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설교의 길: 바르고 힘센 설교를 향하여 채 경 락: chrace@hanmail.net
서언: 말과 청중
1. 설교는 말이다
설교는 글이 아니라 말이다. 글이 되는 말과 말이 되는 말은 다르다. 글로 썼을 때 이어지는 말과 말로 뱉었을 때 이어지는 말이 다르다. 설교는 말의 규칙을 좇아야 한다. 강조를 하는 방법도 말과 글이 다르다. 글이 굵은 글씨나 밑줄로써 강조 부분을 표시한다면, 말은 큰 목소리 혹은 반복, 심지어 작은 목소리로 강조한다. 설교가 말이라면 설교를 준비할 때에도 종이 위에 쓰면서 준비하기도 하지만, 더불어 말에 담아보는 과정이 결정적이다.
2. 들린 만큼 설교다
설교는 설교자의 입이 아니라 청중의 귀가 결정한다. 설교자의 성경해석은 설교의 중요한 자원이 되지만 그 자체로는 설교가 아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설교자가 받은 감동도 설교가 아니며, 설교문도 그 자체로는 설교가 아니다. 심지어 설교자의 말도 설교가 아니다. 청중의 귀에 들린 만큼, 꼭 그만큼 설교다. 따라서 설교자는 “내가 무엇을 말할 것인가?”와 더불어 “청중이 어떻게 듣는가?”를 고심해야 한다.
강해 설교의 길
1. “강해 설교”는 구체적 방법론이 아니라 설교 철학이다
강해 설교에 대한 정의가 구구하다. 혹자는 성경을 권별로 연속적으로 풀이하는 것을 강해 설교라고 하고, 혹자는 주석중심의 설교를 강해 설교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내러티브 설교에 반대하여 명제 형태의 대지를 나열하는 것을 강해 설교라고도 한다.
그러나 강해 설교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아니라 설교 철학이다. 구체적인 방법론 위에 있는 상위 개념이다. 본문 연속 강해의 방법론을 취하지만, 강해 설교인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다. 내러티브 방법을 동원하는 강해 설교가 있는가 하면 내러티브 형태를 취하되 강해 설교가 아닌 것이 있다. 다시 말해 강해 설교는 구체적인 방법론보다 훨씬 포괄적인 설교의 정의이다. 강해 설교는, 구체적 방법론이 아니라, 설교를 향한 설교자의 태도 혹은 결심을 지시한다.
2. 강해 설교를 구성하는 세 가지 원리
강해 설교를 구성하는 세 가지 원리로, 필자는 다음 세 가지를 지목한다. 성경: 성경의 권위, 강해: 저자의 의미/의도, 그리고 설교: 변화를 향한 설득.
풀이하면, 첫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메시지의 출처 혹은 뿌리를 오직 성경에 둘 것. 둘째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에는 저자의 의미 혹은 의도를 추구할 것. 마지막 셋째로, 청중을 설득하여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설교의 목적으로 삼을 것. 이 세 가지가 충족될 때 필자는, 그 설교가 취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강해 설교라 부르고자 한다. 다시 말해 구체적인 방법론에 있어서는 강해 설교는 풍성한 자유를 누린다. 삼대지 강해 설교가 가능하고, 내러티브 강해 설교도 가능하다.
하여 필자는 “강해 설교”를 보다 정확한 의미를 표기하기 위해 “성경 강해 설교”라고 부르고 각 단어에 강해 설교의 원리를 담기를 원한다. 그러나 편의상 본 글에서는 전통적인 이름인 “강해 설교”를 사용하되, 의미상으로는 “성경 강해 설교”로 읽도록 하겠다.
제1원리: 성경 - 성경의 권위
제1원리인 “성경 - 성경의 권위”의 원리는 구체적으로 다음에 소개된 세부 사항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성경에서 시작하라
강해 설교는 “딤후 3:16”의 설교학적 실천이다. 강해 설교는 성경을, 오직 성경을 설교하는데, 그것은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 책들은 성경 외에도 많이 있다. “이솝 우화”가 그러하고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도 삶을 관조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많이 던져준다. 그러나 강해 설교자는, 다시 말해 강해 설교를 실천하고자 하는 설교자는 설교 메시지의 출처를 오직 성경에 둔다. 오직 성경에서 시작한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최근의 필립 얀시의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경건 서적 역시 귀중한 메시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강해 설교자는 오직 성경에서 메시지를 얻고자 한다.
원리적으로는 성경을 설교하려 하지만, 실제로 낳은 메시지가 사실상 성경 외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강해 설교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다. 실수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강해 설교자는 최선을 다해 이러한 실수를 배제하고, 오직 성경을 설교하고자 한다. 그 결심이 강해 설교자의 첫 번째 징표이다.
2. 주소가 있는 메시지
강해 설교는 “주소가 있는 메시지”를 추구한다. “포괄적 성경”보다는 “구체적으로 누가복음 19장 1-10절”에 기초한 설교를 추구한다. 포괄성이 설교자 개인의 임의적 메시지 주입의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강해 설교는 성경 봉독을 중시한다. 설교 전에 성경이 봉독되는 것은 곧 그 날의 설교를 그 본문에 제한하는 표시이다. 설교 본문은 설교자가 선택하지만, 일단 본문이 선택되면 본문이 설교자를 제어한다. 봉독된 성경 단락 전부를 설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강해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라면, 적어도 설교의 메시지가 그 봉독된 성경 본문에 철저하게 기초하도록 힘쓴다.
3. 권위적 선포
a. 권위 있는 선포
강해 설교는 권위 있는 선포를 추구한다. 권위 있는 선포는 설교자의 고압적인 태도와는 구별된다. 강해 설교는 메시지에 대한 확신에 기초한 권위 있는 선포를 추구한다.
b. 파생적 권위
강해 설교의 권위는 성경의 권위에서 파생된 파생적 권위이다. 설교자의 개인적인 권위가 아니라, “성경에 기초한 메시지”이기에 주어지는 권위이다. 정확한 해석학적인 공정을 거쳐서 생산된 메시지라면, 그래서 그 설교가 성경적 메시지를 선포한다면, 이 선포는 당연히 권위 있게 선포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그분의 인격 자체가 권위의 출처였다(마태복음 7:29). 이에 반해 설교자는 예수님이 누린 권위를 누리지 못하며, 혹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거짓된 사칭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포한다면, 이 선포에는 당연지사로 권위가 담겨 있어야 한다. 비록 파생적 권위이지만, 설교의 권위는 강해 설교의 근본적 요소다.
c. 탈권위적 설교학의 거부
근자에 탈권위적 설교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프레드 크레독의 “As One Without Authority”(권위 없는 자로서)라는 책 제목이 시사하듯이, 일종의 설교의 민주화를 추구한다.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정치적인 의미의 평등과 민주화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성경의 정확한 해석에 기초한 설교를 선포하는 설교자는 청중과 평등할 자유(!)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선포한다면, 권위 있는 선포는 설교자의 의무조항이며, 이 의무를 수용하는 자가 강해 설교자다.
강해 설교는 대화체 설교를 가능한 방법론으로 수용하지만, 설교학적 민주화를 지향하는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대화로서의 설교는 거부한다. 강해 설교는 내러티브 설교를 강해 설교의 한 방편으로 수용하지만, 메시지의 비결성정을 확보하고자 명제를 지양하고 내러티브를 지향하는 시도는 거부한다. 강해 설교는 설교 메시지가 청중의 상황에 적응되어야 한다고 믿지만, 청중이 메시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소위 “독자반응비평의 설교적 전용”을 거부한다.
제2원리: 강해 - 저자의 의도/의미
제2원리인 “강해 - 저자의 의도/의미”의 원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몇 가지 실제적인 원칙을 제언하고자 한다.
1. 독자(설교자)가 아니라 저자의 의도/의미
강해 설교는 저자의 의도 혹은 의미를 텍스트 해석의 목표로 삼는다. 다시 말해, 텍스트의 자율적 의미가 아니라 저자가 텍스트를 통해서 전하려고 한 의미를 추구하며, 독자가 임의적으로 뽑아낸 의미가 아니라 저자가 텍스트에 담아 놓은 메시지를 뽑아내는 것을 해석의 목표로 삼는다.
현대 해석학은 의미의 결정자로 저자를 지목하였던 전통적 해석학을 한동안 떠나 있었다. 현실적으로 한 텍스트에서 다양한 해석이 쏟아져 나왔고, 이 다양성 사이에 하나의 의미를 결정해 줄 저자는 이미 죽었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저자의 죽음 앞에 의미 결정자로 독자가 지목되었고, 독자반응비평이 세력을 얻어, 성경 해석의 장에까지 끼어들었다. 헐쉬와 벤후저 등의 현대 해석학자들의 노력으로 텍스트 의미의 결정자로 저자의 권리가 복권되고 있는데, 강해 설교자는 이를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강해 설교자는 텍스트를 통한 저자의 의도 혹은 의미에 접근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주신 언어는 저자와 독자 사이에 소통의 다리로서 충분한 기능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한 텍스트에서 약간의 편차는 있을 수 있지만, 저자의 주된 의도 혹은 의미를 오해할 만큼 그 편차가 크지는 않다는 게 강해 설교자의 판단이다. 예를 들어, 복음서 본문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신앙에는 이견이 전혀 없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 신앙이 복음서 메시지의 중심이다.
강해 설교자는 텍스트에 담긴 정보와 저자의 의미를 구분한다. 예를 들어 복음서를 통해 당시의 주요 음식과 주거 환경, 혹은 음식 먹는 자세 등의 고고학적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이것은 저자가 전하려고 한 의미가 아니다. 강해 설교는 저자가 텍스트에 담으려고 한 의미를 추적하여 설교 메시지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한다.
2.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라 누가의 의도
강해 설교는 등장인물의 의도가 아니라 저자의 의도를 추적하여 메시지의 중심으로 삼는다. 누가복음 19장 1-10절에서 설교자는 예수님과 삭개오의 대화를 접한다. 이 때 예수님의 의도를 추적하지 않고, 저자의 의도를 추적하는 것이 강해 설교의 해석적 원리를 구성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본문에서 등장인물이고, 저자는 예수님과 삭개오의 대화를 소개하는 누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의 의도와 누가가 소개하는 예수님의 의도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해석자로서 둘 사이에 해석의 초점을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누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러티브 본문에 기초한 설교에서 설교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세 가지 차원의 대화가 있다. 삭개오 사건을 예로 들면, 첫째 예수님과 삭개오 사이의 대화, 둘째 누가와 데오빌로 사이의 대화, 그리고 셋째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대화이다. 그리고 해석의 초점은 두 번째 누가와 데오빌로 사이의 대화에 맞추어져야 한다.
텍스트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예수님과 삭개오가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이 둘의 만남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이 따로 있으니, 바로 누가와 데오빌로이다. 누가복음 서두에 밝히듯이 데오빌로는 저자 누가가 누가복음이라는 텍스트를 사용해서 메시지를 전할 때 그 일차적인 독자의 이름이다. 예수님과 삭개오 사이의 대화를 가지고 누가와 데오빌로가 만나고 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가와 데오빌로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를 기초로 설교자는 청중을 만나며, 그것이 설교이다. 이 설교가 강해 설교가 되고자 한다면, 설교 메시지의 기초는 저자인 누가가 원독자인 데오빌로를 향하여 전하고자 한 저자의 의미가 되어야 한다.
삭개오가 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는지를 묻기보다, 강해 설교를 추구한다면, 누가는 왜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일을 소개하는지를 물으라. 이 답이 본문을 기초로 한 설교 메시지를 결정할 것이다. 예수님이 왜 삭개오의 집을 방문하셨는지를 묻기보다, 저자의 의미를 설교하는 강해 설교를 추구한다면, 누가는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을 방문하신 일을 왜 데오빌로에게 소개하는지를 추적하라. 이 답이 강해 설교자로서 내가 왜 누가복음 19장 1-10절을 설교하는지, 그리고 무슨 메시지를 설교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3. 인간 저자 vs. 신적 저자
강해 설교가 성경 해석의 닻으로 삼아야 할 “저자”는 인간 저자와 더불어 신적 저자를 아우른다. “사람의 손”으로 써졌지만,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 저자와 신적 저자의 의미 혹은 의도는 양자택일의 대립적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 강해 설교의 기본 확신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개별 설교에 있어서 무게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관하여 설교자의 적절한 결심이 요구된다.
구약 본문을 설교할 때 신약의 눈으로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구약 본문의 자율성을 최대한 살릴지에 관하여 강해 설교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신약의 눈으로 구약을 해석함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구약 자체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학자도 있다. 신약의 눈으로 구약을 해석해야 한다는 그룹 내에서도 약간의 강조점의 차이가 발견된다. 모형론에 기초하여 구약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내는 데 주력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보다 포괄적으로 구약에서 신약적 구원 원리를 찾아내어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서술어 중심의 구속사적 해석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명령어 중심의 모범제시형 해석을 추구하는 이들도 있다. 이 세 쌍은 각각 양자택일의 사안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설교자가 적절하게 택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다.
4. 이해를 넘어 해석으로: 슈타인 (R. Stein)의 구분
이해(understanding)와 해석(interpretation)을 구분하되, 강해 설교자는 이해를 넘어서 해석을 추구해야 한다. “이해”는 저자의 의도를 설교자가 염두로 이해함을 의미한다. 성경 한 단락을 앞에 두고 설교자가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면, 일단 그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눈물 혹은 끄덕이는 고개는 이해의 좋은 표시가 된다. 반면에, “해석”은 저자의 의도를 설교자가 언어로 표현함을 의미한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누군가가 물을 때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해석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설교자는 전달자(communicator)이며, 설교는 전달이다. 다시 말해, 설교자의 성경 읽기는 자기에게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로 소통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소통의 도구는 언어이기에, 설교자의 염두 이해는 반드시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해를 넘어 해석되어야 한다. 언어화되지 않은 감동은, 즉 해석에 이르지 못한 이해는 마치 제대로 다듬지 않은 돌과 같아서 설교라는 집을 지을 수가 없다. 개인 묵상을 위해서라면 이해도 의미가 있지만, 설교를 위한 본문 연구를 지향한다면 반드시 이해를 넘어 언어화된 해석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5. 해석을 넘어 적용(application)으로
해석이 설교에 필수적이지만, 해석은 설교자가 본문 앞에서 얻어야 할 최종적인 결실은 아니다. “강해 설교”의 “강해”는 해석에서 끝나지 않고 적용을 추구한다. 강해 설교에서 해석과 적용의 구분이 뚜렷할 필요도 없고 단계를 구분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해석은 강해 설교자에게 적용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징검다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해석이 원독자를 겨냥한다면, 적용은 현청중을 겨냥한다. 누가복음의 경우 설교가 데오빌로를 위한 것이라면 해석에 머물러도 좋다. 그러나 설교가 이번 주일 대면할 청중을 위한 것이라면 반드시 적용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적용은 행동화, 번역, 접촉점, 그리고 선택이다.
개념인 원리를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때 그 원리가 적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것이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적용의 정의다. 그러나 적용은 원리의 행동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천 년 전 원독자를 위해 기록된 성경을 오늘날의 언어와 표현으로 번역할 때, 그 번역 자체를 적용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해석이 원독자를 겨냥한다면, 적용은 현청중을 겨냥한다”는 적용의 보다 포괄적인 정의에 기초한다.
설교 현장에서 적용은 접촉점으로서 기능한다. 적용을 통해 성경 본문이 청중과 만난다는 점에서 적용은 청중과의 접촉점이다. 설교는 청중의 상황에 적응되어야 하며, 탁월한 설교는 구체적인 청중의 상황에 탁월하게 조율되어야 한다. 신대원에서 목회자 후보생을 향한 설교와 교회에서 성도들을 향한 설교가 다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청중이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탁월한 적용은 본문과 청중을 연결하는 다리다.
더불어 적용은 선택의 과정을 거친다. 하나의 본문에서 다양한 적용이 나올 수 있다. 이 모든 적용들을 설교에 담는 것은 비효율적일뿐더러, 때로는 불가능하다. 선택과 집중의 원리가 요구된다. 주어진 청중의 상황에 가장 적합한 적용을 선별적으로 선택하여 설교 메시지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 설교자의 지혜다.
제3원리: 설교 - 변화를 향한 설득
제3원리 “설교 - 변화를 향한 설득”의 원리는 다음에 소개된 몇 가지 실천 사항으로 구현될 수 있다.
<설교의 목적: 목적이 이끄는 설교>
1. 청중을 겨냥하라
설교의 열매는 설교가 아니라 청중이다. 강해 설교가 추구하는 열매는 탁월한 설교문이 아니라 변화된 청중이다. 설교집 혹은 설교문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강해 설교자가 지향하여야 할 열매는 설교집이 아니라 변화된 청중이다. 설교문 혹은 설교집은 강해 설교의 부산물일 뿐, 강해 설교의 궁극적인 결실은 청중의 변화 혹은 변화된 청중이다.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고 사람이 이름을 남긴다면, 강해 설교는 변화된 청중을 남겨야 한다.
설교의 목적은 청중의 변화이지, 성경 본문의 신실한 전달이 아니다. “설교의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신실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라는 대답을 자주 듣는다. 귀한 대답이지만 정확한 대답은 아니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대답이다. 성경 본문 메시지의 신실한 전달은 설교의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설교의 목적은, 특히 강해 설교의 목적은 청중의 변화이다. 청중 변화의 방향성과 동력은 성경 본문에서 나온다. 성경은 청중의 변화를 위해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자산이다. 이 소중한 자산을 수단으로 사용하여, 청중을 변화시키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다.
2. 목표를 설정하라
효과적 설교를 위해서는 설교의 목표가 먼저 설정되어야 한다. 목표란 “설교가 끝난 후의 청중의 상태를 묘사한 문장”이다. 설교가 청중의 변화를 지향한다면, 변화된 청중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 바로 설교의 목표다. 신념의 변화일 수도 있고, 감정의 변화일 수도 있고, 행동의 변화 혹은 기술의 변화일 수도 있다. 개별 설교를 통해 설교자가 이루어내고자 하는 청중의 변화 상태를 기술한 문장이 목표이며, 목표의 설정은 설교의 효율을 상당한 수준으로 증대시킬 것이다.
해돈 로빈슨(Haddon Robinson)은 “측정가능한(measurable)” 목표의 설정을 주문한다. 계량적인 측정이 아니라 하더라도 “언어로 묘사가능한” 목표의 설정은 효과적인 설교로 나아가는 좋은 디딤돌이 된다. 로빈슨은 자신이 말하는 측정가능한 목표의 예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소개한다: “청중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이해하고 간단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혹은 “청중은 영적 은사들의 종류를 나열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고를 수 있어야 한다” 혹은 “청중은 최소 한 명 이상의 비그리스도인의 이름을 쓰고 앞으로 두 주간 매일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결심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담스(J. Adams)는 설교의 주제보다 설교의 목표를 보다 중심에 세울 것을 주문한다. 설교 준비 과정에서 주제의 설정이 일반적으로 중심에 서지만, 아담스는 설교 목표의 강조는 급기야 설교의 목표가 설교의 주제 자리를 대체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아담스의 제언이 과한 면이 없지 않으나, 설교의 목표가 지닌 중요성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감한다.
<설교 구성/ 설교화>
3. 주제 명제를 결정하라
a. 메시지를 결정하라: 주제 명제를 결정하라
효과적인 전달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많은 설교학자들이 메시지의 미결정을 꼽는다. 다시 말해, 설교자가 전달할 메시지를 명확하게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효과적인 전달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전달할 메시지가 결정되지 않았으니,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다. 효과적인 전달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무엇보다 전달할 메시지를 확실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결정하라.
결정은 선택이고, 선택은 버림이다.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다양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며,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나머지를 버림을 의미한다.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선택의 이면에 나머지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는 점에서 결정과 선택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그러나 진정으로 효과적인 전달을 원한다면, 하나의 메시지를 선택해야 하고 그 나머지는 아프지만 버려야 한다.
메시지는 “주제 명제” 혹은 “명제적 주제”(propositional theme)로 표현된다. “주제”는 기능을, “명제”는 형태를 지시한다. 주제라 함은 설교 메시지를 요약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지시하며, 그것이 명료한 명제 형태로 표현되어야 한다.
b. 새벽 3시 테스트
설교자가 전달할 메시지를 결정하였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그 답이 새벽 3시 테스트이다. 새벽 3시, 가장 깊이 잠들어 있을 시간이며, 혹 깨어난다 해도 쉽사리 정신을 차리기 힘든 취약 시간이다. 이 몽롱한 순간에도 간명하고도 명확하게 설교의 주제를 거침없이 진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메시지가 결정된 것이다.
고요한 적막을 깨고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잠결에 어둠 속을 더듬어 전화수화기를 귀에 갖다 댄다. 수화기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 “목사님, 이번 주 설교 주제가 뭡니까?”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다짜고짜 설교 주제를 묻는다. 시간을 보니 새벽 3시다. 이 때 거침없이 10-15초 안에 설교할 주제를 간명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전달할 메시지가 결정된 것이다. “어... 아, 예... 아, 이번 주는 삭개오가 거기 뽕나무에 올라가는 이야긴데요...” 이렇게 머뭇거린다면 메시지가 결정되지 않은 것이다.
100년 전 설교자들을 섬겼던 죤 헨리 조엣의 조언은 아직도 유효하다: “내가 믿기로는, 설교자가 짤막하면서도 함축적인 수정 같이 맑은 하나의 문장으로 설교의 주제를 표현할 수 있기까지는 설교할 준비는 물론, 설교문을 작성할 준비도 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그 문장이 바로 “주제 명제”다. 가장 취약한 새벽 3시에도 이 주제 명제가 구름 한 점 없는 보름달처럼 또렷할 때 비로소 설교 메시지가 결정된 것이다. 메시지의 결정이 메시지의 효과적 전달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메시지의 미결정은 전달 실패를 위해 따 놓은 당상이다.
c. 주제 명제의 독재
주제 명제가 결정되었으면 주제 명제에게 설교에 관한 전권을 부여하여야 한다. 설교 준비 과정은 이 주제 명제를 선명하고도 강렬하게 전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주제 명제를 효율적으로 섬기지 못한다면, 다음번 설교를 위해 잠시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하다.
설교의 구조가 주제 명제를 섬겨야 한다. 결정된 주제 명제를 보고, 3대지 구조가 적합할지, 기승전결 형식이 좋을지, 혹은 내러티브 설교가 좋을지를 결정해야 한다. 하나의 주제 명제가 반드시 특정 설교 구조 혹은 형식에 적합한 것은 아니며, 설교 구조를 결정하는 데 오직 주제 명제만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결정된 주제 명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담을 수 있는 설교 구조가 무엇인지에 관한 설교자의 고민이 필요하다.
3대지 설교의 경우 대지들도 주제 명제를 섬겨야 한다. 주제와 관련이 없는 대지라면, 제외하는 것이 좋다. 설령 그 대지가 주어진 본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지라 하더라도 판단은 마찬가지다. 설교의 탁월성은 해당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메시지를 탁월하게 전하는 데 있다. 본문에서 뽑아낼 수 있는 대지들을 전부 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불가피하게 선택해야 하는데, 그 선택의 기준을 주제 명제로 삼아야 한다. 기승전결 혹은 내러티브 형식을 채택할 경우에도, 메시지 덩어리(movement)들이 주제 명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 기여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예화(들)도 주제 명제를 섬겨야 하며, 반드시 그리해야 한다. 좋은 예화라 하더라도, 결정된 주제에 정확하게 부합되지 않는다면, 이번 설교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특별히 그것이 감동적인 예화라면 이 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 주제 명제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메시지를 흩트리는 예화의 감동은 설교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해친다. 감동적인 예화를 버리는 것은 팔을 잘라내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나 병든 팔을 잘라내지 않을 경우 온몸을 상하게 하고 심지어 목숨을 위협하듯, 어울리지 않는 예화를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설교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주제 명제에 어울리게 각색할 수 있다면 사용이 가능하겠지만, 버리는 쪽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다.
d. 주제 명제의 조건
주제 명제에게 요구되는 조건들을 나열하겠다.
(1) 저자의 의미에 기초하라. 설교 메시지는 성경 저자로부터 받는 것이지, 설교자가 임의적으로 생산해내어서는 안 된다. 텍스트 저자의 지도 아래 설교 메시지가 마련되어야 한다.
(2) 해석을 넘어 적용하라. 텍스트가 원독자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설교는 현청중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텍스트를 그냥 읽어주는 것이 설교가 될 수 없듯이, 해석의 자리에 머무르는 설교는 설교다운 설교가 아니다. 현청중을 위해 적용되고 혹은 번역된 메시지를 마련해야 한다.
(3) 목표 지향적일 것. 주제 명제를 읽을 때에 그 설교의 목표가 그려질 수 있어야 한다. 이 주제 명제를 가슴에 새긴 청중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화될 것인지를 설교자가 그릴 수 없다면, 혹은 설교자가 그리는 청중의 모습과 주제 명제가 지향하는 모습이 다르다면 조정이 필요하다.
(4) 완전한 문장일 것. 주제 명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문장이 되어야 하며, 다른 말로 하나의 완결된 메시지여야 한다. 극단적인 경우, 이 한 문장만 읽어주어도 설교가 될 수 있는 문장이어야 한다. 씨앗이 열매는 아니지만 열매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듯이, 주제 명제 역시 나타날 열매를 품고 있는 완성된 메시지여야 한다.
(5) 기억하기 쉬울 것. 설교는 기억되는 만큼 살아 있다. 잊혀진 메시지는 사라진 메시지다. 주제 명제가 기억하기 쉽다면, 그만큼 그 설교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커진다. 난해하여 이해도 어렵고 기억도 어려운 메시지는 일단 좋은 메시지가 아니다. 심오함이라는 말로 변명을 해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4. (주제 명제를) 심장에 새기라
잊혀진 설교는 일단 기능을 상실한 설교다. 청중이 기억하는 만큼 설교는 살아있다. 들리게 할뿐만 아니라, 설교자는 설교 메시지가 청중의 가슴에 살아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심방에 새겨야” 한다. 살아서 숨을 쉬는 한 결코 잊을 수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강해 설교의 이상이다.
(1) 목표: “집으로” 진리(take-home truth)
수누키안(Donald Sunukjian)은 설교가 “집으로” 진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조언하는데, 매우 소중한 강해 설교의 원리다. 마치 음식을 포장하여 집으로 가지고 가듯이, 집까지 잊지 않고 가져갈 수 있는 메시지를 설교자가 마련하여야 한다.
(2) 방법들
잊을 수 없는 메시지를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될 수 있다.
a. 신선한 제목 혹은 개념: “내려놓음”이라는 책의 성공은 감동적인 내용과 더불어 신선한 제목에 힘입은 바 크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친구 목사의 설교가 있다. 제목이 “커피와 콜라”였는데, 어느 본문일까? 요한계시록의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고 비판받은 라오디게아 교회 본문이었다. 커피는 뜨거워야 제 맛이고 콜라는 차가워야 제 맛이라면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마치 식은 커피와 김빠진 미지근한 콜라와 같다고 했던 말, 지금도 생생하다.
b. 상징적 행위 혹은 실물 설교: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하기 위해 썩은 베를 보여주기도 했고, 망해가는 나라의 땅을 사기도 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비를 설교하기 위해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기까지 하였다. 미국의 한 젊은 설교자는 성도의 영적 전투를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군용 장갑차를 끌고 왔다. 한 설교자는 사람의 죄를 사하는 아사셀 염소를 설교하기 위해 실제 염소를 강단으로 끌고 왔다. 필자는 현장에서 그 설교를 들었는데,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강단으로 장갑차가 올라오는 모습을 본 사람은 오죽하랴.
c. 그림 언어 혹은 비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물감과 붓만이 아니다. 말도 그림을 그린다. 때로 붓보다 훨씬 강렬한 그림을 언어가 그릴 수 있다. 하늘을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언어가 얼마나 또렷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압살롬의 반역시 도망가는 다윗의 처리를 두고 아히도벨의 전략보다 후새의 전략이 경합을 벌였다. 위어스비는 군사전략적으로는 아히도벨의 작전이 탁월했지만, 후새가 화려한 그림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압살롬의 마음을 사로잡아 다윗을 위기로부터 구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개념 언어보다 그림 언어가 이해와 기억하기에 용이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단 지나친 그림 언어의 남용은 “천박한 화장”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d. 이야기 예화: 이야기는 힘이 있다. 듣는 이의 마음에 깊게 새겨지고 오래 기억된다. 예수님이 짤막한 이야기 비유를 자주 사용하시고, 다윗을 깨우치기 위하여 선지자 나단이 이야기 비유를 사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정된 설교 메시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감동적인 이야기 예화는 설교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드는 접착제가 된다.
(3) 청중 맞춤식
설교가 끝나면 청중을 설교의 세계로 돌려보내라. 청중이 돌아갈 세계의 언어로 설교하라는 말이다. 농사꾼들에게는 농사에 관련된 비유를, 도시인들에게는 도시 생활의 모습을 그린 비유를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예수님과 바울이 사용한 방법이다.
예수님과 바울이 사용한 비유는 각각 그 청중들의 상황에 철저히 조율되어 있다. 예수님은 농사와 관련된 전원적인 비유가 주류를 이루고, 바울은 올림픽 경기와 로마병정의 모습 등 도시적인 이미지를 자주 사용한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이들이 상당수 농경 생활을 하는 농사꾼들이었다면, 도시 거점 선교 전략을 구사하였던 바울의 청중은 대부분 도시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이들은 다음 날 씨를 뿌리러 나가서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를 다시 떠올릴 것이고, 바울의 청중은 집으로 돌아가 로마 병정의 모습을 보면서 성도의 영적인 전신갑주 메시지를 상기하게 될 것이다. 현대 설교자도 해당 청중에게 가장 익숙한 비유와 이미지를 사용하게 되면 잊혀지지 않는 메시지를 마련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효과적 전달/ 설교 성공의 표지>
5. 설득하라: 수사학적 방법을 동원하라
(1) 설교의 목표는 사람의 변화다
강의는 지식의 전달을, 예술은 심상의 전달을 목표로 한다. 이에 반해 설교는 설득을 통한 사람의 변화를 겨냥한다. 전달이 수단이라면 설교의 목표는 청중의 변화 혹은 설득이다.
(2) 설교와 설득: 어거스틴 vs. 바르트
수사학은 설득을 목표로 생겨난 학문 혹은 방법론으로서 헬라 철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어거스틴은 수사학적 설득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설교자의 직무유기다. 거짓 철학을 전하는 자들이 온갖 수사학적 기술을 사용하는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수사학을 도외시하는 것은 무기 없이 전장으로 나가는 병사와 같다고 비판하였다. 반면에 칼 바르트는 수사학적 설득법 사용을 설교자의 인간적 타협이라고 비판한다. 필자는 어거스틴의 조언을 따라, 설교자에게 수사학의 적극적인 사용을 권한다.
(3) 설득의 요소
a. 설교의 논리
b. 설교자의 열정
c. 설교자의 인격
(4) 설득과 조작
설득은 자칫 조작으로 변질될 수가 있다.
a. 메시지에 조율되지 않은 열정과 인격
b. 인위적 예화/이미지를 통한 거짓 메시지 주입
6. 청중을 갈라라: 성공적인 설교의 표지
성공적인 설교의 표지는 갈라진 청중이다. 예수님의 설교 후에 청중은 두 무리로 갈렸다. 순종하여 제자가 되려하는 사람과 분개하여 돌로 치려 한 사람이다. 청중 모두가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라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앤디 스텐리는 청중을 매혹시키거나 분노하게 하라(engage or enrage)고 조언하였다. 분노가 너무나 격한 말이라면 단순 거절이라고 해도 좋다. 여하튼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갈림은 성공적인 설교의 표지다.
물론 모든 청중의 일치된 순종이 설교의 최고 열매다. 청중의 갈림을 성공적인 표지로 내세우는 것은 억지로 청중을 갈라놓아 일부라도 ‘못 믿게’ 하자는 뜻이 아니다. 천국은 알곡과 더불어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고 했다. 복음은 알곡을 거두어 들이지만, 가라지는 그 가라지됨을 드러내게 한다. 청중의 일치된 반응은 설교 메시지의 모호성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있다. 모호한 설교는 있는 그대로 실패한 설교다.
결론: 강해 설교는 바르고 힘센 설교
강해 설교는 바르고 힘센 설교다. 좋은 설교는 바르고 그리고 힘센 설교다. 필자는 이 바르고 힘센 설교를 강해 설교라고 믿으며, 바르고 힘센 설교의 통상 명칭이 강해 설교가 되기를 바란다. “강해”라는 말에 강해 설교의 “바름”의 소망을 담고, “설교”라는 말에 강해 설교의 “힘셈”의 비전을 담았다.
바른 설교란 성경을 설교하는 설교, 그리고 성경 저자의 의미 혹은 의도를 설교 메시지의 중심에 삼는 설교다. 물론 적용을 통해 청중에의 적응을 시도하지만, 그 설교 메시지의 뿌리는 주어진 성경 본문에 담긴 저자의 의도이다.
힘센 설교란 효과적 전달과 설득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키는 설교다. 설교는 텍스트를 섬기기보다 사람을 섬긴다. 텍스트에 기초하고 사용하되, 그 목표는 언제나 사람의 설득 그래서 사람의 변화다. 가용한 방법을 최대한 동원하여 청중으로 하여금 듣게 만들고, 기억하게 만들고, 설득하는 설교가 힘센 설교다.
바름과 힘셈은 참된 설교를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다. 그 하나를 포기함은 그 자체로 설교를 포기함이다.
“바름으로 힘세지 못함을 변명할 수 없고,
힘세다는 것으로 바름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