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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학파

국역 국조인물고 -남명학파 동강 김우옹(남명외손서)의 비명-퇴계학파 갈암 이현일이 찬하다

작성자범털과개털|작성시간15.02.17|조회수130 목록 댓글 0
원본글 출처 김우옹의 비명()
저자 이현일()
본관 의성()
이명 : 숙부()
: 동강()
시호 : 문정()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19 경재()

동강 선생() 김 문정공(, 김우옹)이 세상을 떠난 지 90여 년이 지나 선생의 5대손 김남수()가, 조정에서 선생에게 정2품 직질의 태재(, 이조 판서) 벼슬을 추증하였고 지금 주상(숙종)이 또 연신()의 건의에 따라 시호를 하사하였으니만큼 규식을 상고하여 비석을 세워 공의 덕을 칭송하여 끝없이 전하고자 한강(, 정구())이 저술한 행장()과 여헌(, 장현광())이 지은 행장의 후서() 및 연보() 등의 글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비명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소경왕(, 선조) 때 위대한 선비와 보필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조정에 서서 임금의 정치를 도와 중흥()을 이룩함으로써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태평을 누리었다. 그러나 우리 문정공처럼 시종 정대한 학문을 지키고 예절에 따라 나아가거나 물러나 탁월한 도덕과 기풍이 백세()의 사표가 된 사람은 몇 명밖에 안 되었다. 매양 그분의 글을 읽고 기풍을 상상할 때마다 시중을 들고 싶은 마음이 진지하게 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사적을 기술하여 이 일을 도운다면 어찌 더불어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돌아보건대, 늦게 태어난 후학()인 처지로 지식과 언론이 고루하여 성덕()을 묘사하여 끝없이 전하는 임무를 책임질 힘이 없었으므로 감히 사양하였다. 그런데 김군()의 요청이 갈수록 더욱더 간곡하여 반복해 마지않으니, 그의 뜻으로 보아 허락을 받아내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을 것 같았으므로 감히 행장과 연보를 살펴보고 그중에서 큰 것만 뽑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선생의 휘()는 우옹()이고 자()는 숙부()이며 관향은 의성()인데, 그의 선대 계통은 신라() 경순왕()에게서 비롯되었다. 고려() 때에 김용비()란 분이 태자 첨사()가 되었고 그 뒤에 김종사()란 분이 비로소 성주()에 살면서 김계손()이란 분을 낳았는데, 이분이 선생의 4대조이다. 증조 김종혁()은 통례원 좌통례()의 증직()을 받았고 할아버지 김치정()은 승정원 좌승지()의 증직을 받았고 아버지 김희삼()은 통정 대부() 삼척 부사(使)로서 자헌 대부() 이조 판서()의 증직을 받았다. 김희삼이 일찍이 진락당() 김취성() 공의 문하에 유학하여 성리()의 요점을 들었고 문과에 급제하여 청현()의 벼슬에 올랐는데, 세상에서 칠봉 선생()으로 일컬었다. 이분이 청주 곽씨()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아 모두 명성이 났는데, 선생은 그중 막내였다. 공이 어려서부터 단아하고 수려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글을 배우자 곧바로 글뜻을 이해하였으며 조금 장성하여 글을 짓자 생각하는 바가 비범하였는데, 1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화려한 명성이 더욱더 드러났다. 가정(, 명 세종()의 연호) 경신년(, 1560년 명종 15년)에 아버지 칠봉 선생의 상()을 당하고 상복()을 벗은 뒤에 상주 김씨()에게 장가들었는데, 바로 남명() 조식() 선생의 외손녀()였다. 선생이 이어 남명의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이미 자신을 위하는 군자()의 학문을 안데다가 이윽고 서울에서 퇴도(退) 이 선생(, 이황())을 알현()하고 의문점을 질문하여 큰 진취가 있었다.

융경(, 명 목종()의 연호) 원년(1567년 명종 2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에 선발되었다. 그 이듬해에 어머니 상을 당하고 상복을 벗자 홍문관 정자()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다가 만력(, 명 신종()의 연호) 원년인 계유년(, 1573년 선조 6년)에 재차 부르자 사양하다 못해 나가서 경연()에 입시()한 기회를 통해 임금이 학문을 닦고 경()을 견지하는 요점에 대해 극구 간하니, 주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그해 겨울에 부수찬()으로 승진되었으나 갑자기 승진되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또 지나치게 올린 품계를 개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네 번이나 상소를 올리자 비로소 윤허하였다. 일찍이 연중()에서 대신()이 면직()해 줄 것을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선생이 나아가 말하기를, “대신은 마땅히 힘이 다하도록 국사에 몸을 바쳐 죽은 뒤에 그만두겠다고 마음을 먹어야지 일신()의 이해만 돌아보고 뒤로 물러나 일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 임무는 인재를 널리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고식적인 것만 힘쓴다면 비록 어진 사람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뜻은 모름지기 원대하게 세워야 하고 정치는 합당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며, 변통할 곳이 있을 경우에는 거리낌없이 경장()해야만 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수긍하고 이어 묻기를, “그대는 조식()에게 수업하였고 또 그대의 공부는 독실하니, 나를 위해 학문하는 순서를 개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선생이 사례의 뜻을 말하고 이어 대답하기를, “학문하는 도리는 다른 것이 없고 방심()을 수렴하면 됩니다. 선유()는 경()을 견지하는 것이 방심을 수렴하는 요점이라고 하였으니, 정말로 엄공()하고 두려워하여 안일에 젖지 않는다면 이 마음이 항상 간직되어 학문이 진취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조용히 산림() 속에 사는 필부()는 미미한 일심()을 쉽게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잠시라도 지나치면 이미 간단()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데, 더구나 임금은 숭고한 부귀 속에 사물이 마음을 흔들어 빼앗는 바가 매우 많으므로 마음을 견고하게 가지고 항상 경외()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마음이 흩어져 수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탐욕에 빠져 외부에 마음을 쓰는 것을 지극한 경계로 삼을 것을 전제하고 말하기를, “덕행을 진취하고 학업을 닦는 것을 마땅히 제때에 해야 합니다. 어찌 그럭저럭 날짜만 보낸 채 말단적인 시문()의 학문에만 종사해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때 주상이 한재로 인해 도움되는 말을 구하자, 선생이 동료들과 연명()으로 수천 마디의 말이나 되는 차자()를 올렸다. 그 내용은 “치도()는 뜻을 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고 어진 이를 임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만, 이는 학문을 강론하여 이치를 밝히는 것이 근본입니다.”라는 것이었는데, 주상이 매우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선생이 경연에 나아가 강론할 때마다 더러 일을 논하여 의리를 개진하되 매우 타당성이 있었고 특히 공경과 방종, 의리와 탐욕의 구분에 신중을 기해 자세히 설명하였으므로 그 말이 흥미가 있었다. 주상이 일찍이 직접 선생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매양 학문에 대해 말하므로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기었다. 나를 위해 잠()을 지어 학문하는 요점을 개진하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선생이 물러가 ‘뜻을 정할 것, 학문을 강론할 것, 몸을 경건히 가질 것, 자신을 극복할 것, 군자를 친근히 할 것, 소인을 멀리할 것’ 등 육잠()을 지어 바치자, 주상이 읽어보고 나서 감탄하고 그 잠을 홍문관()에 하달하였다. 주상이 이처럼 선생을 기대하였고 일시에 선생을 제일의 강관()으로 쳤다. 선생이 일찍이 영부사() 노수신() 공과 같이 경연에서 대기하고 있을 적에 노수신 공이 주상에게 말하기를, “마음은 온갖 조화의 주인이므로 마음이 맑아야만 이치를 궁구할 수 있고 일을 해낼 수 있으니,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은 근본적인 일입니다.”라고 하니, 선생이 곧바로 나아가 말하기를, “마음은 저절로 맑아질 수 없고 반드시 일상 생활 속에서 생각마다 성찰하여 자신을 극복하고 이치를 간직해야만 자연히 맑아집니다.”라고 하였다. 주상이 일찍이 행동할 적에 요란을 많이 초래한 것을 걱정하자, 노수신 공이 또 나아가 말하기를,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마음이 동할 때 기미를 살펴 혼자 있을 때 근신하여 천리()로 하여금 항상 존재하도록 해야만 마음이 맑아질 수 있습니다. 만약 사물과 접하지 않고 마음을 맑게 하려고 한다면 이단()의 학문으로 흘러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만력 2년(1574년 선조 7년) 겨울에 관례에 따라 수찬()으로 승진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성균관 전적()으로 옮기었다. 그 이듬해 여름에 또다시 수찬의 임명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불러서 입시()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그대를 오래도록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사례의 뜻을 표하고 이어 말하기를, “천하의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그만이지만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인재를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두 명의 대신()은 임금과 같이 하늘이 부여한 직책을 같이 맡고 있으므로, 도를 논하여 나라를 경영하고 음양()을 조절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반드시 당시에 제일 가는 인물만이 일세()의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기 때문에, ‘관원을 꼭 채우려고 하지 말고 오직 적임자를 임용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만력 4년(1576년 선조 9년) 봄에 부교리()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좌랑()으로 옮기었고 의정부 검상()으로 전직되었다가 사인()으로 승진되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또다시 수찬이 되어 차자를 올려 안빈1)()의 제사에 대해 논하기를, “후사()로 들어간 사람이 아들이니, 흥녕군()이 이미 영양군(, 안빈의 장자()임)의 후사가 되었으니만큼 마땅히 안빈의 제사를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원군(, 선조의 형임)이 친손자라고 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은 종법()을 중히 여기고 계통을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또 경연에 입시()하여 ‘두려워하고 조심하여야 된다’는 뜻에 대해 극구 개진하면서 조정의 백관()들이 겸손한 태도로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을 걱정하였는데, 전후로 고한 바가 초년에 비해 더욱더 간곡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돌아왔다.

만력 6년(1578년 선조 11년) 봄에 부름을 받고 길에 나섰다가 병환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이해 여름에 또 수찬()으로 불렀으나 그 이듬해 봄에야 비로소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주상이 ≪춘추()≫를 강론하고 있었다. 선생이 글을 강론하다가 아뢰기를, “적신() 이기()가 뚜렷이 임금을 업신여기는 의도가 있어 효릉(, 인종)을 폄하()하였으니, 역모를 품은 것만이 아니므로 마땅히 난적()의 율()로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일 간관()이 처음에 금고()할 것을 요청했다가 곧바로 정계()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의 가산을 몰수하고 처자를 노복으로 삼아도 지나치지 않다고 여기는데, 더구나 금고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왕자()는 하늘을 아버지로 여기고 백성을 자식으로 여깁니다. 자식이 부모에게나 부모가 자식에게나 노여움이 두려워서 아픔을 숨겨서야 되겠습니까? 천지의 만물이 본래 나와 일체()라는 것을 안다면 천재()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고 백성의 고통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른바 ‘가슴속에 가득 찬 것은 모두 측은()한 마음’이므로, 침으로 찔러도 아프고 칼로 베어도 아픈 것은 그 형세상 그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임금으로서 하늘과 사람이 일체인 이치를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민생()의 곤궁과 천재()의 유행으로부터 수령()과 변장()이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을 살찌게만 하고 실질적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뜻이 없는 것’에 대해 극구 논하면서 말하기를, “근원이 맑고 기강이 정립되면 사람이 법을 두려워할 줄 알아 백성을 사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해 여름에 부응교()로 승진되어 강론하다가 아뢰기를, “제왕()의 학문은 마음을 정수()하고 순일하게 가져 중용()의 도를 지키어 격물()ㆍ치지()ㆍ성의()ㆍ정심()하는 데에서 만들어져 나왔기 때문에 표리()가 빛나고 시종()이 여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패도()를 다스리는 자는 이러한 근본이 전혀 없고 지혜와 힘으로만 견지하였으니, 어찌 나태하여 폐지된 데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호당()에 선발되었으나 두 차례 사양하여 윤허를 받았다. 이해 겨울에 차자를 올려 담제() 뒤에 하례를 드리는 잘못에 대해 논하였다.

만력 8년(1580년 선조 13년)에 선위사(使)로 차출되어 인본() 사신 현소()를 영접하고 나서 복명()하자 다시 응교()에 임명하였다. 그때 왜사(使)가 서울로 들어왔는데, 구례()에 여악()을 사용하였다. 선생이 이에 대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공자()가 노()나라에서 정치를 할 적에 제()나라 사람이 여악을 보내자 그 이튿날 공자가 떠났습니다. 우리나라가 법전(殿)에서 여악을 사용하는 것이 조종()의 상법()이 아니고, 더구나 주상께서 엄숙히 정전(殿)에 납시어 먼 곳에서 온 사람을 접견하시는 것이니만큼 더욱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멀리는 공자를 본받고 가까이는 선왕조의 법을 따름으로써 신료들은 높이 쳐다보고 먼 곳의 오랑캐는 교화를 보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해 겨울에 사인()으로 옮기었다.

만력 10년(1582년 선조 15년) 봄에 응교()로 전직되었다가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그때 조정에서 신덕 왕후(, 태조 계비() 강씨())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자고 요청한 자가 있었다. 선생이 ‘제후()는 재취()할 수 없고 계실()의 신주는 사당()에 모실 수 없다’는 뜻으로 예절에 근거하여 상소를 올리자 그 의논이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이윽고 또 정릉(, 신덕 왕후를 지칭)의 의절()에 대해 동료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혐의를 들어 면직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이듬해 여름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되어 학제() 몇 조항을 초안하여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닦고 밝혀 교화를 진작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근본으로 삼았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사간원 대사간()으로 전직되었다. 그때 주상이 바야흐로 문성공() 이이()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이이의 조치가 상당히 대중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삼사()에서 번갈아 상소를 올려 탄핵하다가 주상의 비위를 거슬렸다. 이에 대사간() 송응개(), 도승지 박근원(), 전한() 허봉()이 모두 먼 변방으로 귀양 갔는데, 선생이 극력 그들을 구제하기를, “이들을 축출하고 그를 두둔하되 너무나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정철()이 간계()를 품고 화를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사류()를 모함한 것에 대해 탄핵하면서 근본을 미루어 극구 말하였으나 주상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자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만력 12년(1584년 선조 17년) 여름에 부제학()으로 불렀다. 그때 북쪽 오랑캐(여진족)가 도발하고 가뭄이 재앙을 부렸으나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당파로 나뉘어 서로 공격하느라 나라의 일이나 백성의 고통을 걱정하지 않았으므로, 선생이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그 폐단에 대해 극력 개진하였다. 이해 겨울에 전라 관찰사(使)의 명을 받고 나가 학교와 절의()를 숭상하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았다. 그 이듬해 봄에 돌아와 부제학()에 임명되어 시강원()에 들어가 강론을 끝내고 아뢰기를, “주상께서 ‘존심 양성()’ 네 글자를 써 놓고 신들로 하여금 잠()을 지어 올리라고 하신 것은 매우 성대한 뜻입니다. 다만 ‘존심 양성()’이 본래 두 가지 일이 아닙니다. 성품을 함양하는 방법은 마음을 간직하는 데 있고 마음을 간직하는 요점은 경()에 지나지 않는데, 경을 견지하는 방법은 주자()의 경재잠()에 갖추어져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는데 또 부제학()으로 불렀다. 이를 사양하자 교체하고 곧바로 이조 참판()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승진한 품계를 개정해 달라고 요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만력 14년(1586년 선조 19년) 여름에 형조 참판()으로 전직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안동 부사(使)로 나가 자신을 가다듬어 공직에 헌신하는 한편 백성을 사랑하고 학교를 진작하는 것을 정사의 근본으로 삼았다.

만력 17년(1589년 선조 22년) 겨울에 정여립()이 역모()를 하다가 처형되었고 근거없이 퍼뜨린 말이 있어 서로 끌어들였는데, 이에 선생이 북방 회령()으로 귀양 가게 되었으나 태연히 길에 나서 말이나 얼굴에 조금도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도중에 중봉() 조헌()을 만났는데, 조헌이 말하기를, “숙부(, 김우옹의 자())는 이 지경에 이르러도 후회한 바가 없는가?”라고 하니, 선생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마땅히 후일의 공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배지에 이르러 조그만 집을 찾아 우암()과 성건당()으로 이름을 붙이고 퇴도 선생(退)이 손수 쓴 ‘사무사 무불경 무자기 신기독()’ 열두 자를 벽에다 걸어 놓고 날마다 그 속에서 글을 읽으면서 ≪속강목()≫ 등의 글을 편찬하였다. 그때 조정의 의논이 더욱더 격렬해지자 인심이 뒤숭숭하였다. 어느 날 부사(使)가 급히 고하기를, “금오랑(, 의금부 도사())이 곧 올 것이니, 관청으로 나가 명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니, 선생이 안색을 변하지 않고 차분히 처신하였다. 한참 있다가 금오랑이 과연 도착하여 고을의 관리를 체포해 갔으나 선생이 또한 기쁜 기색이 없었다.

만력 20년(1592년 선조 25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어가()가 서쪽으로 피난갔다. 선생이 사면령()을 받고 곧바로 의주()로 갔으나 길이 막혀 도달하지 못하고 11월에 비로소 행궁()에 도착하여 부호군()의 임명을 받고 왜적을 방어하는 기무에 대한 일곱 가지 일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올리니, 주상이 매우 감탄하고 말하기를, “왜적을 격파하고 회복하는 대책이 모두 그 속에 들어 있다.”고 하였다. 이에 다시 병조 참판()으로서 접반사(使)가 되어 평양()에서 찬획사(使) 원황()을 맞이하였다. 평양에서 돌아와 어가를 호위하고 환도()하여 한성부 좌윤()으로 전직되어 세자()를 모시고 공주()에 머물렀는데, 대사성()으로 옮기었다가 대사헌()으로 전직하였다. 만력 22년(1594년 선조 27년) 여름에 조정으로 돌아와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호남 안찰사(使) 이정암()이 왜적에게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맺고 군사를 물리게 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선생이 불가()하다고 간하였고 또 중흥()의 정무가 빠뜨린 점이 많다고 하여 차자를 올려 ‘개과()에 인색하지 말 것, 사사로운 욕망을 억제하고 백성을 보호할 것, 경연()을 자주 열 것, 대신()에게 일을 위임할 것, 인재를 영입할 것, 장수를 선발하여 군사를 훈련할 것, 감사()와 수령()을 간택할 것’ 등 7개의 조항을 개진하였는데, 주상이 가상히 받아들였다. 그때 의정부()에서 명나라에 진주사(使)를 파견하여 왜적과 화친을 하여 붙잡아 둘 것을 요청하자는 말이 있었으므로, 선생이 또 대의()를 들어 간하고 이어 말하기를, “정철이 길삼봉()의 설을 조작하여 허위로 큰 옥사()를 일으켜 어진 선비들을 죽였으니, 비록 조정(, 중국 북제() 무성제() 때의 신하)이 지은 백승비상천()의 동요나 남곤()이 조작한 주초위왕()의 도참()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엽()이 간신()을 구제하였으니만큼 파직해야 한다고 논하여 윤허를 받았다. 대체로 선생이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일에 따라 모두 다 말하되 이처럼 일시적인 화복()을 보고 피하거나 나가지 않았다. 이어 시무() 팔조()를 개진하였는데, ‘대신()을 선임()할 것, 동궁()을 보양()할 것, 억울한 원한을 씻어줄 것, 왕법()을 바로잡을 것, 인재()를 널리 수합할 것, 유민()을 보호할 것, 군정()을 닦아 밝힐 것’ 등 일곱 가지를 급선무로 삼고 ‘뜻을 세우는 것’으로 그 근본을 삼았다. 대체로 전란()이 일어난 뒤로 전후 건의한 바가 무려 수십, 수백 편이었는데, 모두 임금을 바르게 이끄는 지론이었고 군국()의 중요한 기무였으므로 이를 거행하면 실용에 이를 수 있었으며, 주상도 그의 충성을 믿어 그때마다 격려하고 받아들였다. 그 이듬해 봄에 다시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생이 ‘학봉() 김 문충공(, 김성일())은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다가 죽었다’고 하여 그의 가문을 소급해 보살펴 주어 신하들에게 충의()를 권장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부터 몇 년 사이에 대사헌()에서 부제학()을 두 번 하였고 대사간(), 대사성(), 이조 참판()과 예조 참판()을 한번씩 하였다. 일찍이 ‘서둘러 대신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급박한 전황()을 고하고 주상께서 친히 왜적의 정벌에 나서겠다고 하교하여 충신() 의사()의 기를 진작시킬 것’을 요청하였고, 또 중흥()에 중요한 급선무 여덟 가지 일을 아뢰었는데, 모두 당시에 적중한 것이었다고 한다.

만력 26년(1598년 선조 31년) 봄에 접반사(使)로 안동()에 가 도독() 마귀()를 영접하고 돌아와, 북방의 수령()을 보임할 때 불러다 검열하여 위급시 사용에 대비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비답이 없었다. 이해 겨울에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다. 그때 서애(西) 유 문충공(, 유성룡())이 일시의 소인배들에게 모함을 받아 일이 헤아릴 수 없게 되었으므로 온 조정의 사람들이 혀를 깨물고 감히 말하지 못하였으나, 선생이 항변()의 상소를 올려 그 억울함을 호소하여 주상의 마음을 돌리었다. 그 이듬해 봄에 병환으로 사직하고 인천()으로 돌아갔다가 이윽고 청주()와 충주() 사이로 왕래하며 살면서 누차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만력 30년(1602년 선조 35년) 7월에 역모의 옥사()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나가 주상에게 문안드리려고 하였다. 그런데 도착하기 전에 교정청 당상() 및 동지경연()에 임명하는 명을 받고 대궐에 나가 사은()하고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부제학()에서 대사성()으로 옮기었다.

만력 31년(1603년 선조 36년)에 상소를 올려 고향에 돌아가 뼈를 묻겠다고 요청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경은 벼슬을 그만둘 나이가 아니니, 정말로 직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어찌 물러간다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대호군()으로 이직()되었다. 병환으로 인해 청주로 돌아와 그해 11월 9일에 향년 64세로 우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부음()을 알리자 주상이 매우 애도하고 자헌 대부 이조 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세자 좌빈객()에 추증하고 의절에 따라 예관()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전()을 드렸다. 그 이듬해 2월에 성주() 서쪽 금파곡() 만리() 남향의 자리로 반장()하였는데, 선영의 아래였다.

부인 김씨()는 선생보다 8년 뒤에 세상을 떠나 같은자리에 묻히었다.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 김효가()를 후사로 삼았는데, 강음 현감()이다. 김효가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김욱()은 지평()이고 큰딸은 하산() 성초벽()에게, 둘째 딸은 서하(西) 노형필()에게, 셋째 딸은 사인() 노사영()에게 시집갔다. 지평이 3남을 낳았는데, 큰아들 김정석()은 진사()이고 둘째 아들은 김정혁()이고 셋째 아들 김정익()은 참봉()이다. 진사는 1남 김세신()을 두고 김정혁은 2남 김세빈(), 김세현()을 두고 참봉은 4남 김세선(), 김세일(), 김세운(), 김세적()을 두었다. 김세신은 1남을 두었는데 바로 김남수()로, 지금 유학()을 닦고 있다.

선생이 일찍이 사마온공()이 저술한 ≪계고록()≫의 예에 따라 ≪주자강목()≫을 편찬하다가 미처 완성하지 못하였고 오직 시문 잡저((), 소차 강의() 등 몇 권만 집에 간직되어 있다. 회령() 사람들이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성주() 회연 서원()에서 정 한강(, 정구()) 선생과 같이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는 선생이 정 한강 선생과 한 고장에서 태어나 뜻이 같고 도가 합치되어 서로 지기()로 허여하였는데, 지금 그 행장()과 선생에게 제전을 드릴 때 제문()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아! 한결같이 정도에 뜻을 두어 말씀마다 이치에 합당한 것은 학문이 올바른 것이고, 담담하게 욕심이 없어 마음이 사물에 물들지 않은 것은 수신()이 된 것이고, 선()을 개진하여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임금을 계도한 것은 임금을 바로 이끄는 의리이고, 잘못을 바로잡아 사특을 제거하여 대도()를 떨친 것은 간신()의 직분이고, 시무()를 개진하고 나라의 의절()을 정정한 것은 충성을 다하여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고, 화친()을 배척하고 선류()를 두둔한 것은 의리를 펴면서 용납한 것이다. 그리고 편안할 때나 위험할 때나 지조가 한결같고 나아갈 때나 물러날 때 구차스럽게 하지 않은 것은 또한 평소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 하나만 있어도 정말로 칭송하여 그 이름이 인멸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이것들을 겸유하였으니, 정말로 백대()에 분발하고 천년을 초월했다고 하겠다. 그러기 때문에 그 미덕을 찬술하여 먼 후세에까지 밝히지 않을 수 없지만 또한 어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선비가 학문에 뜻 두어도 도를 깨달은 이 드물도다. 정신과 재능을 모두 다 소모해도 비근()은 모르고 고원()만 알았도다. 허탄하여 상도에 어긋나니 기용되면 실정과 멀었도다. 세인()이 그러한 것을 보고 이내 선비를 헐뜯었도다. 아! 위대한 우리 선생은 일찍부터 정통[]에 접했도다. 말류에서 근원으로 올라가니 진실로 알고 실지로 얻었도다. 이미 정착하고 이미 축적하니 성대하게 화려한 꽃 피웠도다. 선조()의 미덕을 이어받아 왕실의 보필이 되었도다. 옥과 눈 같은 정신을 지니었고 풍상()과 같은 기풍이 있었도다. 20년간 조정에 나와서 지극한 충성을 바쳤도다. 세전()에서 차분히 건의하니 주상이 좋다고 칭찬했도다. 관청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몇 번이나 상소를 올렸는가? 은총이 날마다 흡족하니 군자()가 믿는 바이었도다. 선비를 비방하는 저들이 때를 틈타 앙심을 풀었도다. 공손히 변방으로 귀양 가니 관산()에서 3년간 있었도다. 어가를 뒤쫒아가 모시려고 천리 길 의주로 달려갔도다. 백발이 성성하게 빛났지만 단심()은 갈수록 굳건했도다. 일에 따라서 모두 다 말하니 그때마다 기회에 적중했도다. 전후로 건의한 말씀이 수천 마디나 되었도다. 간사한 신하를 배척하여 억울한 한을 씻게 했도다. 말씀과 의리가 엄정하니 어찌 교태로 뵈였겠는가? 군자들은 정신이 왕성하고 소인들은 기운이 빠졌도다. 창생()의 소망이 집중되니 나라의 안위가 달렸도다. 여느 때 진퇴(退)를 어떻게 하였는가? 기쁘면 나가고 걱정되면 숨었도다. 저 멀리 호서(西)를 바라보니 이 몸이 살 곳을 얻었도다. 생각을 모두 접고 서식하니 세월이 노년에 이르렀도다. 마침내 천수로 끝마치니 순리에 따랐다고 하겠도다. 시종()을 죽 고찰해 보니 정도()의 길을 걸었도다. 세상에 덕 아는 이 드무니 그 누가 조예를 헤아리겠나? 묘소에다 비명을 새기어 후세 사람을 깨우치도다.

각주

  • 1) 안빈(安嬪) : 창빈(昌嬪) 안씨(安氏)로, 선조(宣祖)의 생부(生父)인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은 그의 차자(次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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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 김우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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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역 국조인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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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김우옹 [金宇顒]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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