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밤, 촛불 아래서 변인섭 아주 가끔, 이유 없이 혼자 웃음이 번질 때가 있다. 거울 속에는 흰 머리칼이 성성하고, 얼굴에는 세월이 조용히 그어 놓은 주름이 자리 잡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직도 철없던 소녀가 조용히 고개를 내민다. 그 아이가 떠올리는 장면은 늘 같다. 오십 년도 훌쩍 지난 어느 가을밤, 고등학교 3학년의 교실이다. 예비고사를 앞둔 10월 하순, 운동장은 낙엽으로 덮여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남았고, 교정에는 긴장과 조급함이 스며 있었다.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하며 지쳐있던 우리는, 시험과 성적이라는 무게보다 훨씬 더 큰 마음의 허기와 마주하고 있었다. 세상은 앞으로 다가올 불확실한 시간으로 꽉 차 있었고, 그 시간속에서 나와 친구들은 아직 어린 마음으로 스스로를 견디고 있었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청주의 고등학교로 진학한 친구가 있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눈빛만큼은 단단하고 따뜻했던 그 친구가 어느 날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우리, 오늘 밤에 학교 가서 공부할까? 교실에서 밤새워 보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당시, 학교에는 야간 자율학습이 없었고, 몰래 들어가는 교실에서 불을 밝힐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밤에 몰래 교실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겁나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단번에 거절하지 못했다. 두려움보다 설렘이 마음을 더 크게 두드렸다. 그날 우리는 초와 성냥을 챙기고, 창밖으로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촛불 가릴 담요를 들고 교실로 향했다. 어둡고 인기척 없는 건물을 향해 숨을 죽이고 걸어갔다. 조심스럽게 복도 쪽 교실 창문을 열고, 그 창문을 넘어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교실에 발을 들이니 우리는 세상에 들키지 않은 비밀 하나를 공유한 듯 가슴이 뛰었다. 낮에는 소란스러웠던 교실이 깊은 밤에는 마치 다른 세상처럼 고요했다. 칠판은 검은 바다처럼 잔잔했고, 책상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 있었다. 아주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와 바람 소리만 존재하는 밤이었다. 각자 담요를 뒤집어쓴 채, 우리는 책상 위에 초를 세우고 성냥을 그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연약한 불빛이 어둠을 밀어내며 담요 안을 부드럽게 감쌌다. 우리는 마주 앉아 문제집을 펼쳤지만, 그 순간의 떨림과 긴장은 공부보다 훨씬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바람이 창문을 스치면 담요가 살짝 흔들렸고 연필 잡은 손도 그렇게 떨렸다. 혹시 누가 올 까봐 귀를 세우기도 하고, 졸음을 쫓으려 서로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 얼마나 많은 문제를 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촛농이 천천히 흐르던 모습, 새벽 공기의 싸늘함, 친구와 함께 느낀 설렘과 두려움만은 선명하다. 아마도 내가 그 순간을 오래 붙들고 있는 것은 성적이 아니라, 그 밤 함께 견디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칠십이 훨씬 넘은 지금 상각해 보니, 그 시절의 나는 참으로 아찔하게 용감했고, 동시에 참으로 철없었다. 내가 깊이 잠들어 초가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담요에 불이 옮겨붙었다면, 숙직 선생님께 들켰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그 상황을 말하고 있었을까. 그 모든 위험과 두려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쓸쓸히 조여 오지만, 이상하게도 그 아찔함조차 지금은 따뜻하다. 긴장과 위험 속에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많은 것을 데려갔고 또, 많은 것을 가져왔다. 부모님과 친구들, 젊음과 패기, 이루지 못한 꿈도 흘러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밤의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그 밤의 떨림과 마음은 아직도 내 안에서 불씨처럼 살아 숨 쉰다. 돌이켜보면, 청춘이란 꼭 성취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었다. 시험 점수나 합격 여부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위험과 불안을 감당하며 빛을 밝히고, 누군가와 마음을 나눈 순간들로 남는다. 그 밤은, 그리고 그 밤을 견뎌낸 마음은, 내 삶에서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내 안을 비추고 있다. 지금, 나는 창가에 앉아서 해가 저무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노을이 서서히 어둠으로 물드는 순간, 문득 그때의 교실 풍경이 겹쳐진다. 작은 초 하나로도 충분히 밝다고 믿었던 밤. 세상이 온통 어둡게 느껴지던 순간에도 우리는 스스로 불을 밝힐 줄 알았다. 아주 가끔 혼자 웃음이 나는 것은, 아마 그 밤, 담요 안 촛불 아래서 서로의 떨림과 설렘을 함께 느꼈던 순간이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겁 없이 용감했던 청춘은 스스로 불을 밝히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삶은 그 불빛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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