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잘 지운 날
김소연
바람 불고
창문 열려 있고
그게 전부다
이런 오후가 나에게 조금 더 많았더라면
아빠다리를 하고 의자에 앉아 가려운 발바닥을 긁는
내 오른손을 톡톡 치는
땡볕이
내 옆에 앉아 있다
빨래가 마르면
빨래를 개야지
내가 펼친 공책의 빈 페이지를
야구공이 가로질러 날아간다
외야수는 팔을 길게 뻗어 마침내 그 공을 글러브 속에 담는다
나는 공책을 덮는다
끝낼까
지금 끝내고
호숫가 옛날통닭집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챙모자를 쓰고 커다란 맥주잔을 들고
건배를 외칠까
거긴 비가 온다는데 여긴 아무렇지 않다
여기는 거기와 그다지 멀지 않다
이상하구나
벗어나는
기쁨
내가 하지 않았던 일들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었던 일들이라는 게
정말로 그렇다는 게
나의 얼마 안 되는 비밀을 불시에 덮칠 생각은 하지 말기를, 나의 편지를 찾더라도 읽지 말기를, 내 사진들이 보이더라도 쳐다보지 말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닫힌 것을 열지 말기를 그들에게 간청한다. 진정한 애정에서 나오는 무지와 자발성을 발휘하여 그들이 무엇을 폐기하는지 모른 채로 모든 것을 폐기하기를 간청한다.*
따가운
거짓말을 이끌고
느릿느릿 밤이 찾아온다
공책을 다시 펼친다
야구공이 발아래로 후드득
쏟아진다 구석구석 굴러간다
야구공을 주우러 다니고
빨래를 개고
나는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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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스 블랑쇼 『죽음의 선고』(고재정 옮김, 그린비 2011)에서.
⸺계간 《창작과비평》 2019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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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