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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은 서비스가 아닌 권리: 호주에서 시작된 노인 돌봄의 구조적 재편

작성자이은희|작성시간26.06.20|조회수22 목록 댓글 0

호주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단순한 제도 개편이 아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에 가깝다. 돌봄이란 무엇인가. 오랫동안 돌봄은 ‘서비스’로 이해되어 왔다. 필요할 때 제공되고, 일정한 기준에 따라 배분되는 것. 그러나 호주는 이 전제를 다시 쓰고 있다. ‘돌봄은 더 이상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노인돌봄법 2024(Aged Care Act 2024)가 있다. 2024년 11월 연방의회를 통과하고 2025년 11월 전면 시행된 이 법은, 수십 년 만의 가장 근본적인 개편으로 평가된다.

이미 있었던 시스템, 그러나 충분하지 않았던 이유

겉으로 보면 호주는 이미 잘 갖춰진 고령 돌봄 체계를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연방 가정지원 프로그램(Common wealth Home Support Programme, CHSP)과 재가 돌봄 패키지(Home Care Packages, HCP)다. CHSP는 비교적 낮은 수준의 지원을 통해 일상생활 유지를 돕고, HCP는 보다 복합적인 돌봄이 필요한 경우 개인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는 구조였다. 이 두 프로그램은 ‘가능한 한 오래, 집에서 살게 한다’는 하나의 방향, 이른바 지역사회에서의 노후 유지(Ageing in Place)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다시 바꾸는가. 답은 간단하다. '제도는 갖춰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충분히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진행된 왕립위원회(royal Com mission into Aged Care Quality and Safety)는 기존 체계의 구조적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된 문제는 서비스의 부재가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처음 어디에 연락해야 하는지 알기 어려웠고, 평가는 반복됐으며, 기관과 기관 사이에서 정보는 단절됐다. 이용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좁았고, 같은 서비스라도 제공기관에 따라 품질 차이가 컸다. 제도가 설계한 경로와 이용자가 실제로 경험하는 경로는 달랐다. 시스템은 있었지만, 실제 이용 과정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호주는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핵심 전환: ‘시스템’이 아니라 ‘경험’을 설계한다

노인돌봄법 2024가 제시하는 변화는 분명하다. 돌봄 시스템을 ‘프로그램의 집합’에서 ‘하나의 연속된 경험’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주요 변화는 다음과 같다.

1. 권리의 제도화: Statement of Rights

이번 개편에서 가장 강하게 강조되는 것은 ‘Your rights matter(이용자의 권리는 중요하다)’라는 메시지다. 노인돌봄법 2024는 정부 지원 고령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권리 기반 체계를 도입하고, 서비스 제공기관이 이를 준수할 법적 의무를 명확히 했다.

권리 선언에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유지할 권리, 사생활과 존엄을 존중받을 권리, 안전하고 질 높은 돌봄을 받을 권리,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받을 권리, 불이익 없이 문제를 제기할 권리,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지원받을 권리가 포함된다.

중요한 점은, 이 권리가 더 이상 선언이 아니라 제도 설계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노인돌봄 품질 및 안전 위원회(Aged Care Quality and Safety Commission)는 제공기관의 의무 이행 여부를 감독하고 민원을 처리한다.

2. 진입 구조의 단순화: Support at Home

재가 지원 통합 프로그램(Support at Home)은 기존 제도를 통합해 단일한 진입 구조를 만든다. 평가 체계가 일원화되고, 이용자는 제공기관을 직접 선택하고 변경할 수 있으며, 가격도 공개된다.

이 변화는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차이를 만든다. 이제 시스템이 이용자를 이해해야 한다. 제도가 설계한 경로와 이용자가 실제로 경험하는 과정 사이의 간극을 줄이려는 시도다. 다만 이러한 단순화가 모든 이용자에게 동일하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평가와 개인 예산을 중심으로 한 구조는 언어 장벽이나 문화적 낙인을 경험하는 고령자, 특히 문화·언어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집단에게는 접근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 맥락에서 기존 CHSP의 역할은 다시 주목된다. 낮은 진입 장벽과 지역사회 기반 활동은 신체 활동 유지, 인지 자극, 정서적 안정이라는 건강 보호 효과를 함께 제공해 왔다. 통합이 항상 접근성 개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3. 품질 기준의 재정의: Strengthened Quality Standards

기존에는 서비스가 제공되었는지 여부가 중심이었다. 이제는 ‘안전했는가’, ‘존중받았는가’, ‘적절했는가’라는 결과 중심의 질문이 기준이 된다. 강화된 노인돌봄 품질 기준(Strengthened Aged Care Quality Standards)은 2025년 11월 1일 노인돌봄법 2024 시행과 함께 도입됐다.

주요 강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용자가 돌봄 계획의 수립과 관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보장하고, 모든 돌봄이 권리 선언(Statement of rights)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제공되도록 했다. 또한 문화적 안전성(Culturally Safe Care)과 트라우마 인지 접근법을 강화했으며,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규제 역시 한층 강화됐다.

이와 함께 내부 고발자 보호도 강화됐다. 노인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 대리인, 종사자 모두가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다.

4. 선택권과 투명성: 이용자가 주도하는 돌봄

이번 변화는 이용자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이용자는 이제 제공자를 선택하고, 정보를 확인하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다. 특히 ‘등록 지지자(registered Supporter)’ 제도는 의사결정 능력이 저하된 노인을 위한 새로운 법적 틀을 도입한 것이다. 본인이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경우, 복수의 지지자를 등록해 돌봄 관련 의사결정 과정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돌봄을 ‘받는 것’에서 ‘참여하는 것’으로, 이 변화가 이번 개편의 본질이다

5. 인력: 가장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답

모든 변화의 끝에는 사람이 있다. 호주 정부는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돌봄을 수행하는 종사자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하는 한편 교육 강화와 근무 환경 개선, 내부 고발자 보호를 법적으로 명시했다.

노인돌봄법 2024는 또한 행동 강령(Code of Conduct)을 도입해 제공기관과 종사자 모두에게 명확한 행동 기준을 부과한다. 이는 단순한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법적 의무의 영역으로 시스템은 사람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누가 이 돌봄을 실제로 수행할 것인가.’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제도 너머: 예산이 드러낸 과제

2026년 4월, 호주 정부는 약 30억 호주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를 발표했다. 이는 제도 시행 이후 드러난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후속 조치로, 제도가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반영한 정책적 대응이다.

연간 5000개 규모의 신규 요양시설 병상 공급을 지원하고, 샤워·착의·배변 지원 등 개인 돌봄 서비스를 임상 돌봄으로 재분류해 이용자 자기부담금을 전면 폐지하며, 치매 전문 케어 유닛을 추가로 신설하고 병원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특히 개인 돌봄 서비스의 본인부담금 폐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제도 시행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 즉 기본적인 돌봄조차 개인의 재정형편에 따라 선택해야 했던 상황에 대한 정책적 대응이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샤워와 식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사례가 언급되며 제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드러난 바 있다.

이 사례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여준다. 권리 기반 시스템은 법 제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재정과 현장 대응이 함께 작동해야 비로소 실질화된다.

결론: 지금 호주는 다시 정의하고 있다

호주는 이미 일정한 수준의 돌봄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시스템을 다시 정의하고 있다. 변화의 속도는 급진적이지 않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돌봄은 더 이상 서비스가 아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한 권리다.’

이 권리가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전반의 재설계가 필요하다. 노인돌봄법 2024가 던지는 메시지도 여기에 있다. 돌봄의 기준은 제공자가 아니라 이용자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원칙이 제도 전반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법이 틀을 만들고, 현장이 문제를 드러내며, 예산이 이를 보완하는 과정 속에서 개혁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제도가 아니라 실제 삶의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출처 : 복지타임즈(http://www.bokji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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