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진의 ‘흔적 살피기-스치듯 안녕’에 붙이는 추천의 글
대체로 많은 사람이 자연(自然)을 좋아하고 자연스럽기를 희망한다.
자연을 벗 삼아 자연스럽게 사는 꿈, 소시민의 가장 큰 꿈 중 하나 아닐까 싶다.
인위적인 힘이 더해지지 않고 태초부터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저절로 생겨나 흐르는 산과 강과 바다, 그리고 식물이나 동물 등과 그것들이 이루는 환경. 자연은 그만큼 위대한 것이기에 자연스러울 수만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삶은 없을 것이다.
삼라만상, 유기 무기, 바위가 구르고 굴러 먼지처럼 작은 모래알갱이가 되고, 만물의 영장 인간에서부터 수많은 포유류는 물론 생명 갖은 수많은 풀·꽃·나무까지, 이 세상 모든 생명체와 무기 형질들은 살아온 세월과 에너지의 흐름에 의해 이동하고 변해가며 흔적을 남기고 또 어디론가 향해 간다. 생성과 소멸의 궤적, 지금의 모습이 생명의 모습이라 해도 자연의 현상이고 적멸의 과정이라 해도 자연의 현상이다.
모든 현상의 생기소멸(生起消滅)을 말하는 연기론(緣起論)에 따르면 이 세상 모든 자연 현상은 인연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말이 있다. 끝이 어디인지 모를 무한의 우주, 그중 작은 별 지구에서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인연의 어디쯤 서 있을까?
심양진의 사진은 아마 그 인연의 지점을 살피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그 지점을 사진 이미지로 담아내는 행위는 비로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서 있는 곳과 앞으로 살아갈 길을 적시해 알려주는 느낌이다.
시선에 따라 철학적 사고가 동반되기도 하고 때론 문학적 바라보기로 읽히기도 하는 심양진의 사진 작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소리 큰 명령이 아니다. 스치듯 인연이 닿아 만난 그 모든 찰라, 작고 낮은 목소리로 보내는 치유의 미소라 생각하니 이 작업이 더 크게 보인다.
2025년 10월 강재훈(사진가)
스치듯 안녕
느리게 걷는다.
느린 걸음으로 주위를 살피며 걷는다.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도 본다. 뭐하나 특별하지 않지만 작고 소소하고 낡고 빛바랜 것들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닿는다. 이쁨을 다하고 떨어진 꽃잎들, 무수한 생명체의 발자국들, 줄지어 부지런히 걷는 개미들, 지나간 계절이 남긴 다채로운 색채들, 그리고 바람과 파도와 시간이 만들어놓은 무수한 작품들…. 그저 스쳐 지나갈 법도 한 것들 앞에 멈춰서서 빤히 바라다보면 놀랍도록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 세상이 더욱 선명해지는 듯하다.
내 눈길이 닿는 곳은 언제나 한발 늦은 자리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꼭 새롭고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에만 있지 않다. 가장 찬란했던 시간이 지나면 그 빛이 사라지는 대신 지난 세월만큼의 많은 이야기를 남긴다. 그 이야기는 조용하지만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을 힘을 품고 있다. 마치 오래된 친구가 속삭이듯 내가 알아봐 주기만을 기다린 듯한 흔적들이 나는 좋았다. 그 흔적이 곧 삶이자 존재의 증거였고 흐르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눈여겨보지 않아도 나는 기꺼이 그것들을 어여삐 바라보겠지….
사진을 찍는다는 건 단순히 대상을 기록하는 행위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눈이 밝아지는 일이기도 하고 세상 온갖 일에 오지랖이 넓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내 곁을 스치듯 사라지는 모든 것에 다정히 안녕을 고한다. 이 사진들이, 여러분에게도 잠시 멈춰서서 찰나에 스쳐 가는 작은 흔적들에 안녕을 건넬 기회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2025. 10. 22. 심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