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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 촛불 아래서 / 변인섭

작성자그후로도|작성시간26.06.22|조회수17 목록 댓글 0
그 밤촛불 아래서    


       
변인섭


아주 가끔이유 없이 혼자 웃음이 번질 때가 있다거울 속에는 흰 머리칼이 성성하고얼굴에는 세월이 조용히 그어 놓은 주름이 자리 잡았지만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직도 철없던 소녀가 조용히 고개를 내민다그 아이가 떠올리는 장면은 늘 같다오십 년도 훌쩍 지난 어느 가을밤고등학교 3학년의 교실이다.


예비고사를 앞둔 10월 하순운동장은 낙엽으로 덮여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남았고교정에는 긴장과 조급함이 스며 있었다하루 종일 책과 씨름하며 지쳐있던 우리는시험과 성적이라는 무게보다 훨씬 더 큰 마음의 허기와 마주하고 있었다세상은 앞으로 다가올 불확실한 시간으로 꽉 차 있었고그 시간속에서 나와 친구들은 아직 어린 마음으로 스스로를 견디고 있었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청주의 고등학교로 진학한 친구가 있었다.  말수는 적었지만눈빛만큼은 단단하고 따뜻했던 그 친구가 어느 날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우리오늘 밤에 학교 가서 공부할까교실에서 밤새워 보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 당시학교에는 야간 자율학습이 없었고몰래 들어가는 교실에서 불을 밝힐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밤에 몰래 교실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 겁나고 위험한 일이었다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단번에 거절하지 못했다두려움보다 설렘이 마음을 더 크게 두드렸다. 누구한테라도 들킬까 봐 조심스러우면서도 , 동시에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함께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그날 우리는 초와 성냥을 챙기고창밖으로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촛불 가릴 담요를 들고 교실로 향했다어둡고 인기척 없는 건물을 향해 숨을 죽이고 걸어갔다조심스럽게 복도 쪽 교실 창문을 열고그 창문을 넘어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교실에 발을 들이니 우리는 세상에 들키지 않은 비밀 하나를 공유한 듯 가슴이 뛰었다낮에는 소란스러웠던 교실이 깊은 밤에는 마치 다른 세상처럼 고요했다칠판은 검은 바다처럼 잔잔했고책상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 있었다아주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와 바람 소리만 존재하는 밤이었다


각자 담요를 뒤집어쓴 채우리는 책상 위에 초를 세우고 성냥을 그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그 연약한 불빛이 어둠을 밀어내며 담요 안을 부드럽게 감쌌다우리는 마주 앉아 문제집을 펼쳤지만그 순간의 떨림과 긴장은 공부보다 훨씬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바람이 창문을 스치면 담요가 살짝 흔들렸고 연필 잡은 손도 그렇게 떨렸다혹시 누가 올 까봐 귀를 세우기도 하고졸음을 쫓으려 서로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지금 돌이켜보면 그날 얼마나 많은 문제를 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대신 촛농이 천천히 흐르던 모습새벽 공기의 싸늘함친구와 함께 느낀 설렘과 두려움만은 선명하다아마도 내가 그 순간을 오래 붙들고 있는 것은 성적이 아니라그 밤 함께 견디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칠십이 훨씬 넘은 지금 상각해 보니그 시절의 나는 참으로 아찔하게 용감했고동시에 참으로 철없었다내가 깊이 잠들어 초가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담요에 불이 옮겨붙었다면숙직 선생님께 들켰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그 상황을 말하고 있었을까그 모든 위험과 두려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쓸쓸히 조여 오지만이상하게도 그 아찔함조차 지금은 따뜻하다긴장과 위험 속에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많은 것을 데려갔고 또많은 것을 가져왔다부모님과 친구들젊음과 패기이루지 못한 꿈도 흘러갔다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밤의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그 밤의 떨림과 마음은 아직도 내 안에서 불씨처럼 살아 숨 쉰다.


돌이켜보면청춘이란 꼭 성취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었다시험 점수나 합격 여부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스스로 위험과 불안을 감당하며 빛을 밝히고누군가와 마음을 나눈 순간들로 남는다그 밤은그리고 그 밤을 견뎌낸 마음은내 삶에서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내 안을 비추고 있다.


지금나는 창가에 앉아서 해가 저무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노을이 서서히 어둠으로 물드는 순간문득 그때의 교실 풍경이 겹쳐진다작은 초 하나로도 충분히 밝다고 믿었던 밤세상이 온통 어둡게 느껴지던 순간에도 우리는 스스로 불을 밝힐 줄 알았다.


아주 가끔 혼자 웃음이 나는 것은아마 그 밤담요 안 촛불 아래서 서로의 떨림과 설렘을 함께 느꼈던 순간이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겁 없이 용감했던 청춘은 스스로 불을 밝히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삶은 그 불빛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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