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되기 전의 사진
나는 지금 전시 서문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사진들을 보고 있다. 내 앞에는 각기 한 장의 사진과 짧은 작업노트가 놓여 있다. 그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고 부족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무엇을 쓸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은 옳다. 다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사진을 더 보내 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만 같다. 이유는 전시 제목이 이미 《말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제목이 그렇게 붙어 있는데 더 많은 자료를 요구하는 일은, 비록 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어딘가 이 전시의 사정과 맞지 않는다. 사진은 이미지다.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진은 늘 말보다 먼저 와 있다. 그래서 나는 다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전시장 쪽을 바라보며,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다. 그들이 끝내 하지 못한 말, 혹은 애초에 말이 될 수 없었던 말을, 거기서 듣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물론 그것은 이상한 말이다. 설명하지 않으면서 남고, 주장하지 않으면서 전해진다. 우리는 사진 앞에서 의미를 찾는다. 무엇을 찍었는지, 왜 찍었는지, 무엇을 뜻하는지 묻는다. 그러나 사진은 대개 그 질문들보다 먼저 도착해 있다. 먼저 보이고, 나중에 읽힌다. 먼저 닿고, 그다음에 해석된다. 그래서 사진은 말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어떤 말보다 더 오래 남는다. 말은 끝나지만 사진은 끝나지 않은 채 남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무엇처럼 보인다.
《말 할 수 없는 말》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다소 가혹하다. 말할 수 없다면 말이 아닐 것이고, 말이라면 끝내 말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그 둘 사이에 놓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듯하면서 오래 말을 걸고, 무엇을 보여주면서도 끝내 다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 아이러니는 사진의 형편 그 자체다. 의미와 무의미, 발화와 침묵, 전달과 유예가 한 화면 안에서 서로를 밀어내지 못한 채 함께 남아 있는 상태. 사진은 늘 그 중간 지대에서 자기 자리를 얻는다. 그 자리는 편안하지 않다. 그러나 사진의 이미지는 대체로 그 편안한 자리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사진이 이미지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사진을 본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진을 읽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사진을 읽는 법을 오래전에 이미 익혔다. 무엇이 인물이고 무엇이 풍경인지, 어떤 표정이 슬픔이고 어떤 장면이 긴장인지 너무도 빨리 알아차린다. 그래서 사진은 종종 지나치게 쉽게 이해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진 속 사건의 원인까지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 또한 예측하기 어렵다. 바로 이런 사진 앞에서 말은 멈춘다. 반대로 쉽게 이해되는 사진은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따지지 않아도 곧바로 하나의 말이 되어버리는 사진이다. 그런 사진 앞에서 우리는 이미지의 세부를 오래 들여다보지 않는다. 꼼꼼히 살피고 관찰하기보다, 이미 익숙한 의미를 재빨리 읽어낸다. 이때 우리는 사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읽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사진을 본다는 것은, 오히려 말 없는 사진 앞에 머무는 일에 가깝다. 예술사진에서 좋은 사진은 늘 그 빠른 이해의 바깥에 작은 여백을 남긴다. 그 여백은 비어 있는 공백이 아니다. 쉽게 번역되지 않는 감각, 뜻으로 정리되기를 미루는 분위기, 이유를 알기 전에 먼저 스며드는 떨림 같은 것들이 그곳에 머문다. 이를 두고 코드 없는 메시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읽히지만 다 읽히지 않는 것. 보이지만 다 드러나지 않는 것. 사진은 대개 바로 그 남는 부분에서 자기 힘을 드러낸다.
아마 참여 작가들에게 이 제목은 처음부터 가벼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말》이라는 문장을 사진으로 받아 안는 일은 곧장 한계 앞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진 이미지로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가. 어디서부터는 끝내 말이 되지 않는가. 무엇을 보여야 하고 무엇은 남겨두어야 하는가. 작가들은 아마 그 앞에서 여러 번 멈추었을 것이다. 찍고, 버리고, 다시 보고, 다시 의심하면서.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는 생각과, 너무 많이 말해버렸다는 생각이 번갈아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 곤란함이 사진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사진 이미지의 한계에 부딪히는 순간, 작가는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자기 형식 가까이 간다. 다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결핍이 아니라 조건이며, 때로는 사진이 가까스로 지켜내는 마지막 정직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전시에 놓인 사진들은 무엇을 또렷하게 설명하는 결과라기보다, 끝내 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이미지의 표면 가까이 데려온 흔적들에 가까워야 할 것이다. 작업노트는 그 흔적을 따라갈 작은 단서가 되겠지만, 사진을 대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말은 사진 앞까지 갈 수는 있어도 끝내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바로 그 틈에서 사진은 자기의 온도를 갖는다. 관객은 읽는 사람인 동시에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듣는 사람이 된다. 보이는 것을 보면서, 아직 말이 되지 않은 것을 함께 듣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설명이라기보다 오래 남아 끝내 사라지지 않는 흔적에 가깝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말》은 침묵의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침묵이 끝내 침묵으로 머물지 못하는 순간에 더 가깝다. 사진은 문장처럼 또렷하지 않다. 대신 더 천천히 스며든다. 더 늦게 이해되고, 더 오래 남는다. 말로 정리되지 못한 감각,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기억, 설명에 앞서 먼저 다가오는 어떤 흔적이 사진이미지 안에서 조용히 우리에게 건너온다. 그것은 설득하지 않고, 명령하지 않으며, 다만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사진은 늘 독백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정확히 전달되기 위해 준비된 말이 아니라, 혼자 남아 있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말. 아직 스스로도 다 알지 못하는 것을 먼저 내보내는 말. 그래서 사진은 말이 아니면서도 말이 된다. 말할 수 없어서 오히려 더 오래 남는 말. 《말할 수 없는 말》은 아마 바로 그 조용하고도 완강한 독백의 형식이 아닐까.
글: 이영욱(상명대 포토아카데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