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 죽기를 원한 사람들을 보며
한가지 숙제가 생겼다.
115p에 전태일 청년이 동부교회의 야학에서 공부를 했다고 김성재교수의 증언을 참조로 실었다.
슬쩍 스치는 기록이 아닌데
중요한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동부교회의 60년사를 봤다.
야학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없다.
비슷한 흔적이 있다.
한양대 공대 교수가 청년회와 청소년부를 활성화 시킨 내용이 있다.
확인좀 해달라고 원로 장로님께 부탁드렸다.
분석으로 먹고살던 촉이 발동했다.
동부교회에서 분리된 새밭교회의 역사를 살펴봤다.
새밭교회는 60년대 말쯤에 야학을 설치한 모습도 보이고 부목회자의 성품?이 가능성이 있다.
확인을 부탁드렸다.
무학(국민학교중퇴)인 전태일에게 야학은 지식의 장였으리라.
전태일의 분신을 통해 민중을 보기시작한 민중신학..
그 생각의 뿌리를 찾아온다는 것은 의미가 큰데 다른 기록을 찾지못했다.
사고가 발생하면
이론적으로 설명이 불분명하지만 현상이 있으니 이론이 왜곡된 이유를 찾아 상황적 변수의 함수를 적용해서 이론과 합치되는 것으로 재발을 방지하는 공학적 사고가 발동한다.
ㅡ 출근길 전철속의 멍때림 ㅡ
덧
하루 전 오청환장로님 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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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렬
김성재교수께서 말씀은 하셨는데 좀체 납득이 안되는군요. 지금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내용입니다. 근거가 무엇일까요?
1967~70년 당시 강남과 강북을 잇는 대중교통이 거의 없었을 때 아닐까요? 1회적 방문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또한 동부교회에서 누구를 상대로 야학을 했을까요? 동부교회 부근에 공장이 많았을까요? 나중에 현재 터로 이전을 했었나요?
무엇보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공부할 때 대학생 친구가 없어서 한탄을 했었지요. 야학에 다녔다면 교사와 상의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여러 요소를 감안하면 좀 이해가 안갑니다.
오청환
동부가 그 당시는 신당동에 있었고 새밭도 신당동
한양대 교수분은 이모부였어요.
박승렬
아 그렇군요. 그러면 가능성은 있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야학이 아니라 공민학교 아닐까요? 청옥공민학교를 다녔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오청환
파악해 볼 필요가 있어요.
박승렬
청옥공민학교는 대구에 있네요. ㅠ
제가 역사에 관심이 많다보니...
말이 길어졌습니다. ㅋㅋ
오청환
제 관점에서는 민중신학에서 전태일에 대한 심층적 팍악후 민중을 봐야 하지 않나 해서요.
박승렬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준 충격으로 민중신학이 태동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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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쟁을 다 본 후
일부러 지켜보진 않았다.
방금 페북을 보니 논쟁(?)이 있었다.
논쟁이 너무나 아름답기만하다.
조선유학사에서 걸출한
퇴계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을
보는 듯한 느낌이 스쳐갔다.
퇴계의 나이 53세정도
기대승은 30대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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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선조의 부름을 받아
성리학을 간단하게 열가지로 정리해
도표로도 만들어 선조에게 줬다.
기대승은 새발의 피였다.
그럼에도
퇴계는 기대승의 편지에
정성을 담아 답을 했다.
이 편지가 남아 사단칠정론의
뒷 얘기로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음은
조선인의 위대함이라 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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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속의 멍때림
나에겐 멍때림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시대변화의 촉으로 보인다.
오와 박의 페북 댓글
이걸보며 난 퇴계와 기대승의
사단칠정론쟁을 본다.
여전히 사칠이기논쟁은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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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댓글도 아래에 편집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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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래 ------
출근길 지하철에서의 멍때림!!!
멍때림이 아닌 혁명으로 기록될 듯 합니다.
이 글을 제대로 읽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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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님의 학구열
감정이 아닌 객관성을 찾으려는 애씀
이를 기반으로 한 냉철한 행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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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의 얘기들을
넓은 귀로 다 들으며
통섭해나가며
진지한 실존의 물음으로
행동으로 답을 찾아가시는
장로님의 모습에 그저 감사하고
도전이 됩니다.
저도
장로님의
이 열정과 진실함과
성실함의 행동을 따라가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