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우리들의 이야기방

고구려의 기상 구리시(각동,지역의)유래

작성자박명임|작성시간08.03.24|조회수103 목록 댓글 1


갈매
조선시대부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는 양주군 노원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노원면의 담터와 구지면의 사노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갈매리라 하였다.
이때 구리면의 한 리가 되었으며 1979년 갈매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0년 남양주군에 편입되었다가, 1986년 구리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갈매동이 되었다.
마을 주위의 산의 모습이 칡과 매화와 같다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갈매동 북북서 방향에 불암산이 있고
북동족 방향에는 진접의 테미산이 있다.
풍수지리적인 해설에 의하면 목마른 말이 화접리에 있는 샘말의 물을 먹는 형국인 '갈마음수'형이라고 한다.
그래서 갈마가 갈매로 바뀐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담터, 장기(墻基)
삼화농장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갈매동 6, 7, 8, 9,통 지역을 말하며 북쪽과 서쪽으로 둘러싼 작은 야산들이 마치 마을을 담으로 둘러싼 듯하여 붙은 이름이다.
범데미, 범더미
갈매초등학교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갈매동 4,5동 지역을 말한다.
옛날 서울로 넘어가는 고개에 범이 자주 나타났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동에서 남양주시 퇴계원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
1950년대에는 길을 경계로 남쪽에는 2~3채의 집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구리농협 갈매지소를 비롯하여 약 40여 호가 들어서 있다.
섬말.도촌(島村)
갈매초등학교에서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검암산에서 흘러내린 냇물이 마을을 좌우로 둘러싸고 흘러 마치 섬과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가운데 섬말이라고도 하며 약 30~40호가 모여산다.

동구동
1986년 1월 1일 시 승격과 함께 조례 제87호에 의하여 사노리와 인창리 일부를 합쳐, 동구릉의 이름을 따서 동구동이라 하였다.
행정동 명칭이다.

사노동
시 승격 당시 개편된 7개 법정동 중의 하나이다. 안말, 두레물골, 양지말, 언제말 등 네개의 마을이 원래 사노리였다.
태조의 건원릉을 만들 때 영월에서 부역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그대로 눌러 살았다고 하는데,
이때 지금의 안말에 박씨, 두레물골에 추씨
양지말에 주씨,
언제말에 엄씨 성을 가진
4명의 노인들이 부역이 끝나고 그대로 눌러 살아 사노리(四老里)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옛 족보 또는 옛 비문에는 사노리(沙老里)로 표기되어 있어
그 내용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건원릉 부역민의 일부 사람들이 마을에 남았다는 것은 사실이었을지 모르지만
'사노'를 네 명의 노인들과 연관시킨 것은 나중에 지어낸 이야기로 추정된다.
지금은 여덟 개의 마을로 되어 있다.

두레물골
안말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가운데에 단 한 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물을 마을사람들이 모두 식수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두레는 그 어원이 '두레박'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돌다'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태조 이성계의 장례에 부역으로 동원된 추씨가 정착한 곳이라 전해진다.

안말, 내동, 응달말
두레물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웃말과 아랫말로 나뉘어 있었다.
지금의 동구동 5통 지역이 웃말이었고
14통 지역이 아랫말이었다.
지금은 약100여 호가 모여 산다.
태조의 장례에 영월에서 부역으로 동원된 박씨가 남아 살았다고 전해진다.

양지말 두레물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을 향해 양지바른 곳에 있다.
태조건원릉을 조성할 때 영월에서 부역으로 동원된 주씨가 남아 살았다고 전해진다.

언제말, 언촌
양지말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태조 건원릉의 조영에 영월에서 부역으로 동원된 엄씨가 남아 살았다고 전해진다.

최촌(崔村)말, 간촌(間村)
베틀고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중엽부터 최씨들이 많이 살아 최촌말이라 하였다.
일제시대에 간촌으로 바뀌었으나, 아직까지 최촌말이라는 말이 남아 있다.

동구릉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을 비롯하여 여러 왕과 왕비의 능이 아홉개 있어 붙은 이름이다.
동구릉의 옛 명칭은 [영조실록] 33년 5월 18일 무신년조에 "호랑이가 동오릉(東五陵)에 들어갔으므로
군문(軍門)에 명하여 잡도록 하였다"는 데서 처음 나타난다.
[여지도서]에는 '육릉동'이라 표기되어 있고 1842년경 간행된 (경기지)에 있는 지도에는 '칠릉'이라 표기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동구릉'은 능이 새로 생길 때마다 시기별로 다른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동구릉으로 명칭이 정착된 시기는 1855년으로 추존왕 익종의 묘를 용마봉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9개의 능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주승민 | 작성시간 08.04.11 거~~참 이런역사를 간직한 고을인걸, 지기님 좋은 사료 고맙습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