위해 난 계단으로 내려와 다시 본당으로 올라갔다. 본당의 폭 반정도 넓이의 계단 끝에 세워진 벽에서는 침묵만 흐른다. 본당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이 벽 앞에서 좌측으로 틀어야 한다.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계단을 따라 상승한 시선은 벽으로 막히기 보다는 하늘로 향한다. 오히려 계단과 같은 방향으로 본당 입구가 놓여 있었다면 길에서 건물 내부로 쑥 들어갈 수 있는 상업시설과 무엇이 다를까? 인천 내동 성공회교회만큼이나 중곡동 성당은 벽체로 동선을 흔듦으로서 종교시설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전이공간을 만들고 있다.

계단을 오른후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딱 1층 높이의 본당 입구 Hall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Hall하면 넓은 개방감을 떠올리지만 중곡동 성당 본당 문앞의 Hall은 조금 답답하게 느껴진다. 더불어방금 전까지 느꼈던 하늘로 개방된 중정공간과는 대조된다. 그러나 본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관찰자는 3개층 정도로 트인 직육면체 Box 구석구석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으로 충만된 본당을 정면에서 응시하게 된다(위 사진). 또 다른 열림이자 신자와 방문자가 성당 입구부터 시작돼 'ㄷ'자로 꺾인 동선의 끝이다.
"승효상의 건축세계는 어떠한가? 빛과 어두움, 내부와 외부가 어우러져 있다. 이는 계몽주의 이후 서구 근대화의 기본 틀이 되는 구조다. 빛과 어두움 사이에 어떤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은 스스로 자신의 Identity를 설정해야 하는, 자신의 자리매김을 해야 하는 근대적인 관찰자를 위한 공간이요, 공공의 영역이자 연극의 공간이다. 관찰의 주체와 객체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잠재적인 공공의 영역이다. 빛과 어두움, 표면과 내면, 배우와 관객으로 이루어진 영역, Baroque에서 계몽주의로 이어지면서 형성된 서구적인 전통이다."
-감각의 단면-승효상의 건축, 배형민-
아마도 건축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본당까지 접근하는 이런 꺾인 동선의 흐름은 Ando Tadao의 '빛의 교회' 본당까지 이르는 동선의 흐름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건축가가 이런 의도를 한 배경도 신을 담는 공간이 세상과 너무 바로 접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빛은 신의 또다른 발현이다.

본당으로 들어선 관찰자와 신자는 우선 성당 내부의 북쪽과 남쪽 벽에서 매끈한 노출콘크리트와 재질감이 돋보이는 흰색 마감의 대조적인 모습을 가장 먼저 인식하게 된다. 빛은 남쪽벽과 동쪽 재단 위 천정 그리고 남쪽벽에 사람이 앉았을때의 눈높이에 맞춘듯한 수평창, 재단 남쪽, 북쪽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불규칙적으로 스며든다. 하지만 모든 빛은 직접 스며들기 보다는 Stained glass나 Frosted glass를 통해 은은하게 스며든다.

신을 단박에 표현하는 말은 '변화/변신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이런부분을 통해 보면 '머털도사와 꺽꿀이'라는 만화의 머털도사는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신은 내가 세상 어느 곳에 있든지 교감 할 수 있다는 속성을 지닌다. 우리는 느낄 수 없지만 그래도 이러한 속성에 가장 가까운 것을 상정하고자 택한 것이 '빛'이다.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도 빛이 장엄하다거나 빛의 사소한 연출에 신을 느끼고 눈물을 흘린다. 인간의 탄생이 신에 의한 것임을 믿는 종교에서 특히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만물생성의 과정에 대한 설명은 빛에 대한 경험으로 빗대어졌다.

Richard sennet의 'Flesh and stone'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그를 저에게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라는 이교도 켈수스의 물음에 기독교인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모든 것의 창조자는... 빛이오." 이러한 오리게네스의 주장은 빛은 살(Flesh)이 되기 전 그리고 살(육체)을 떠난 그리스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빛의 Image는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는 문구와 어느정도 통하기도 한다. 위의 책(Flesh and stone)을 좀더 인용해 보자. "빛은 어디에나 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실체 없는 하느님이 어디에나 있음을 의미한다. 신은 어디에나 있고, 보이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 그것은 육체를 벗어나 빛으로 다가서는 것을 의미했다. ... 빛은 어디에나 있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건조물, 건물,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다." 이제 신을 모시는 건물에서 빛은 신의 또다른 발현이다.

종교적 정신성을 보편적으로 담아내야 하는 종교건축물

재단위에는 역시 노출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단상과 미사를 진행하는 사제가 앉는 Simple한 의자가 성당과 일체화되어 있다(아래사진). 하지만 이보다 더 눈에 띄는건 노출콘크리트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Simple한 십자가다. 물론 이 조화의 원형은 Le Corbusier의 'La Tourette수도원'에서 Ando Tadao의 '바람의 교회'로 이어진듯 하지만 그곳에 있는 십자가와는 다르게 이곳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힘없이 걸려있다.

"건축이란 사람이 깃들여 사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절이나 교회 같은 종교건축물에는 사람의 몸과 정신이 의탁해야 하는 곳이다.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지붕과 벽 이상의 정신적인 것이 요청된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가들에게 종교건축은 큰 시험대이다. 종교 행위를 무리없이 담아내야 하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숭고한 종교적 정신성을 건축공간에 팽팽하게 불어넣어야 한다.
이때 건축가가 건축에 불어넣어야 할 종교적 정신성이란 건축가의 개인적 정신세계보다 한층 더 크고, 더 추상적이면서도 많은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종교건축이 힘든 것은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종교적 정신세계를 건축가 개인의 정신세계로 녹여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생각이 풍부한 건축가들은 많지만 개인의 수준을 초월하는 종교적 정신세계를 자신의 정신세계와 연속시킬 수 있는 건축가는 많지 않다. 이건 개성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르꼬르뷔지에 Vs 안도타다오, 최경원-

승효상의 중곡동 성당을 둘러보면서 머릿속에 Ando Tadao나 Le Corbusier의 Image를 떠올리는 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두 건축가의 종교건물은 이미 우리가 숱하게 차용하는 하나의 뻔한 Prototype이 돼버린 Gothic style의 종교건물 처럼 신의 집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Prototype이 되버렸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중곡동 성당에서 내가 봐야할 것은 혼잡한 Context속에서 대지(대지면적 1,806㎡)의 1/3정도를 비워버림으로서 그들에게 열린 성당을 만든 승효상의 언어이고 건물 곳곳에서 느껴지는 '빛'의 조화다.

유아방에서 지니의 모유를 먹고 기분좋아진 방글이는 미사가 끝난뒤 썰물처럼 빠져나간 본당 구석구석을 나와 너무나도 잘 보아줬다. 가끔하는 방글이의 옹알이는 부족하고 지극히 감상적일 내 주저림을 어느정도 이해했다는 대꾸일지도 모른다. 난 방글이에게 본당 곳곳에서 스며드는 빛을 잘 기억해 두라고 말했다. 내 일방적인 바램일수도 있지만 아마도 방글이는 이 공간을 눈으로 기억할 것이고 방글이가 필요할때 표현될 것이라 믿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