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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진의 계보

11.일본의 전후 (戰後) 사진

작성자김남진|작성시간07.01.04|조회수710 목록 댓글 0
 150년의 사진 약사 

 

11.일본의 전후 (戰後) 사진

 

  사회적인 의미와 의의를 주된 목적으로 한 리얼리즘 사진운동에서, 자기표현으로서의 사진을 전면에 내건 운동으로 -그리고 70년대 이후 운동체는 소멸되었고 사진가 각자의 관심영역을 향해 사진표현은 더욱더 확산되고 다극화되어 갔다.  제2차대전 이전의 일본의 '예술사진'과 '신흥사진(新興寫眞)'의 시대를 이끌었던 것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이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그룹이 주재한 사진전들과 현상응모사진(月例寫眞)을 모집하고 있던 카메라 잡지를 무대로 하여 자유로운 창작 의욕이 넘치는 작품이 발표되고 있었다. 

   전후에도 이러한 상황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1946년에 '카메라'가 복간되었고 49년에는 '아사히 카메라'가 복간되었다. '포토아트'(1949년), '일본카메라'(1950년), '산케이카메라'(1945년), '카메라 마이니찌'(1945년)등의 아마추어를 향한 카메라 잡지들도 속속 창간되었다. 또 전후의 부흥과 함께 일본제 카메라가 일제히 발매되어 사진은 대중적인 취미로서 폭넓게 자리잡아 갔다. 아마추어들의 사진열기는 전쟁 후에도 계속 높아만 갔다.

  그 아마추어들의 에너지를 사회성이 강한 주제를 촬영하는 방향으로 조직하려고 했던 것이 일본에서의 리얼리즘사진운동이었다. 1950년, 상이군인, 창부, 일력거꾼 등 전후의 혼란기의 세상을 직시한 사진을 '카메라'지에 발표하고 있던 도몽 켄( DOMON Ken : 土門券, 1909-)이 잡지의 월례사진 심사위원이 되었다. 그는 '절대 비연출의 절대 스냅'과 '카메라와 모티브의 직결'을 제창하면서 1952년부터 심사위원이 된 기무라 이헤이(Kimura Ihee : 木村伊兵衛)와 함께 아마추어들에게 카리스마적인 영향을 끼쳤다. 나중에 프로가 된 도마쯔 쇼메이(Tomatsu Shomei :東松 照明 1930-), 가와다 기꾸찌(Kawada Kikuji : 川田喜久治 1933-) 등도 이 리얼리즘 사진운동 속에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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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마쯔 쇼메이, Black Sun : Nagasaki(1962), Melted beer bottle after the atomic explosion 1945(1962) ,

                                                           Protest(1967)

리얼리즘 사진 운동과  주관주의 사진 운동

  그러나 비참한 현실에만 시선을 향하는 이른바 '거지사진'이 횡행해 주제와 수법이 고정되어가던 중에 1955년경에 이르러 이 운동자체가 고갈되어 갔다. 도몽켄의 '히로시마'(1958),' 스크토요(큐슈의 탄광촌)의 아이들'(1960), 기무라 이헤이의 '아끼다(秋田 )'시리즈(1953)등 운동의 성과를 살릴 작품도 생겨났지만 리얼리즘 사진운동에는 아마추어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는 약점이 항상 따라 다닌다.

  이와 같은 1950년대에 아마추어의 일부에 프로가 섞여 전개된 것이 '주관주의 사진'운동이다. 독일의 오토 슈타이네르트(Otto Steinert 1915-78)가 제창한 '주관적 사진(Subjektive Fotografie)'을 일본식으로 해석한 것으로 암실작업에 의한 몽타주, 형태의 단순화, 흔들림과 거친 입자 효과 등 반(反)리얼리즘이라고도일컬을 만한 이미지 형성의 실험이 반복되었다. 1956년에는 本雇光朗(고베), 타키구치 슈우조(驚ㅁ修造 ; 나고야), 三繼幸一(도쿄) 등에 의해 일본 주관주의 사진연맹이 결성되지만 역시 작품의 형식화에 의해 운동 자체는 단명하고 만다.


사진가 집단 VIVO의 결성

  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사진을 보도사진과 상업사진과 같은 응용 분야에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립한 '영상(映像)',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서 확립해 가려고 하는 젊은 사진가들의 운동이 활성화되어 간다. 그 중심이 된 것이 도마쯔 쇼메이, 나라하라 잇꼬(Narahara Ikko: 奈良原一高 1931-), 가와다 기꾸찌 (KawadaKikuji : 川田喜久治 ), 호소에 에이꼬(Hosoe Eikoh : 細江英公 1933-), 사토오 아키라(佑蘿明 訓-), 아카노 아키라(丹野章)의 6명에 의해 1959년에 결성된 사진가집단 VIVO(에스페란토어로 생명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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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소에 에이꼬, 남과 여(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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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소에 에이꼬, 장미형(좌) , 가마이타치


  VIVO의 사진가들은 1930년대에 태어나 전쟁 전부터 활동하고 있었던 도몽 켄, 기무라 이헤이, 하마야 히로시((濱谷浩) 등과는 다른, '전후파(戰後派)'의 새로운 감수성과 방법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종래의 리얼리즘=보도사진적인, 사실의 평이한 묘사를 초월해, 현실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시선을 향하는 태도가 강조되었다. 나라하라 잇꼬가 말하는 '퍼스널 다큐멘트(Personal Documentary)라고 할만한 방법'의 모색이다.

  VIVO의 사진가들 가운데 중요한 작품을 남긴 사람은 도마쯔(東松), 나라하라(奈良原), 가와다(川田), 호소에(細江)일 것이다. 도마쯔 쇼메이는 '카메라'의 투고작가로 등장하여,  아이치(愛知)대학 졸업 후 '이와나미사진문고(崙波寫眞文庫)'의 카메라맨으로서 보도사진의 문법을 익힌다.  그러나 1956년에 이와나미를 퇴사한 뒤 소시민 생활의 단편을 자유로이 포착한 '사람'시리즈(1959)를 발표해 주목받는다. 이후 고도경제성장에 의해 그로테스크하게 변모해 가는 일본 사회를 여러가지 각도에서 부각시킨 '점령', '집'(1960), '11시02분 NAGASAKI'(1966), '일본'(1967) 등의 문제작을 차례차례 발표해 왔다. 사진촬영행위의 원점으로 회귀하기 위해 오키나와에 2년 남짓 체재하며 촬영한 '태양의 연필'(1975)시리즈도 전후 사진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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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하라 잇꼬

 

  어디까지나 일본의 사회와 현실에 렌즈를 돌린 도마츠에 비해 국제적인 활동 무대를 추구한 것이 나라하라 잇꼬이다. 1956년 개인전 '인간의 토지'에서 '자연대 인간'(사쿠라지마부근 구로가미(黑神)부락), '사회기구대 인간'(社會機構對人間 , 통상 군칸지마라고 불리는인공섬)이라고 하는 테마를 선명하게 대비시켜 충격적인 데뷔를 장식한 나라하라는 1962년 유럽에 건너가 파리를 중심으로 65년까지 머문다. 후에 사진집 '유럽·정지한 시간'(1967)에 담긴 작품으로 그는 유럽의 역사와 문화의 두께를 영상시로서 결정화시켜 보여주었다. 그 뒤 외부로부터의 시선으로 일본 문화를 포착해간 '자파네스크'(1970), 1970-74년에 미국에 머물며 촬영한 사진을 정리한 '소멸된 시간'(1975) 등의 의욕적인 작품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VIVO의 사진가들 중에서 자신의 주관적 세계에 대한 애착이 가장 강한 것은 가와다 기꾸찌일 것이다. 현실세계의 질서로부터 벗어난 상징적인 오브제로 구성된 '지도'(1965), '성스러운 세계'(1971) 등 서로 다른 모습의 박력을 갖춘 사진집을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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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와다 기꾸찌, 지도: A-Bomb Dome(좌),  일장기(우)


  호소에 에이꼬는 에로스와 육체라고 하는 테마를 정면에서 다룬 '남과 여'(1960)로 강력한 영상의 미학을 확립한다. 그 수법은 미지마 유키오를 모델로 한 '장미형(替藏刑, 1963,  장미의 심판이라는 뜻)', 무용가인 시스가타 타스미의 육체의 드라마를 추구한 '카마이타치(kamaitachi,1969 ; 孝 일본 농촌에 민속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일종의 도깨비)' 등으로 보다 화려하게 전개된다.

VIVO의 사진가들, 더욱이 1953년에 미국으로부터 귀국해 시카고의 뉴 바우하우스의 계보를 이어 받아 엄밀한 조형 감각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주목받았던 이시모토 야스히로(Ishimoto Yasuhiro : 石元泰博,1922~) 등의 출현에 의해 자립한 표현으로서의 사진 작품을 지향하는 사진가가 일본에도 가까스로 등장해 오게 된다. 그들은 아티트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대외적으로도 그 실을 인정받은 최초의 세대라고 말할 수 있겠다.

 

'PROVOKE'의 도발과 '콘포라'의 궤적

  1968년 11월 'PROVOKE '라고 하는 계간 동인잡지가 창간되었다. 동인으로는 사진가인 나카히라 따꾸마(Nakahira Takuma : 中平卓馬 1938-), 따까나시 유타까(Takanashi Yutaka : 高梨豊 1935-), 평론가로서는 당시 사진도 발표하고 있었던 다키 고우지(木造二 1928-), 시인인 오카다 다카히코(岡田隆彦)이다. 2호부터는 모리야마 다이도(Moriyama Daido : 森山大道 1938- )가 동인으로 참가했다.

  'PROVOKE'(도발)이라고 하는 이름에 걸맞게 동인들의 사진에는 급진적인 표현 의욕이 넘쳤다. 60년대 말은 일본의 대학가의 학원투쟁을 계기로 불타오른 정치 ·문화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이의 신청의 계절이었다. 'PROVOKE'의 동인들은 대중소비사회의 메커니즘으로 확산되어, 리얼리티를 잃어버린 '인간과 세계를 전체화(全體化)하는 것으로서 지혜‘를 목표로 한 ’사상을 위한 도발적인 자료‘(PROVOKE 부제)를 제시하려고 했다.

  보도사진적인 사회적 기능과 모던 포토그래피를 목표로 한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양쪽 모두 부정하기 위해 이른바 거칠고 흔들리고 흐리멍텅함’의 황량한 이미지를 선택하였다. 나카히라와 모리야마의 작품에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이 언어와 의미에 의해 얽매이고 고정된 이전의 미분화된 세계의 단편이 어둠 속으로부터 끄집어 내어진 것과 같은 모습으로 정착된 것이다.

  ‘PROVOKE’는 1969년 8월에 3호를 내놓고 다음 해인 70년 3월 , 그들의 활동을 총결산한 사진 에세이집 ‘먼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세계를 버려라’를 간행하고 해산한다. 그러나 모리야마의 ‘일본극장사진첩’(1968), ‘사진이여 안녕’(1972), ‘사냥꾼’(1972), 나카히라의 ‘다가올 언어를 위해’(1970), 타카나시의 ‘도시(都市)에’(1974) 등에는 사진표현의 근거를 묻는 시대를 질주한 그들의 발자취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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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야마 다이도

   한편 60년대 말에는 ‘PROVOKE’의 거친 급진주의와는 일견 대조적인 사진 스타일도 등장한다. 네이던 라이언스가 기획한 ‘현대사진가들(Contemporary  Photographers);사회적 풍경을 향해서’(1966)의 영향을 소화시킨 이른바 ‘콘포라 사진’이다. 일상의 자연스러운 모습에 대한 관심, 다양한 가로 위치의 구도, 대상과의 객관적 거리감 등에는 확실히 리 프리들랜더와 그 뿌리인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과의 공통성이 보인다. 그러나 고쪼 시게오(Gocho Shigeo : 牛腸茂雄 1946-83), 시모즈 다카유키(下津降之 1942-), 스즈키 기요시(鈴木淸 1943-) 등으로 대표되는 ‘콘포라’의 사진가들은 그들과 현실(자기와 타인)과의 관계의 그물 눈을 사진이라고 하는 매체를 통해 검증하는 작업속에서 그 스타일을 선택해 갔다고 할 것이다. 1983년에 급서한 고쪼의 ‘SELF AND OTHERS'(1977)는 ’콘포라 사진‘의 두께와 풍요함을 결정화시킨 묘하게 마음을 흔드는 사진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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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히라 타쿠마                   세이지 쿠라타               다카나시 유타카 

 

다극화된 70년대 이후의 일본사진

  70년대 이후의 일본사진은 한마디로 초점이 없는 다극화의 양상을 띠고 있다. 얼핏 보아도 성(性)에 관계된 개인적 풍경에 집착하는 아라끼 노부요시(Araki Nobutoshi  : 荒木經惟:1940 ~), 후까세 마사히사(深瀨昌久 ,1934-), 일본인과 일본문화의 뿌리를 민속을 통해 찾으려고 하는 나이토 마사토시(Naito masatoshi : 內藤正敏 , 1938-), 쯔찌다 히로미(1939-), 스다 이세이(Suda Issei : 須田一政:1940 ~ ). 도시를 스냅 숏으로 잘라낸 맛을 보여준 세이지 쿠라타(Seiji Kurata : 倉田 精二, 1945-), 키타지마 케이조(Kitajima Keizo :  北鳥敬三 , 1954-), 표현장치로서의 사진 그자체를 추궁하는 타무라 아키히데(1947-), 야마자키 히로시(1946-) 등 다양한 개성들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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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쪼 시게오, Family Icecream                         키타지마 케이조                                스다 이세이

  파리의 다하라 게이찌(1951-), 뉴욕의 스기모또 히로시(Sugimoto Hiroshi : 杉本博司, 1948 ~ ), 고오즈 마사오(1946~) 등 해외에 호라동의 거점을 둔 사진가도 나타나고 있다. 또 광고 사진 출신의 시노야마 키신(Shinoyama Kishin : 篠山紀信, 1940~), 구리가미 가즈미(1936~ ), 요꼬스가 노리아키(Yokosuka Noriaki , 橫須賀 功光 , 1937~) 등도 사진표현의 영역을 넓히려고 다채로운 실험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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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노야마 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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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끼 노부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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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기모또 히로시:  극장, 음악 레슨, 건축물 

 

  80년대 후반에 들어서 사진 갤러리의 숫자도 증가하고 공립미술관에서도 프린트의 수집과 전시에 주력하기 시작하는 등 표현(art)으로서의 사진의 재발견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아마도 현재 활약하고 있는 중견 사진가 혹은 지금 새싹을 내놓으려고 하는 신인 가운데에서도 90년대를 이끌어 갈 사진가가 등장할 것이다. 일본의 사진가들의 작업이 국제적인 사진표현의 움직임 속에서 정당하게 평가될 날이 올 것이다. 

 김남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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