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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폐쇄병동 (외 2편)/ 승한

작성자오두막|작성시간21.08.25|조회수18 목록 댓글 0


173 폐쇄병동 (외 2편)

⸻달

승한


밤하늘에 해골이 떠 있다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나의 해골이 떠 있다



원효(元曉)도 아닌데

나는 저 해골바가지에

무슨 물을 담아 마실까



무슨 물을 담아 마셔야

감로수가

될까



좌선의 시간

무념의 시간

무상의 시간



강화유리창 밖으로

대오(大悟)가 떠가고 있다



차다




173 폐쇄병동

⸺사라진 우물


볼우물이 참 예뻤지

끊임없이 분절음을 내뱉다가도

홍시 먹은 듯

웃을 때면

오른쪽 뺨에 고이는 볼우물이

참 예뻤지



그 볼우물 속에 두레박이 있었지

어릴 적, 그 두레박으로

공동우물에서 나는 달을 길어 먹었지

너를 길어 올렸지



헤어 보니 그믐달



어느 날



알 틈도 없이 사라져버린 우물,



새 샘물이 잘 솟으면 좋겠네



새 달도 잘 잠기면 좋겠네





173 폐쇄병동

⸻쥐에게 옆구리를 뜯어 먹힌 암탉에 대하여


어릴 적, 돼지막에 구정물 주러 갔다 돼지막 대나무 시렁 위에 서서 잠든 암탉의 옆구리를 쥐가 뜯어 먹는 것을 보았다 암탉은 제 옆구리가 뜯어 먹히는 줄도 모르고 옆구리가 다 뜯어 먹혀 창자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도 모르고 직립으로 잠만 자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암탉은 옆구리로 흘러나온 창자를 질질 끌며 마당에서 먹이를 주워 먹으러 다녔다 그러다 오후에 죽었다



생이란 그런 게 아닌가



쌀알 같은 알약 몇 알을 먹고 혼곤히 잠든 밤이면, 나도 누가 나의 옆구리를 뜯어 먹는 것 같다 옆구리 밖으로 창자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



다음 날 오후까지 나는 살아 있을까 아니면, 아니면, 옆구리 밖으로 흘러나온 창자를 질질 끌며 폐쇄병동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죽을까, 죽을까



어릴 적, 돼지막 대나무 시렁 위에 직립으로 서서 잠을 자다 쥐에게 옆구리를 뜯어 먹히던 암탉, 창자가 흘러나오도록 꼼짝 않고 잠만 자던 암탉



오늘 밤은 나도 암탉이다 쥐에게 옆구리를 뜯어 먹히던 암탉이다



강화유리창 밖으로 닭대가리 같은 달이 뜬다



크다



환하다





173 폐쇄병동

⸺목련


둘둘 말아 올린

저 흰 머리카락들을



부처님의 나발(螺髮)이라고 해도 좋겠다

깨달음을 기다리는 적멸이라고 해도 좋겠다



수좌(首座) 생활 3개월



내 머리카락에도 나발이 부쩍 늘었다




⸻시집 『그리운 173』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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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한 / 이진영. 중앙대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동양철학) 수료.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狩獵圖, 혹은 겨울나기」 당선,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햇빛 박물관」 당선. 시집 『수렵도』 『퍽 환한 하늘』 『아무도 너의 깊이를 모른다』 등과 산문집 『나를 치유하는 산사기행』 『스님의 자녀수업』 『네 마음을 들어줘』 『좋아 좋아』 등. 현재 〈한국불교신문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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