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증산교사(汎甑山敎史)
홍범초 지음
- 서울 한누리, 1988
| 범증산교사(汎甑山敎史) 목차(目次) | |
| 선도교사(仙道敎史) 보천교사(普天敎史) 김태운(金太雲)의 미륵불교사 선도사(宣道史) 박인암교단사(朴仁菴敎團史) 순천교사(順天敎史) 문영상교단사(文瀛祥敎團史) 삼덕교사(三德敎史) 태극도사(太極道史) 인도교사(人道敎史) 동도법종금강도사(東道法宗金剛道史) 증산교사(甑山敎史) 보화교사(普化敎史) 정수산(鄭秀山)의 미륵불교사 | 증산법종교사(甑山法宗敎史) 모악교사(母岳敎史) 오동정교단사(敎團史) 무을교사-대한불교미륵종사 용화사사(容華社史) 청도대향원사(靑道大享院史) 대순진리회사(大巡眞理會史) 증산도사(甑山道史) 여타교단사(餘他敎團史) 一. 신언목(申彦穆)의 객망리교단사(客望里敎團史) 二. 김종열(金鐘烈)의 임무교사(任戊敎史) 三. 서상근(徐相根)의 교단사(敎團史) 四. 한병수(韓丙洙)의 인천교사(人天敎史) 五. 박인택(朴仁澤)의 원군교사(元君敎史) 六. 김태진(金泰振)의 교단사(敎團史) 跋文 人類의 將來 |
선도교사(仙道敎史)
| 선도교사(仙道敎史) 목록(目錄) | |
| 一. 창교주(創敎主) 수부(首婦) 고판례(高判禮)의 생장과 수부택정(首婦擇定) (1) 이모부(姨母夫) 차치구(車致久) 슬하에서 성장 (2) 차경석(車京石)이 천거한 수부(首婦) 二. 선도교(仙道敎)의 창립 (1) 초빈(草殯)에 전(奠)을 올림 (2) 대성(大聖)의 탄신치성(誕辰致誠)과 성령접응(聖靈接應) (3) 교단(敎團)의 개창(開創) 三. 조종골(祖宗里)교단의 창립과 신정(神政) (1) 조종골교단의 창립 (2) 법소(法所)의 건축 | 四. 통합교단(統合敎團)의 건설 (1) 통합교단(統合敎團)의 주재(主宰) (2) 은거(隱居)와 선화(仙化) 五. 교의(敎義)와 의식(儀式) (1) 계명 10조(戒銘十條) (2) 6대보은(六大報恩) (3) 오도수행요목(悟道修行要目) (4) 6화명심(六和銘心) (5) 수도제익요람(修道諸益要覽) (6) 봉도식(奉導式) (7) 일상(日常)의 심고(心告) (8) 주문(呪文) 六. 교서(敎書) |
| (사진) 창교주 수부 고판례 | AI 보정 사진(30대 모습) |
一. 창교주(創敎主) 수부(首婦) 고판례(高判禮)의 생장과 수부택정(首婦擇定)
(1) 이모부(姨母夫) 차치구(車致久) 슬하에서 성장
부인(夫人)의 성(姓)은 고씨(高氏)요 본(本)은 장택(長澤)이요. 이름은 판례(判禮)니
이조(李朝) 고종(高宗) 경진(康辰 1880)년 3월 26일 축시(丑時)에
전라도(全羅道) 담양군(潭陽郡) 무면(武面) 성도리(成道里)에서 탄생하였다.
부친은 덕삼(德三)이요, 모친은 박씨(朴氏)이다. (甑山敎史 220쪽)
박부인(朴夫人)이 기묘(己卯 1879)년 5월부터 어느 절에서 기도할 때
하룻밤 꿈에 높은 산에 올라 굉장한 집에 들어가니
한 선관(仙官)이 붉은 책과 누른 책 각 한 권씩을 주거늘
박부인(朴夫人)이 받아 가지고 놀라 깨었더니 이로부터 잉태하여 딸을 낳았다.
부인(夫人)이 나신지 여섯 달만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고
아홉 살에 모친을 따라서 정읍군(井色郡) 입암면(笠岩面) 대흥리(大興里)에 이사하고
이로부터 이모부 차치구를 쫓아 동학(東學)을 믿었다. (甑山敎史 221쪽)
고부인(高夫人)은 대홍리 신씨(申氏)의 집으로 출가하여 태종(太宗)이라는 딸을 두었는데,
스물 아홉에 상부(喪夫)하여 홀로 되었다. (朱判禮의 口述)
(2) 차경석(車京石)이 천거한 수부(首婦)
정미(丁未 1907)년 동짓달 초이튿날 대성(大聖)께서 순창(淳昌) 농바우로부터 태인(泰仁) 행단(否遭)에 이르사
차경석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일은 수부(首婦)가 들어야 되는 일이니,
네가 일을 하려거든 수부를 들여세우라 하시므로
차경석이 대성(大聖)을 모시고 돌아와서
그의 이종(姨從)누님 되는 고부인(高夫人)을 천거하였다. (大巡典經 3장 3절)
대성께서 고부인을 맞아 결혼하신 뒤에도
차씨(車氏) 집안에서는 이 사실이 신씨(申氏) 집안에 알려질까 눈치를 살피는 형편이었는데
대성께서 하루는 오셔서 밤에 마당 한가운데 청수를 올리시고
무슨 일을 하신 뒤에는 동리에서 수근거리는 일이 없어졌다.(朱判禮의 口述)
대성(大聖)께서 동짓달 초 삼일 날 고부인을 맞아 결혼하실 때
고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만나려고 15년동안 정력(精力)을 들였나니
이로부터 천지대업(天地大業)을 네게 맡기리라’(大巡典經 3장 31절)하시고
매양 고부인의 등을 어루만지시며
‘너는 복동(福童)이라 장차 천하사람의 두목이 되리라’ 하셨다.(大巡典經 3장 127절)
대성께서 하루는 종도(從徒) 10여인을 뜰 아래 늘여 세운 뒤에
고부인과 더불어 마루에 앉으사 차경석을 명하여 망치를 들리고
대성(大聖)과 고부인을 치며 동상례(東床禮)를 받으셨으며(大巡典經 4장 64절)
또 고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나이는 스물아홉이고 내 나이는 서른여덟이라
내 나이에서 아홉을 감하면 내가 너 될 것이요,
네 나이에서 아홉을 더하면 네가 나 될지니
곧 내가 너 되고 네가 나 되는 일이니라.’(大巡典經4장 64절) 하셨다.
또 하루는 대성(大聖)께서 반드시 누우신 뒤에 고부인으로 하여금 배위에 걸터앉아 칼로 배를 겨누며
‘나를 일등(一等)으로 정하여 모든 일을 맡겨 주시렵니까?’ 라고 다짐을 받게 하시고
허락하여 말씀하시기를
‘대인(大人)의 말에는 천지가 쩡쩡 울려 나가나니
오늘의 이 다짐은 털끝만치도 어김이 없으리라’ 하시고
이도삼(李道三) 임정준(林正俊) 차경석(車京石) 세 사람으로 증인을 세우셨다. (大巡典經 4장 66절)
위에 인용된 성훈(聖訓)으로 볼 때
대성(大聖)께서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主宰)하여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시는 권능(權能)을 가지시고
고부인을 수부(首婦)로 택정(擇定)하여 천지대업(天地人業)을 맡기신 것을 알 수 있다.
수부(首婦)란 보통사람들의 안목(眼日)으로 볼 때는
대성(大聖)의 부인을 일컫는 말이요
대성을 신봉하는 교인이 볼 때는
대성의 권능(權能)을 입어 대성과 대등(對等)한 자격으로 천지공사에 참여하여
천하 모든 여인(女人)의 권리를 천지공사에 반영시킨
천하 모든 여인의 머리가 된 분이다. (首婦論 2쪽)
대성(大聖)께서는 ‘내일은 수부(首婦)가 들어야 되는 일이니라·(大巡典經 3장 30절) 하셨고
또 ‘공사(公事)에는 수부가 있어야 하느니라.’(大巡典經4장 13절) 하셨다.
대성(大聖)께서 성도(成道) 하신 후 행하신 일이 천지공사이므로 대성께서 말씀하신
‘내 일은 곧 공사(公事)요, 공사(公事)는 천지공사의 준말이니
천지공사는 수부와 더불어 시작해서
수부와 더불어 행하여졌고
수부와 더불어 끝마치는 것이 되었다. (首婦論 3쪽)
二. 선도교(仙道敎)의 창립
(1) 초빈(草殯)에 전(奠)을 올림
기유(己西 1909)년 6월 24일 대성(大聖)께서 구릿골 약방에서 화천化天)하시니
종도들이 이 사실을 부인(夫人)에게 속이고
대성(大聖)께서 청국공사(淸國公事)를 보시려고 남경(南京)에 가셨다고 하였다.
대성(大聖)께서 화천하신지 오래지 않아 부인(夫人)의 안질이 다시 도져서 심히 고통하시니
경석(京石)과 윤칠(輪七)이 크게 근심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만 일심(一心)으로 주문(況文)을 외울 뿐이러니
얼마 아니하여 부인(夫人)의 안질(眼洪)이 절로 나았다.
하루는 경석(京石)이 김형렬(金亨烈)과 더불어 부안(按安) 변산(邊山)을 다녀와서 사랑에서 서로 의논하는 말소리가 들리거늘
부인(夫人)이 조용히 들으니 곧 다른 선생을 구하러 갔다가 헛걸음하고 온 이야기라
다녀온 일을 후회하고는 안내성(安乃成)의 집에 수련방(修珠房)을 차리고
내성(乃成)과 중선(重宣)과 더불어 태을주(太乙呪)를 읽는지라
부인(夫人)이 종도들의 이런 태도를 보고 크게 이상히 여겼다. (甑山敎史 227~228쪽)
이 뒤로 부인(夫人)이 태을주(太乙呪)를 읽더니 매양 취정(聚精)된 뒤에
흑 상여(喪黃)가 들어와 보이기도 하며 혹 들것도 보이며
혹 대성(大聖)의 손이 머리위로부터 내려와서 이마를 어루만져 보이기도 하며
저녁이면 혹 대성(大聖)께서 평시(乎時)와 같이 의관(衣冠)을 갖추어 들어오시기도 하였다. (甑山敎史 28쪽)
하루 저녁에는 대성(大聖)께서 훗중우와 푸단님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앉으시거늘
부인(夫人)이 일어나서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누구임을 물으니
곧 대성(大聖)의 음성으로 대답하시는지라
부인(夫人)이 이에 딸 태종(太宗)을 불러서 불을 켜라 하니
태종이 아랫방으로부터 올라와서 성냥을 그음에
대성(大聖)께서 불어서 꺼버리시고 다시 그으면 또 꺼버리사 이렇게 하여 성냥 두 갑을 다 그어 버린지라
대성(大聖)께서 이에 가만히 태종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곧 너의 아버지이니 아랫방에서 내가 왔다는 말을 하지 말라·하시고 누우시며
입으신 마고자에 빛이 찬란한 호박(號拍) 단추 3개 중 2개를 떼어서 부인(夫人)에게 주시거늘
부인(夫人)이 받아서 손에 쥐고 잤더니 날이 밝음에 깨어보니
대성(大聖)께서 계시지 않고 손에 쥐었던 호박단추도 보이지 않았다. (甑山敎史 228쪽)
경술(庚戌 1910)년 7월에 부인(夫人)이 오른발 용천혈(龍泉穴)에 독종(毒睡)이 나서
다리가 크게 부어 쑤시고 아파서 수십일(數十日) 동안 크게 앓더니
하루 저녁에는 누어서 정신없이 앓는 중에
문득 대성(大聖)께서 삿갓을 마루에 벗어 놓고 들어오사 말씀하시기를
‘네가 종기로 얼마나 고통 하느냐’ 하시고
친히 종처(睡處)에 싸맨 것을 풀으시고 혀로 종처를 핥으시니 즉시 통증(痛症)이 개이었다.
곤히 잠들었다가 이른 아침에 일어나니 종처는 나았으나
곁에서 주무실 줄로 믿었던 대성(大聖)께서 계시지 않거늘
경석(京石)과 집안사람들에게 대성(大聖)의 계신 곳을 물으니 아는 자가 없고 모두 이상히 여겼다. (甑山敎史 229쪽)
9월초 어느 날 저녁에 부인(夫人)이 주문(明文)을 읽더니
광명 속에 문득 대흥리(大興里)로 부터 구릿골까지 가는 길이 나타나며 구릿골 뒷산에 초빈(草殯)이 보이고 초빈(草殯)아래 모습에 시추물 묻은 것까지 보이므로 크게 의혹(疑惑) 하더니 그 이튿날 저녁에 문득 대성(大聖)께서 들어오사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었는데 어찌 나의 묻힌 곳을 찾아보지 않느냐’ 하시거늘 부인(夫人)이 아뢰기를 ‘어찌 상서(祚瑞)롭지 못한 말씀으로 희롱하시나이까’ 말씀하시기를 ‘내가 참으로 죽었노라’ 하시고 손으로 부인(夫人)의 등을 어루만지시고 팔을 잡으시며 이별가(離別歌)한 곡조를 크게 부르신 뒤에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가며 문득 보이지 않았다. 부인(夫人)이 크게 의혹하여 윤경(輪京)을 안내성(安乃成)의 집에 보내어 경석(京石)을 불러와 대성(大聖)의 종적(雖述)을 찾아가자하니 경석(京石)이 말하기를 ‘대성(大聖)께서 며칠 전에 남경(南京)으로부터 구릿골로 돌아오사 큰 공사(公事)를 보시는데 다만 한 사람만 출입하며 수종(隨從)들게 하시고 다른 사람은 누구든지 출입을 금하시니 그러므로 가 뵈옵지 못하나이다’ 하였다.
부인(夫人)이 할 일 없이 고민으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에 분(粉) 한 갑(匣)과 독약 한봉과 이왕(已往)에 대성(大聖)께서 주신 흰 바둑알 한 개와 진주(眞珠) 한 개와 총전(總錢) 7푼과 작은 백로지(白露紙)쪽 마른 것을 담은 엽랑(葉養)을 가지고 새벽빛을 타서 아무도 알지 못하게 사립문을 나서니 적막한 천지에 어스름이 남았고 북으로 터진 빈들에 찬 기운만 돌 뿐이었다. 삼십평생(三十平生) 첫 출입에 구릿골이 어디인지 방향을 알 바 없고 오직 전날 밤 광명 속에 나타났던 큰 길로 초빈 쪽을 바라고 가시니 걸음이 빨라져서 ■리를 한나절에 당도하였다. (甑山敎史229~230쪽)
경석(京石)은 부인(夫人)이 없는 것을 보고 이웃집에 물어도 아는 이가 없고 뒷들에서 새벽 일하던 농부가 말하되 ‘이른 새벽에 고부인이 정읍(井色) 통로로 급히 가는 것을 보았노라’ 하거늘 아우 윤칠(輪七)과 함께 급히 뒤를 쫓아 태인(泰仁) 도창(道昌) 고개 밑에 이르러 부인(夫人)을 만나게 되었다. 드디어 부인(夫人)의 몸을 수색(搜索)하여 독약을 빼앗고 이에 말하기를 ‘누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시나이까? 선생님이 지금 중대한 공사(公事)를 보시는 중인데 부르시는 명령이 없이는 절대로 오지 말라는 기별이 있으므로 아우도 이제까지 가 뵈옵지 못하고 부르시는 명령이 속히 있기만 고대하는 중이거늘 이제 졸연히 가 뵈이면 누님은 고사하고 아우에게도 큰 꾸지람이 있으려니 어떻게 감당 하시려나이까. 바라건대 이 길로 돌아가서 일간(日間)에 명령이 있기를 기다리사이다’ 간청하되 부인(夫人)은 굳이 듣지 아니하고 걸음만 계속하니 경석형제도할 수 없이 뒤를 따랐다. (甑山敎史 230~231쪽)
원평(院炳)에 이르러 윤칠(輪七)에게 명하여 약간의 주과포(酒果脯)를 준비하여 들리고 길을 버리고 밭두둑과 논두둑으로 걸어서 솔개봉밑 장뱃날에 올라 초빈 앞에 당도하여 윤칠(輪七)에게 ‘나래를 헤치라고 명하니 경석(京石)이 말하기를 ‘남의 초빈을 헤치다가 초빈임자가 바라보고 달려와서 힐난하면 어찌하렵니까? 바라건대 속히 돌아가사이다.’ 하며 굳이 간(諫)하되 부인(夫人)이 들은 체도 아니하고 몸소 헤치기 시작하거늘 경석(京石)이 할 수 없이 윤칠(輪七)을 명하여 초빈을 헤치고 널천개(天蓋)를 떼니 대성(大聖)의 용모는 아직 상하지 아니하였다. 부인(夫人)이 가지고 왔던 진주를 입술 안에 넣고 한 삼을 가슴에 덮고 그 위에 옥황상제(玉皇上帝)라 쓴 백로지 쪽을 덮고 천개(天蓋)를 다시 덮은 뒤에 준비하여 온 주과포(酒果簡)로 전(賣)을 올리고 초빈을 다시 봉(封)하였다. (甑山敎史 231쪽)
이때 김형렬(金亨烈)이 바라보고 종도 10여인과 함께 나와서 부인(夫人)을 맞아 들어갔다. 부인(夫人)이 형렬(亨烈)의 집에서 이틀 동안 쉬시고 경석(京石) 윤칠(輪七)과 함께 고부 와룡 신경수(申京洙)의 집에 이르니 마침 시아버지께서 오셨거늘 인하여 수일 동안 머무르다가 대흥리로 돌아왔다.
(2) 대성(大聖)의 탄신치성(誕辰致誠)과 성령접응(聖靈接應)
신해(辛家 1911)년 4월에 부인(夫人)이 차경석(車京石)과 유응화(柳應化)와 응화(應化)의 아들을 데리고 대원사(大願寺)에 들어가 대례복(大禮服)을 차리고 대성(大聖)의 성령(聖靈)께 혼례식(婚禮式)을 행할 때 만고장상(萬古將相)의 이름을 적어서 크게 점명(點名)하고 인하여 49일 동안 진법수련(項法修珠)을 행한 뒤에 고부 와룡 신경수(申京洙)의 집에 가서 100일동안 수련을 행할 때 딸 태종(太宗)이 수종들었다. 9월 중순에 대홍리로 돌아와 경석(京石)에게 열 아흐렛날 대성(大聖)의 탄신기념(誠辰記念) 치성을 올헐 것을 명하니 경석(京石)이 제수를 성비(盛備)하여 열 아흐렛날 새벽에 치성을 올렸다. (甑山敎史 232쪽)
스무날 아침에 부인(夫人)이 마당에서 거닐다가 혼도(昏倒)하여 너댓시간을 쓰러져 있는데 현황(炫煌)한 중에 큰 저울 같은 것이 공중으로부터 내려오거늘 자세히 보니 오색(五色) 과일이 고배(高杯)로 고인 것이었다. 가까이 내려와서는 문득 흩어져서 쏟아지거늘 놀래어 깨니 집안사람들이 둘러앉아서 애통하다가 부인이 깨심을 보고 모두 기뻐하였다. 부인(夫人)이 일어나 앉아 문득 대성(大聖)의 음성과 같은 음성으로 경석(京石)을 대하여 누구임을 물음에 경석(京石)이 자기의 성명을 말하였는데 또 무슨 생(生)임을 묻거늘 경진생(康辰生)임을 말하니 말씀하기를 ‘나도 경진생(康辰生)이라 속담(佑談)에 동갑(同甲) 장사 이 남는다 하나니 우리 두 사람이 동갑(同甲) 장사하자·하고 또 생일(生日)을 물으니 경석(京石)이 유월 초하루임을 말하니 다시 이르기를 ‘내 생일은 3월 26일이라 나는 낙종(落種)물을 맡으리니 그대는 이종(移種)물을 맡으라. 추수할 사람은 다시 있으리라’ 하였다. 이로부터 부인(夫人)은 성령(聖靈)의 접응(接應)을 받아 한 달 동안 신정(神政)을 행하였다.甑山敎史 223쪽)
스무 하룻날부터 날마다 마당에 청수를 떠놓고 물형부(物形符)를 받아서 불살을 때 경석(京石)이 대성(大聖)을 원망하여 말하기를 ‘부인(夫人)만 알고 제자(弟子)는 알지 못한다’ 하거늘 이에 경석(京石)을 명하여 부(符)를 받으라 하니 경석(京石)이 붓을 들고 오랫동안 엎드려 있으되 종시 부(符)가 내리지 않았다. 이 때에 박공우(朴公又)에게 기별(寄別)하여 술을 가져오라 하니 공우(公又)는 기유(己西1909)년 봄에 대성(大聖)의 명으로 술 서 말을 빚어 두었다가 대성(大聖)께서 다시 찾지 아니 하시고 화천하셨으므로 그대로 봉하여 두었더니 이제 부인(夫人)의 기별을 듣고 이상히 여기며 또 기뻐하여 신경수(申京洙)로 하여금 그 술을 메어 왔다. (甑山敎史 235쪽)
(3) 교단(敎團)의 개창(開創)
스무나흘날 경석(京石)에게 명하여 사인교(四人橋)를 빌려 오라 하더니 그 이튿날 침방(寢房)을 깨끗이 쓸고 차윤덕(車輪德)으로 하여금 방을 지키라 하고 경석(京石)의 한삼(拜彩)에 어명(尙命)이라 써서 입히시고 갓을 주물러 씌우며 말하기를 ‘너는 암행어사(暗行細史)라 암행어사는 폐의파립(算衣破法)으로 행동하여야 하느니라’하고 부인(夫人)이 사인교(四人構)를 타고 경석(京石)을 앞세우고 윤칠(輪七) 임정준(林正俊) 주낙범(朱洛範)을 데리고 길을 떠나 원평에 이르러 송찬오(宋餐五)의 집에 처소를 정한 뒤에 윤칠(輪七)을 명하여 ‘약장(藥藏)과 궤의 열쇠를 가지고 약방(藥房)에 가서 지켜라·하고 경석을 명하여 ‘짐꾼 세 사람을 데리고 가서 약장 궤 둥 약방기구 일체와 부벽서(附聲書)와 벽 바른 종이까지 모조리 떼고 방바닥에 먼지까지 쓸어서 가지고 오라’ 하였다.(甑山敎史 204쪽)
경석(京石)이 구릿골에 가서 형렬(亨烈)에게 온 뜻을 말하니 형렬(亨烈)이 말하기를 ‘내 딸은 사경(死境)에 임박하였노라’ 하며 약방기물(藥房器物) 가져가기를 허락치 아니하거늘 경석(京石)이 말하기를 ‘신도(神道)에서 결정된 일을 그대가 쫓지 아니하면 화(網)가 있으리라’ 형렬(亨烈)이 말하기를 ‘만일 신도(神道)에서 결정된 일 일진대 천지에서 징조를 나타낼 것이니 어떠한 징조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그대의 말을’믿지 못하겠노라’ 하였다. 이때에 부인(夫人)은 형렬(亨烈)이 듣지 아니한다는 기별을 듣고 양지(洋紙)에 해와 달을 그려 놓고 식지(食指)로 하늘을 향하여 지휘(指揮)하니 문득 청천(育天)에 벽력(露靈)이 일어나고 소낙비가 쏟아지며 번개가 온 집을 둘렀다. 형렬이 징조를 요구하다가 이 현상(現象)이 일어남을 보고 크게 놀래며 문득 마음에 ‘망하는 세간살이는 애체(愛鼎)없이 버리고 딴 배포(配布)를 꾸미라. 만일 아껴서 놓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몸까지 따라서 망하느니라.’·라는 대성(大聖)의 말씀이 생각나거늘 이에 경석에게 말하기를 ‘진실로 천의(天意)이니 마음대로 가져가라’ 하였다. (甑山敎史 234~235쪽)
이에 경석(京石)은 짐꾼에게 약장(藥藏)과 궤와 철연자(鐵硏子)와삭도(削刀)와 횟대와 부벽시(附堅詩)와 액자(領字)와 벽 바른 종이와 방바닥의 먼지까지 쓸어서 지니고 풍우(風雨)를 무릅쓰고 떠날 때 형렬에게 돈 20원을 주며 말하기를 ‘따님 병이 위중하다 하니 약소하나마 약값에 보태어 쓰라·하고 형렬을 작별하고 나와서 마을 앞 정문(推門) 거리에 이르니 풍우(風雨)와 뇌전(雷電)이 그치며 형렬의 집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형렬의 집사람이 달려와서 김부인(金夫人)이 사망하였다는 부고(計告)를 전하였다. (甑山敎史 236쪽)
모든 물건을 송찬오(宋餐五)의 집에 들여놓을 때 경석이 불평한 말을 내거늘 부인(夫人)이 발을 들어차니 경석이 눈을 맞아서 눈퉁이가 크게 부은지라 경석이 크게 앓으며 애걸하거늘 부인(夫人)이 뒤를 경계(警或)하고 청수에 면경(面鏡)을 담근 뒤에 그 물을 경석에게 먹이며 손으로 어루만지니 경석의 눈이 곧 나았다. (甑山敎史 236쪽)
스무 아흐렛날 아침에 형렬이 와서 부인(夫人)에게 딸 죽은 일을 아뢰거늘 부인(夫人)이 치상비(治喪費)를 후히 주고 태인(泰仁) 도듬실 유응화(柳應化)에게서 족두리와 원삼(元彩)을 빌어다가 새롭게 단장(月梅)하고 사인교(四人橋)를 타고 약장과 모든 물건을 짐꾼에게 지워 앞세우고 대홍리로 돌아와 약장과 모든 기물(器物)을 침방(寢房)에 봉안(奉安)하고 부벽시(附聲詩)는 벽에 부치고 벽 발랐던 종이는 뭉쳐서 천반자 위에 갚아두니 온 집안사람들이 놀래며 이상히 여겼다.
원래 대성께서 부인더러 ‘약장은 네 농바리가 되리라 하시고 또 신주독이니라’ 하셨는데 그 말씀이 응험(應驗) 되었다. 이에 부인(夫人)이 친자종도(親爽從徒)들을 소집(召集)하여 교단창립(敎團創立)을 선언하고 여러 종도들에게 명하여 포교에 종사(從事)케 하고 신경원(辛京元)과 김병욱(金秉旭)에게 명하여 태인장(泰仁場)에서 큰 소 한 마리를 사다가 기르면서 신정(神政)을 행하였다. (甑山敎史 236~237쪽)
하루는 부인(夫人)이 궤 위에 면경(面鏡)을 세워 놓고 다시 작은 면경(面鏡)을 그 면에 붙인 뒤에 경석으로 하여금 그 앞에 앉아서 주문(明文)을 읽으라 하니 경석이 주문(呪文)을 읽다가 불평을 냄에 문든 붙었던 면경이 떨어지거늘 경석이 놀래서 면경을 주워서 다시 붙이려 하되 붙지 아니 하였다. 경석이 부인(夫人)에게 아뢰니 부인(夫人)이 다시 붙여 놓고 신정(神政)을 행하더니 문득 폭우가 내려 큰 물이 져서 경석의 집도 침수되었다. 경석이 어려서부터 등이 굽어서 보기 싫더니 부인(夫人)이 주먹으로 경석의 굽은 등을 치며 ‘보기 싫다’ 하고 떡살을 잡아 일으켜 세우니 경석의 척추(齊維)에서 뚝소리가 나더니 이로부터 경석의 등이 곧아졌다. (甑山敎史 237쪽)
임자(王子 1912)년 7월 초 사흩날 부인(夫人)이 경석을 데리고 걸어서 청주(淸州) 만동묘(萬東爾)에 이르러 9월 초이튿날까지 날마다 치성을 행하더니 하루는 경석이 냇가 돌 위에 앉아서 주문(況文)을 외다가 낙상(落傷)하여 중태에 이르러 여러 날 동안 인사(人事)를 알지 못하고 누워 앓거늘 부인(夫人)이 주먹으로 경석의 등을 치며 꾸짖기를 ‘일을 다 보았는데 너는 어찌 정신을 차리지 아니 하느냐’ 하니 경석이 곧 나은지라 이때에 여비가 떨어졌거늘 경석이 먼저 돌아와서 여비를 주선하여 가지고가서 부인(夫人)을 모셔 왔다. (甑山敎史 237쪽)
친자(親炙) 종도들은 원래 대성(大聖)을 모셔 좋은 세상을 만나서 영화와 복록을 누리려는 희망으로 대성(大聖)을 따르다가 뜻밖에 대성(大聖)께서 화천하시므로 모두 크게 실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신해(辛亥 1911)년 9월부터 부인(夫人)이 신도(神道)로써 포정소(布政所)문을 열음에 모두 다시 발심(發心)하여 대홍리로 모여 와서 부인(夫人)을 모시고 교단을 창립한 뒤에 각기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포교에 힘쓰니 이로부터 교세(敎勢)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그 뒤 3년 동안에 전라남북도, 충청남도, 경상남도와 서남해중(西南海中) 모든 섬 일대(一帶)에는 거의 태을주(太乙呪) 소리가 연하게 된지라 갑인(甲寅 1914)년 순천 장기동(張基東)의 의연(義招)으로 교실(敎室)을 지어 비로소 본소(本所)의 면목을 세우니 이에 교세가 날로 흥왕하였다. (甑山敎史 238쪽)
| <참고자료> 고수부님의 최초포교 {인도교사 2:11} |
| 11. 증산(甑山) 신성님(神聖任)게서 화천(化天)하신 후(后)에 고부인(高夫人)이 3년간(年間) 태을주(太乙呪)을 익더니, 하로는 강령(降靈)이되며, 문답(問答)하여 왈(曰), 「고창(高敞) 무장면(茂長面) 덕산(德山)에 가서 포교(布敎)를 하라」 하심으로 월곡(月谷)을 불너 상의(相議)한 즉, 월곡(月谷) 왈(曰), 무장(茂長)을 잘 단이는 사람이 잇스니 알아본다고하며, 곳 일촌(一村)에 사는 안씨(安氏)에 문(問) 즉, 안동일(安東一)이라하는 사람이 덕산(德山)에 산다하기에 안씨(安氏) 소개(紹介)로 임자년(壬子年 1912) 11월(月)에 고부인(高夫人)이 월곡(月谷)과 함게 덕산(德山)에 가서 안동일(安東一)과 정윤식(鄭允植)을 포교(布敎) 하니라. |
| <참고자료> 유의경(柳宣卿)의 태을주(太乙呪) 수련(修鍊)으로 포교(布敎) {증산교사} |
| 놋점 유의경(柳宣卿)이 장티부스에 걸려서 죽게 되었더니 집안사람이 경학(京學)의 소문(所聞)을 듣고 찾아가서 시료(施療)를 청(請)하거늘 경학(京學)이 와서 밤에 청수(請水)를 올려 기도(祈轉)하고 태을주(太乙呪)를 외우니 의경(宣卿)의 병세(病勢)가 돌려져서 수일(數日)동안에 완쾌(完快)된 지라 의경(宣卿)이 경학(京學)에게 주문(況文)을 읽으므로 큰 병(病)이 치료(治療)되는 이유(理由)를 물으니 경학(京學)이 천사(天師)의 신성(神聖)하심을 말하여 신앙(信仰)의 길을 인도(引導)하고 인(因)하여 의경(宣卿)을 데리고 금산사(金山寺)에 이르러 미륵전(彌勒殿)에 치성(致誠)한 뒤에 구릿골약방(藥房)에 이르러 천사(天師)의 유적(遺績)을 참관(添觀)하고 수일(數日)을 머무를새 약방(藥房) 동편(東便) 문(門)지방하고 한가운데 벽지(壁紙)위에 십자형(十字型)의 칼끝흔적(療跡)이 문득 눈에 뜨이므로 의경(宣卿)이 이상(異常)히 여기어 칼끝흔적(療跡) 교차점(交艾點)의 네 귀를 떼여보니 그 속에 『봉명개훈(奉命開訓」 넉자(字)가 있는 지라 의경(宣卿)이 더욱 이상(異常)히 여기어 다른 곳을 두루 살펴보니 약방(藥房) 아랫목벽(壁)위에 또 십자형(十字型)인 칼끝흔적(療跡)이 있거늘 또 때어 보니 한자 길이나 된 큰 날 일자(日字)가 쓰여있었다。 의경(宣卿)이 집에 돌아와서 저녁청수(淸水)를 올리고 태을주(太乙呪)를 외우니 문둣 신안(神眼)이 열리며 기적(奇績)이 나타남에 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자(者)가 날로 많아져서 비로소 포교(布敎)가 개시(開始)되었으며 이로부터 태을주(太乙呪)를 읽으면 신(神)의 감화(感化)가 내리는 줄을 알게 되어 드디어 태을주(太乙呪)를 읽는 것으로 포교방법(布敎方法)을 정(定)하게 되고 종도(從徒)들도 이로부터 태을주(太乙呪)를 읽는 것으로 수련(修鍊)을 행(行)하기 시작하였으니 천사(天師)께서 「경학(京學)의 집에 대학교를(大學校) 설치(設置)한다」하시고 「 학교(學校)는 이 학교(學校)가 크리라」 하신 말씀이 응험(應驗)된 것이다。 {증산교사 3장} |
| 이 때에 유의경(柳宣卿)이 태을주(太乙呪)를 읽어서 신력(神方)을 통(通)하고 인하여 포교(布敎)가 많이 된다는 소문(所聞)이 들리거늘 경석(京石)이 부인(夫人)께 요청(要請)하여 신해년(辛玄年 1911) 사월(四月)에 부인(夫人)을 모시고 대원사(大願寺) 칠성각(七星閣)에 가서 사십구일(四十九日)동안 진법 수련(眞法修鍊)을 행하고 돌아왔다。 |
| ... 고부인(高夫人)이 모든 일을 안돈(安頓)한 뒤에 친자종도(親炎從徒)들을 소집(習集)하니 종도(從徒)들이 모여와서 부인(夫人)의 신통력(神通力)을 보고 모두 놀라며 이상(異常)히 여겼었다。 이에 고부인(高夫人)이 교단(敎団)을 창립(創立)한다고 선언(宣言)하고 대흥리(大興里) 경석(京石)의 집을 본소(本所)로 지정(指定)하고 여러 종도(從徒)들에게 명(命)하야 포교(布敎)에 종사(從事)케 하였다。 또 백남신(白南信)에게 천사(天師)께서 맡겨두신 돈 십만냥(十萬兩)을 들여와서 교단(敎團)의 운영비(運當費)로 쓰게하라 하니 남신(南信)이 듣지 아니하였다。 이로부터 종도(從徒)들은 유의경(柳宣卿)의 수련(修鍊)하던 방법(方法)으로써 포교방법(布敎方法)을 정(定)하여 각처(各處)에서 포교활동(布敎活動)을 일으키니 태을주(太乙呪)를 읽으면 광명현상(光明現象)이 나타나서 신력(神方)을 체험(體驗)하게 되는 일과 또 태을주(太乙呪)를 읽으면 난치(難治)의 질병(疾病)이 치료(治療)되는 일로 인(因)하여 포교활동(布敎活動)이 급속도(急速度)로 벌어져서 신도(信徒)들이 구름일듯이 모여들게 되었다。 {증산교사 4장} |
| <참고자료> 조철제(趙喆濟) 교단(敎團) 창설(創設) 준비: 증산교사 10장(神器 盜難事件) |
| 기미년(己未年) 여름에 철제(喆濟)가 따로 교단(敎團)을 창설(創設)하려고 획책(劃策)할 새, 유의경(柳宣鄕)이 철제(喆濟)에게 일러 가로대 「천사(天師)께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行)하사 운수(運致)를 뭉쳐서 약장(藥藏)과 궤(槪)에다 감아두셨으므로 차경석(車京石)도 이 신기(神器)를 얻은 연후(連後)에야 운수(運数)가 열려서 교단 창설(敎團創設)에 성공(成功)하였나니 그대도 교단(敎團)을 창설(創設)코저하면 먼저 계획(計劃)을 세워 이 신기(神器)를 도취(圖取)하도록 하라』하니, 철제(喆濟)가 이 말을 옳게 생각하였다。 철제(喆濟)는 심복부하(心腹部下) 권태로(權泰魯)•성정오(成丁五)•이정두(李正斗)•조용서(趙鑛端)•권영문(權事文)등 장정(壯丁) 여덟 사람을 순사(巡査)로 가장(假裝)하여 하여금 밤중에 본소를 습격(襲擊)하여 경석(京石)을 체포(逮捕)하려는 태세(態勢)를 보이며 가택수색(家宅搜索)을 행(行)하니 차윤칠(第輪七)이 나서서 사유(事由)를 묻거늘 방망이로 머리를 쳐서 대번에 혼도(背倒)케 하고 온집안이 소란(驗亂)한 틈을 타서 치성실문(致誠室門)을 열고 약장(藥藏)과 궤(體)를 도적(盜賊)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윤칠(輪七)이 정신(精神)을 차린 뒤에 치성실문(致誠室門)이 열렸음을 보고 들어가보니 약장(藥藏)과 궤(値)가 보이지 아니한지라 이에 순사(巡査)가 아니고 강도단(强盜團)임을 깨닫고 마을 사람들을 일으켜서 함께 뒤를 밟아서 쫓으니 태로일행(泰魯一行)은 짐이 무거워서 빨리 걷지 못하여 붙잡히게 되겠으므로 약장(藥藏)은 길가에 버리고 궤(體)만 가지고 돌아왔었다。 철제(喆濟)는 이렇게 궤(櫃)를 도적(盜賊)하여다가 감추어두고 선돌부인(夫人)과 부친(夫親) 용모(鑛謀)와 삼촌(三寸) 용서(鑛端)와 심복부하(心 腹部下)권태로(權泰魯)등과 더불어 교단창설(敎團創設)의 준비(準備)를 진행(進行)하였다. |
고부인(高夫人)이 신해(辛亥 1911)년 9월에 종도들을 소집하여 교단을 창설할 때
뚜렷한 교명(敎名)을 제시한 바 없지만 그 교도(敎徒)들이
태을주(太乙呪)를 읽는 교단이라는 뜻에서 세간(世間)에서 태을교(太乙敎)라 부르게 되었다.
후일에는 여기서 갈라져 나간 교단이나 이와 관련 없이
다른 종도들과 그 문인(門人)들이 세운 교단까지도 모두 태을교(太乙敎)라고 불러서
그 당시의 신문이나 책자(冊子)에 그렇게 일컬어왔는데
고부인이 대홍리 차경석의 집에서 창설하고 주재(主宰)했던 교단을
필자는 특별히 원태을교(原太Z敎)라 불러 태을교라는 교명(敎名)으로 불리워졌던 다른 교단과 구별하고자 한다.
원태을교는 종도들을 소집하여 교단을 창립한 것이 고부인이었고,
찾아오는 교도들의 숭앙대상(宗仙對象)이었으며 교단을 주재(主宰)한 것도 고부인이었다.
이 때 차경석은 대홍리 자기의 집이 본소(本所)로 지정되었고
교단의 안팎일을 총찰(總察)하여 차츰 상당한 인권(人權)을 쥐게 되었으나
교단의 주인공(主人公)은 고부인이었고,
차경석은 어디까지나 고부인을 보좌(補佐)하는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원태을교시대의 특징을 위와 같이 보면 원태을교의 존립(存立)기간은
고부인이 교단창설을 선언한 신해(辛亥 1911)년 9월부터
차경석이 통교권(統敎權)을 장악하여
병진(丙辰 1916)년 동지(往至)에 24방주(方主)를 임명하고
고부인이 거처하는 방에는 예문(禮門)이라 하여 주렴(珠傑)을 씌우고
누구를 막론하고 경석의 승낙 없이는 예문의 출입을 금한 때까지 5년 여간이었다.
병진(丙辰 1916)년에 원태을교에 입교했던 인춘식(印春植)은
입교 후에 태을교 두목으로 지목(指目)되어 취조(取調)를 받은 일이 있었다.
임술(壬戌 1922)년 2월 11일부터 2월 25일까지 발행된 동아일보의 태을교에 관한 기사 제목을 보면
그 당시 세상에 알려진 태을교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2월 11일자(字)의 ‘검거된 태을교인’,
2월 21일자(字)의 ‘괴교(怪敎) 태을 갑자(甲子)년 4월을 기해 계룡산(錯龍山)에 차황제(車皇帝)교도가 수십만에 달한다 하는 태을교의 내막은 어떤가’
2월 22일자(字)의 ‘후천(後天) 세계의 개벽과 옥황상제의 강세·, ‘천화(天火)를 탄(香)하고 잉태·,‘ 강일순(姜一淳)의 출생 전 하늘에서 큰 이적· 2일 껑일자(字)의 ‘풍설(風說)이 전하는 태을교 거병(去病) 해원(解免)의 신조·,
2월 24일자(字)의 ‘풍설이 전하는 태을교. 교주(敎主)의 사炳)와 대분렬(大分製),‘ 강일순의 수제자(首弟子)는 세 사람, 도통을 받은 차경석의 활동·, ‘역서식(歷書式)의 임원’ ‘독립당의 단체로 관헌의 검거엄중 종적 잃은 차경석’ 등등의 기사제목에서 [기사검색]
우리는 그 당시 사람들이 태을교의 실제내용을 모르고 다만 풍설에 의하여 괴상한 종교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태을교에 대한 인식은 임술(圭成1922)년 9월에 조선홍문회(朝購興文會)에서 발간하여 10판을 낸 조선제종교전(朝薦諸宗敎全)의 ‘조선 특유의 종교 태을교. 설명에도 마찬가지였다.
차경석이 병진(丙辰 1916년) 동지(冬至)에 24방주(方主)를 임명하여 교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 교도들이 고부인에게 참배하는 길을 막아놓고 다음 해 정사(丁已 1917년) 10월에 집을 떠나 4년 뒤인 신유(辛西1921)년 1O월 4일 다시 60방주(方主)를 확대 조직한 후에도 세상에서는 보천교(普天敎)라는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태을교라는 이름이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고부인이 개창한 최초의 교단인 태을교 곧 원태을교라는 이름이 얼마나 세상에 크게 떨쳤는가를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태을교(太Z敎)라는 교명(敎名)이 교단밖에서 붙여진 이름이었고 원태을교(原太Z敎)라는 명칭도 태을교라는 맥락에서 그 특징을 알아 본 것이었다.
그런데 교단 안에서는 교명을 정식으로 정해서 발표한 일이 없지만
교인의 수효가 늘어나면서 교조 증산대성(郞山大聖)의 교리가 선도(仙道)에 가깝다하여 선도교(仙道敎)라고 선전하였다.
원태을교 시대부터 선전되어 오던 선도교라는 교명은
고부인(高夫人)이 무오(戊午 1918)년 9월 19일
대흥리(大興里)를 떠나 김제군(金提那) 백산면(白山面) 송삼리(松森里) 천종서(千鍾瑞)의 집으로 옮겨간 후
조종골(祖宗里)에 새로운 교단이 세워지면서 이 교단이 선도교의 정통이라는 선전을 하게 되어
이러한 선전이 은연중에 교명이 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종골 교단의 간부의 한 사람이었던 고민환(高昊煥)은 선정원경(仙政圓經)이라는 책자를 써서
고부인(高夫人)이 세운 교단의 교사(敎史)와 교리를 밝히고 있고
이정립(李正立)은 신축(辛丑 1911)년 9월 동도교(東道敎) 및 증산계분파도(郞山系分派圖)에서
고부인(高夫人)이 세운 교단을 선도교(仙道敎)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근거에 의하여
필자는 고부인이 창립한 원태을교와 조종골 교단을 합해서 이를 선도교(仙道敎)라 부르고자 한다.
三. 조종골(祖宗里)교단의 창립과 신정(神政)
(1) 조종골교단의 창립
교단의 기초가 확실히 서게 되고 교세가 날마다 불어나는 것을 본 경석(京石)은 가만히 교권(敎權)을 움켜쥐려는 계획을 세워 먼저 종도(從徒)들과 교도(敎徒)들 사이에 이간(離間)을 붙여 연원(淵源)의 의를 끊게 하고 다음에는 부인(夫人)의 법소(法所)에 주렴(珠傑)을 걸어놓고 겉으로는 부인을 높이는 체 하며 실상(實相)은 부인과 참배하는 교도(敎徒)들 사이에 간격을 멀게 하니 이에 종도들은 경석의 야심을 간파(看破)하고 모두 분개(念熾)하여 더러는 교문(敎門)을 하직하고 물러가서 지방신도(地方信徒)들과 연락(連絡)하여 따로 문호(門戶)를 세우기도 하고 더러는 경석(京石)을 따돌리고 부인(夫人)의 법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甑山敎史 238~239쪽)
을묘(乙卯 1915)년에 김형국(金炯國)이 보성(寶城)지방 신도(信徒)들과 연락하여 부인(夫人)의 법소를 장성(長成) 필암(筆岩)으로 옮기려고 운동하다가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더니 병진(丙辰 1916)년에 이치복(李致福)과 채사윤(蔡士允)이 다시 각 지방 신도(信徒)들과 연락하여 법소를 원평(院呼)으로 옮기려고 운동함에 부인(夫人)도 또한 경석(京石)이 발호(跋扈) 하는 것을 불쾌히 여겨 치복(致福)의 운동에 동조(同調) 하더니 이윤수(李樹洙)가 경석(京石)의 부탁으로 부인(夫人)께 간(課)하고 강사성(姜±成)은 경석(京石)의 부탁으로 부인(夫人) 앞에서 치복(致福)의 허물을 들어 공격하니 이에 법소를 옮기려던 운동은 실패하게 되고 치복(致福)과 사윤(±允)은 할 일 없이 교문(敎門)을 하직하고 물러갔다.(甑山敎史 239쪽)
치복(致福)과 사윤(±允)이 떠남에 이 뒤로 본소(本所)에는 종도들의 자취가 끊어지고 오직 경석(京石)이 그 아우들과 더불어 부인(夫人)을 모시며 신도들을 응접(應接)하게 됐다. 경석(京石)이 이에 김형규(金炯奎) 문정삼(文正三)이하 심복신도L心服信徒) 스물 네 사람에게 방주(方主)의 임명장(任命狀)을 주어 각 지방으로 파견(派遺)하여 신도들을 수습(收鎔)하고 교권을 집중(執中)한 뒤에 신도(信徒)들의 부인(夫人)에게 참배하는 길을 막아버리고 정사(丁已 1917)년 10월에 경석(京石)이 유람의 길을 떠났다. 경석(京石)이 떠난 뒤에 부인(夫人)은 1년동안 신도(信徒)들을 만나지 못하고 한가한 세월을 보내다가 무오(戊午 1918)년 9월 열아흐렛날 대홍리를 떠나 김제군(金提那) 백산면(白山面) 송삼리(松森里) 천종서(千鍾瑞)의 집으로 옮겨갔다. (甑山敎史 240쪽)
무오년(戊午 1919년) 9월 열아흐렛날 부인(夫人)이 대흥리를 떠나서 김제군(金提那) 백산면(白山面) 송삼리(松森里) 천종서(千鍾瑞)의 집에 머무르더니 10월 중순(中句)에 강사성(姜士成) 강원섭(姜元燮)이 와서 부인(夫人)을 모시고 조종(祖宗)글 강웅칠(姜應七)의 집으로 가서 두류(退留)하게 하였다. (甑山敎史 20쪽)
(2) 법소(法所)의 건축
동짓달 스무 이튿날 부인(夫人)이 종도들에게 말씀하기를 ‘너회들이 수화(水火)중이라도 나를 따르겠느냐’ 다짐을 받고 스무 닷샛날 새벽에 치성을 올릴새 ·부인(夫人)이 잔(蓋)을 올리다가 신도에게 말씀하기를‘젯상(祭床)에 술방울이 몇 점(點)이나 떨어졌나뇨’ 신도들이 헤어보고 여쭙기를 *스물두점(點)이로소이다’ 또 묻거늘 다시 헤어보니 스물넉점이라 그대로 아뢰니 부인(夫人)이 말씀하기를 *그러하리라·하더니 오정(午正)쯤 되어서 순사(迷萱)들이 와서 강사성(姜±成)에게 부인(夫人)의 계신 곳을 묻는지라 응칠(應七)이 부인(夫人)께 아뢰기를 ‘반드시 화(視)가 있을 듯 하오니 잠깐 피하옵소서’ 말씀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순하게 받아야 뒷일이 없을지니 피*것이 불가(不可)하니라·하고 천연(天然)히 앉아있더니 얼마 아니하여 순사(迷±)들이 들어와서 부인(夫人)과 응칠(應七)을 체포하여 가니 대저 이때에 차경석의 간부 수 십 명이 목포(木浦)경찰서에 검거되어 모든 일을 부인에게 미루었으므로 드디어 부인을 체포하게 됐다.
부인이 응칠(應七)과 함께 정읍(井色) 경찰서에 구속되어 심문(審問)을 받은 결과 아무 증거를 잡지 못하여 응칠(應七)은 섣달 열 이튿날 석방되고 부인은 그 이듬해 기미(己未 1919)년 정월 초사흩날 석방되었다.(甑山敎史 240~241쪽)
이 먼저 강응칠(姜應七) 강사성(姜士成) 강운서(姜雲瑞) 강원섭(姜元燮) 양문경(梁文敬) 김재윤(金在允) 김봉우(金奉佑) 백용기(白龍起) 천종서(千鍾瑞) 박종화(朴鍾華) 서문백(徐文伯) 이용기(李用己) 등 열 두 사람이 법소(法所)를 짓기로 의논하고 각기 성의껏 연조(招助)하여 자금7백원을 모아 동짓달 16일 건축을 시작하여 기미(己未)년 7월 18일 낙성하고 부인(夫人)을 모시니 이로부터 부인(夫人)은 신도 두어 사람과 더불어 조용한 초당에 한가히 계시며 소작답(小作珞) 스물 너마지기를 붙여 농사나 감독하고 한 달에 한번씩 치성을 올릴 뿐이더니 기미(己未)년8월에 옥구(淚構) 근처에 괴질이 크게 유행하여 인명(人命)이 많이 죽는것을 보고 부인(夫人)께 찾아와서 의지하는 신도(信徒)가 점차 많아졌다.(甑山敎史 241~242 쪽)
전준엽(田畯燁)이 찾아오는 신도(信徒)를 수습하여 본소(本所) 유지의규율(規律)을 세울 것을 청하니 부인(夫人)이 허락하거늘 준엽(畯燁)이 고찬홍(高餐弘), 이근목(李根陸)과 의논하여 준엽(畯燁)과 근목(根陸)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일대(一帶)를 돌고 찬홍(餐弘)은 임피(臨破) 옥구(決構) 근처를 돌아서 9월 초닷샛날 본소(本所)로 모아 각 지방을 열다섯 구역(區域)으로 나누어 열네 치성을 갈라 맡게 했다. 찬홍(餐弘)이 포교 운동을 크게 일으키기를 청한대 부인(夫人)이 말씀하기를 ‘장차 너희들에게 찾아오는 사람만 가르치기도 바쁘리니 이제 새로 포교할 바가 아니요. 먼저 수신(修身)으로 근본을 삼아 부모를 잘 섬기고, 형제 간에우애(友愛)하며 남에게 척 짓지 말고 농사를 힘써 때를 기다리라. 포교에는 오는 자는 오는 대로보고 가는 자는 가는 대로 보아 그들의 뜻대로만 맡겨두라. 했다. (甑山敎史 242쪽)
경신(庚申 1920년) 8월에 고찬홍(高贊弘)이 와 뵙고 여쭙기를 ‘신망(神望)이 불여인망(不如人望)이라 하오니 인망(人望)을 얻으려면 어찌하오리까·, 부인이 말씀하시기를 ‘서쪽으로 가면 알 일이 있으리라’ 하거늘 찬홍(贊弘)이 이에 옥구(淚構) 서쪽으로 돌다가 박종오(朴鍾五)를 만나 함께 포교에 종사하니 이로부터 그 지방에 교세가 크게 일어났다.(甑山敎史 242~243쪽)
신유(辛酉 1921)년 대순절(大巡節) 치성에 참배한 신도가 100여명이라 부인이 초저녁부터 제수숙정(奈需蕭整)을 재촉하며 매양 바쁜 기색(氣色)을 띄고 치성을 마친 뒤에는 신도들에게 속히 돌아가라고 재촉하여 신도들은 정신없이 흩어져 돌아갔더니 이른 아침에 김제(金提) 경찰서 순사대(迷萱隊)가 와서 온 집안을 수색하고 돌아갔다. 대개 이 때는 왜정당국(隆政當局)에서 증산계(甑山系) 교단을 음모결사(陰課結社)라고 지목하여 크게 탄압하는 중이라 많은 신도가 모여 있으면 검속(檢束)을 면치 못할 것이므로 부인이 기미를 알고 미리 해산 시킨 것이다. 1O월 보름날 밤에 치성을 올릴 때 참배한 신도가 삼백여명이라 또한 당국(當局)의 주목을 끌게 되었더니 마침 안개가 천지를 덮어서 지척(巴良)을 분별치 못하게 되었으므로 모였던 신도들이 모두 무사히 돌아갔다. (甑山敎史 243쪽)
을축(Z丑 1925)년 9월에 고민환(高昊煥)이 큰 종기(陸氣)를 앓아 위독(危毒)하더니 마침 이웃마을에 사는 김내원(金乃元)이 부인(夫人)께와 꾀이니 부인(夫人)이 묻기를 ‘고민환(高昊煥)이 종기로 고통하느냐?’ 하거늘 내원(乃元)이 아뢰기를 ‘알지 못 하나이다’ 하니 부인이 돈3원을 내원에게 주며 ‘네 손이 곧 약손이니 이 길로 돌아가서 네 손으로 민환(昊煥)의 종처(陸處)를 만져주고 이 돈으로 개 한 마리를 사서 먹게 하라·한지라 내원이 돌아가 민환에게 가서 그대로 함에 민환의 종기가 완쾌하였다. (甑山敎史 245~246쪽)
병인(丙寅 1926)년 3월 5일 교인 오륙인이 모인지라 부인이 강응천(姜應千)을 불러 말씀하기를 금년에는 이종(移種)비가 없으리니 이제 너에게 신농씨공사(神農氏公事)를 붙여서 이종비를 빌게 하노라 하니 웅천(應千)이 일어나서 상사가(上已歌)를 부르며 이종하는 형용을 지으니 문듯 구름이 크게 일어나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일주야(一書夜)를 계속한지라 각 농촌에서는 이 빗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이종하게 되었다.(甑山敎史 246쪽)
3월 초여드렛날 부인이 콩씨를 가리더니 강운서(姜雲瑞)가 들어오거늘 묻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뇨. 아뢰기를 ‘운서로소이다. 다시 이름을 물으니 또 아뢰기를 ‘도석(道碩) 이로소이다. 하니 부인이 말씀하기를 ‘네 이름이 가장 좋도다’ 하고 이로부터 성령(聖靈)의 접웅(接應)을 받아 7월까지 신정(神政)을 행하였다. 아흐렛날 부인이 고찬홍(高餐弘) 전준엽(田慶傑) 둥 여러 교도(敎徒)들에게 말씀하기를 ‘세상 사람이 죄 없는 자가 없어 모두 제 죄에 죽게 되었나니 내가 이제 천하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서 건지리라·하고 청수 한 그릇을 떠놓고 그 앞에 바둑판을 놓은 뒤에 담뱃대로 바둑판을 치며 교도들을 명하여 태을주(太Z明)를 읽게 하더니 부인이 문득 혼도하여 한나절동안이나 기절하였다가 깨어나서 교도들에게 밖에 나가 하늘을 보라 하거늘 모두 나가보니 한자넓이나 되는 검은 구름이 하늘 남쪽으로 부터 북쪽까지 길게 뻗쳐 있었다. (甑山敎史 246~247쪽)
하루는 부인이 강원섭(姜元燮) 강사성(姜士成) 서인권(徐仁權) 서화임(徐化任) 이근목(李根陸) 등을 데리고 대홍리에 갈새 정읍군(井色都)우수면(雨水面) 초강리(楚江里) 연주평(延主炳) 박노일의 집에서 하루를 쉬고 이튿날 다시 떠나서 대홍리에 이르러 차경석의 집 옆 버드나무 아래교자(諾子)를 멈추고 차윤경(車輪京)을 크게 부르니 윤경이 이르거늘 교자 안으로 들어오라 명하되 윤경이 듣지 아니한지라 신대원(申大元)의 집에 처소를 정하고 그 이틈날 남복(男服) 교자(輯子)를 타고 경석의 집에 이르니 경석이 대문을 굳이 닫고 들이지 아니하며 여방주(女方主) 이달영(李達榮)이 나와서 손으로 부인을 치거늘 부인이 꾸짖기를 ‘1년도 살지 못할 년이 감히 이렇듯 무례(無禮)하냐’ 하더니 그뒤 정묘(丁卯1927)년 1월에 과연 달영(達榮)이 음독자살(欲毒自殺)하였다. (甑山敎史249~250쪽)
5월 초사흩날 석양에 교도들을 명하여 마당을 깨끗이 쓸게 하시고 부인이 겉은 붉고 안은 푸른 저고리를 입고 마당에 나와 서며 교도들에게 해를 보라 하거늘 모두 보니 햇가에 어리었던 붉은 기운이 띠모양으로 길게 뻗쳤거늘 모두 이상히 여겨 부인을 보니 부인이 오른손으로 붉은 옷고름을 들고 있더라. 부인이 말씀하기를 ‘이것이 표적(標的)이니라.하고 마당에 멍석을 펴게 한 뒤에 그 위에 누어 뒹구니 부인의 몸이 한번씩 궁그는 대로 해 한 개씩이 위해에서 빠져 나와 해 열 두개가 되어서 일자(一字)모양으로 하늘에 늘어 있는데 부인이 궁그며 저고리를 번갈아 뒤집어 입으니 저고리 빛이 붉을 때에는 붉은 해가 나오고 푸를 때에는 푸른 해가 나오는 것이었다. (甑山敎史 250쪽)
정묘(丁卯 1927)년 5월 스무날 오후에 부인이 경석의 집에 들어가니 경석이 맞아들이고 식교자(食橋子)를 올려 식사(食事)를 권하는 지라부인이 경석을 크게 부르니 경석이 말하기를 ‘내가 전날 경석이 아니요 이제는 만인(萬人)의 두목이니 전날과 같이 경홀한 말을 버리사이다. 하거늘 부인이 꾸짖기를 ‘네가 천자(天子)라 하나 헛천자(虛天子)니라. 하고 식상(食味)에 놓인 큰 배를 들어서 경석의 더숙이를 치니 경석은 문밖으로 피하여 나가고 여방주(女方主)들이 달려들어 부인을 끌어 내리는지라 부인이 이에 교도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甑山敎史 253쪽)
정묘(丁卯 1927)넌 5월 27일 부인이 고찬홍(高餐弘) 고민환(高昊煥) 박종오(朴鍾五) 강사성(姜±成) 등 열다섯 사람을 데리고 금산사(金山幸)에 가서 미록전(爾動股)에 치성하고 인하여 대적광전(大寂光股)에 재(需)를 올렬 때 부인이 담뱃대를 들어 천정을 가리키며 말씀하기를 ‘이 집은 중수(重修)하여야 하리라·하고 또 비로자나불(昆盧避那佛)을 가리키며 말씀하기를 ‘이 부처는 혼(塊)이 나갔으니 밥을 주지 못하리라·하고 그 앞에 차려놓은 제물을 걷은 뒤에 행례(行禮)하고 돌아올 새 교도들에게 말씀하기를 ‘이 뒤에 내가 금산(金山)에 두 번 더 와야 하리라. 하더니 이 뒤 사흘 만에 대적광전 대들보가 부러져서 무너지고 비로자나불이 부러져 이듬해에 고적보존회(古環保存會)에서 대적광전을 중수(重修)하였다. (甑山敎史 255~256쪽)
정묘(丁卯)년 정월에 보천교(普天敎)에 혁신운동이 일어나서 운동자임경호(林敬鎬) 이달호(李達滾) 임치삼(林致三) 등 수십 명이 서울로부터 대흥리에 이르니 차경석이 교도(敎徒) 수백명으로 하여금 경호 일행을 마주쳐서 중상을 입힌지라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고민환(高昊煥) 고찬홍(高替弘) 전준엽(田廢購) 강사성(姜士成) 문영희(文永熙) 김수웅(金壽應) 이근목(李根陸) 등을 데리고 정읍(井色)에 가서 경호 일행을 위문하고 치료비를 나누어주었다. 이 때에 부인이 손으로 경호의 상처를 어루만지더니 이 뒤에 경호가 신속히 회복되었다. (甑山敎史 259쪽)
정묘(丁께)년 8월에 부인이 고찬홍(高餐弘)을 원평(院呼)에 보내어 미륵불교(彌勒佛敎)에서 발기(發起)한 팔파연합회(八派聯合會)에 참가케 하였다. (甑山敎史 260~261쪽)
정묘(丁卯 1927)년 8월 21일 부인이 고찬홍(高餐弘) 전준엽(田嗤憐) 이근목(李根陸) 등 십여명을 데리고 금산사(金山孝)에 가서 미록전(爛動股)에 치성을 올린 뒤에 대성(大聖)의 성령(聖靈)이 이제 미특전(爾動股)을 떠나셨음을 선언하고 교도들에게 미록전(爾動般) 청바닥에 요강을 쏟으라고 명하였다. (甑山敎史 261쪽)
무진(戊辰 1928)년 정월 초사흩날 치성 끝에 부인이 혼도하였다가 서너시간 후에 일어나서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키며 휘두르거늘 고민환(高昊煥)과 박종오(朴鍾五) 등은 뜻을 알지 못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문득 ‘대성(大聖)의 영정(影順)을 그리라. 성화(星火)같이 재촉하는 지라 이에 김제군(金提那) 백구면(白罵面) 가전리(佳田里) 김옥현(金玉鉉)을 불러 영정을 그리니 옥현이 필법(筆法)이 졸열(抽宏)하여 잘 그려지지 못한지라 부인이 말씀하기를 ‘아직 그대로 봉안(奉安)하고 뒤에 다시 그림이 무방(無功)하리라·하므로 그대로 봉안(奉安) 하였다가3월 초하룻날 정읍군(井色那) 용북면(龍北面) 장군리(將軍里) 화사(畵師) 채용신(蔡龍巨)을 청하여 다시 그릴새 스무 나흩날까지 세 번 만에 부인이 방불(彼佛)하다고 감정(藍定)하여 스무엿세날 부인의 생신 치성에 봉안식(奉安式)을 거행하였다. (甑山敎史 261~262쪽)
무진(戊辰 1928)년 5월에 간부들을 불러 모은 뒤에 부인이 7항목(項日)의 계잠(或箴)을 반포(頒布)하니 아래와 같다.
l. 남에게 척 짓지 말라
2. 거짓말을 하지 말라
3. 자존심(自尊心)을 갖지 말라
4. 도적(盜賊)질 말라
5. 간음(姦淫)하지 말라
6. 무고(無故)히 살생(殺生)하지 말라
7.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말고 자기의 허물을 생각하여 천지에 사죄하라.
무진(戊辰, 西紀 1928)년 3월 고부인의 명을 받들어 채용신이 그린 증산교단 최초의 증산대성의 영정 (전수내력)
간부조직을 변경할 때 고민환(高昊煥)을 내무(內務)로, 고찬홍(高餐弘)을 서방(西方)으로, 강운서(姜雲瑞)를 북방(北方)으로 임명하니 응칠(應七)과 사성(士成) 등이 크게 불평을 품어 이로부터 본소에 발을 끊고 부인을 비방하였다. (甑山敎史 263~264쪽)
무진(戊辰 1928)년 9월 21일 부인이 교도 십여명을 데리고 대홍리에 가서 보천교(普天敎) 신건축(新建集)의 주위를 돌아다니며 담뱃대로 건물을 겨누어 사격(射擊)하는 모양을 행하고 돌아왔다. 대홍리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부용역(英容購) 앞 여관에서 점심을 잡수실 때 그 여관 접대녀(接待女)가 한편 팔이 불인(不仁)함을 보고 불러들여 그 까닭을 물으니 7년 전부터 우연히 한편 팔이 불인하여졌다 하거늘 부인이 앞에 앉히고 그 팔을 어루만지며 ‘몸이나 성하여야 하리라’ 하니, 즉시 그 팔이 나아서 밥상을 들고 나가게 된지라 사흘 후에 그 여자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부인께 올렸다. (甑山敎史 265~266쪽)
기사(己已 1929)년 정월에 모친 박부인(朴夫人)이 이질(鋼蔡)로 앓다가 마침내 부종(浮睡)을 일으켜 심히 위독한지라 부인이 박종오(朴鍾五)를 명하여 사물탕(四物場) 한 첩을 지어 오라 하여 모친의 머리 위에 두니 곧 병이 나았다. 7월에 고찬홍(高餐切)이 이상호(李祚昊)가 편찬한 대순전경(大逃典經)을 가져다 올리니 부인이 받아서 영정(影順) 앞에 올려놓고 탄식하여 말씀하기를 ‘이제 대성(大聖)의 성적(聖黃)은 편찬(編葉)되어 이로부터 참된 교리가 들어날 기초가 정하여 졌으니 다행한 일이로다. 그러나 나의 일을 기록 할 자는 누가 있으리오’ 하였다. (甑山敎史267~268쪽)
四. 통합교단(統合敎團)의 건설
(1) 통합교단(統合敎團)의 주재(主宰)
신미(辛未 1931)년 7월 그믐께 동화교(東華敎) 통정(統正) 이상호(李群昊)와 간부 조학구(趙簡九)가고 찬홍(高餐弘)과 함께 와 뵙고 여쭙기를‘듣사오니 대성(大聖)께서 사모(師母)께 세 살림을 하라 하시고 또 여러 종도(從徒)들에게 ’용화동(龍華洞)이 내 터니라‘ 하셨다 하심으로 제가무진(戊辰 1928)년 동지(冬至)에 여러 교우들과 함께 용화동에서 동화교를 창건하고 그 이듬해 기사(己已 1929)년 3월 열 여샛날 대순전경(大巡典經)을 편찬하여 진법(頁法)의 기초를 정하고 때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더니 이제는 대성(大聖)의 육순회갑을 당함에 비로소 사모(師母)께서 세 살림을 차릴 도수가 된 듯 하오니 청컨대 사모께서 용화동으로 법소를 옮기심이 옳을까 하나이다’ 하니 부인이 허락하고 먼저 대순절(大迷節)에 대성(大聖)의 영정을 모시고 용화동에 가서 회갑치성으로 올리고 그 뒤에 기회를 보아서 법소를 용화동으로 옮기게 하였다. (甑山敎史 275쪽)
9월 15일 상호(祚昊)가 임경호(林敬鎬)와 이성영(李成英)을 보내어 가뵙게 하니 但일 부인이 고찬홍(高餐弘) 이근목(李根陸) 박종오(朴鍾五)강재숙(姜在淑) 서인권(徐仁權) 등 십여인을 데리고 경호(敬鎬) 성영(成英)과 함께 대성(大聖)의 영정을 모시고 용화동으로 가서 열아흐렛날 새벽에 육순 회갑 치성을 올렬 때 부인이 ‘아동방 창생들아 천지운수 염려말고 마음심자 닦어보세. 마음 심자 닦고 보면 불로불사 아닐런가 좋을시구 좋을시구 우리시절 좋을시구’ 라고 노래 불렀다. 스무 하룻날부인이 상호와 여러 교도들에게 ‘이 길로 돌아가서 조종(祖宗)골 일을 정리하고 동지(섣至)치성에 아주 이사하여 오리니 그 동안 준비하라’고 부탁한 뒤에 영정을 모시고 돌아갔다. (甑山敎史 276쪽)
10월 2일 임경호(林敬鎬)와 이성영(李成英)이 가 뵙고 여쭙기를 대성(大聖)의 법언성적(法言聖環)은 이미 대순전경(大巡典經)으로 간행되었으나 사모(師母)의 언행(言行)은 아직까지 묻혀 있어서 세상에서 알지 못하므로 통정(統正)이하 여러 간부들이 의논하여 저회 두 사람으로 하여금 사모(師母)의 언행을 수집(鬼輯) 필기하여 편찬의 길을 열라 함으로 이제 그 사명(使命)을 띄고 왔나이다. 부인이 허락하고 모든 지난 일을 말씀하니 두 사람이 아흐렛동안 머무르면서 혹 부인께 직접 듣기도 하고 혹 교도들에게 듣기도 하여 모든 일을 필기(筆記)하였다. (甑山敎史 276쪽)
동짓달 초엿씻날 부인이 고찬홍(高餐弘) 이근목(李根陸) 전준엽(田破憐) 박종오(朴鍾五) 등을 동화교(東華敎) 본부에 보내서 부인이 동지절에 대성(大聖)의 영정을 모시고 용화동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신 뜻을 전하였다.
부인이 조종(祖宗)글 본소 건물은 강웅칠(姜應七)에게 넘겨주고 모든 일을 정리한 뒤에 신미(辛未 1931)년 동짓달 열사흩날 고찬홍(高餐弘)이근목(李根陸) 강재숙(姜在淑) 전준엽(田塵傑) 박종오(朴鍾五) 등 십 여인을 데리고 대성(大聖)의 영정을 모시고 용화동으로 이사하여 보름날새벽에 동화교 개교(開敎) 3주년 기념치성에 참배하고 참배 끝에 교도들에게 말씀하기를 ‘법(法)은 천사(天師)께서 내셨으되 용사(用事)는 내가 하노라’ 하고 ‘평천하운수(乎天下運數)요 평천하도수(乎天下度數)로다. 전국말세진시황(戰國末世奏始皇)은 평천하(平天下)한 연후(然後)에 만리장성(萬里長城) 쌓노라고 인석(人石)을 구사(楊使)하여 학정(廣政)이 자심(滋甚)함에 상극사배선천운수(相姐司配先天運數) 갈수록 극렬(劇烈)했네. 천사(天師)님의 신성법력(神聖法力) 제생의세(濟生醫世) 하신 후는 후천해원순천도(後天解姐|頂天度)로 상생도술무궁(相生道術無第)하리’ 라고 노래한 뒤에 따라온 교도들과 동화교(東華敎) 간부들에게 명하여 서로 악수하고 즐기게 하였다. (甑山敎史 277쪽)
치성 끝에 조종(祖宗)글 교단과 동화교를 합하여 통합교단을 조직할 때 부인의 주재하(主宰下)에 대교령(大敎領) 한 사람과 부교령(副敎領) 두 사람을 두어 교단을 운영하게 하고 대보(大保) 한 사람과 아보(亞保)찬보(餐保) 각 두 사람씩으로 구성된 보화원(保華院)을 두어 교무를 협찬하게 하니 대교령(大敎領)은 흥원표(洪元杓), 부교령(副敎領)은 이성영(李成英) 전준엽(田廢憐), 대보(大保)는 이상호(李祚昊), 아보(亞保)는 임경호(林敬鎬) 고찬홍(高餐弘), 찬보(餐保)는 김환(金九) 이근목(李根陸)을 각기 선임하였다. 이렇게 두 교단의 통합교단인 동화교가부인의 주재 하에 새로 발족하게 되니 대성(大聖)께서 부인께 부탁하신 셋째 살림이 이로써 열리게 되었다. 부인은 모든 일을 정돈한 뒤에‘대홍리에 가서 두어 달 동안 일을 보고 돌아오리라·하고 대홍리로 가서 미리 사두었던 집에서 두류하였다. (甑山敎史 278쪽)
무진(成辰) 기사(己已)년 간에 각 지방으로부터 대흥리와 그 근방 각 마을로 이사하여 온 보천교도(普天敎徒) 수천호가 모두 직업이 없어서 생계가 곤란하여짐에 차경석이 벽곡약방문(時殺藥方文)을 공포하여 벽곡(時殺)을 장려하다가 약독(藥毒)과 기아(機鐵)로 인하여 죽은 자가 많았었고 남은 자들은 모두 굶주림에 헤메이더니 부인이 대흥리에 우거(富居)함에 굶주린 교도들이 매일 수십인씩 와 뵙고 호소하거늘 부인이 낱낱이 후하게 접제(接濟)하였다. (甑山敎史 278~279쪽)
대교령(大敎領) 홍원표(洪元杓)는 사재(私財)를 내어 임신(壬申 1932)년 정월 스무날께 부터 용화동에 부인이 거주할 집을 짓기 시작하여 3월 보름께 낙성(落成)하였다.3월 보름께 부인이 채유중(蔡有中)을 용화동에 보내어 ‘정읍(井色)일을 다 보았으니 스무날 돌아가겠노라’라고 기별하거늘 열아흐렛날 이성영(李成英)이 부인을 모시러 대흥리에 가니 이날 저녁에 부인이 성영(成英)으로 하여금 차경석의 집을 향하여 서게 하고 신정(神政)을 행할 때성영(成英)에게 말씀하기를 ‘경석이 이제 천사(天師)를 배반하고 수백만교도의 전정(前程)을 그르치니 어떻게 조처함이 옳겠느냐. 성영(成英)이 여쭙기를 ‘배은망덕만사신(背恩忘德萬死身)이라 하였사오니 죽어야 마땅할까 하나이다’ 또 말씀하기를 ‘수백만 교도의 피를 거두어 지어 놓은 것이 마침내 허사로 돌아가니 어떻게 조처함이 가(可)하겠느냐’ 성영(成英)이 아뢰기를 ‘허사로 돌아갈진대 뜯어버림이 마땅할까 하나이다’부인이 세 번씩 물어서 다짐을 받은 뒤에 말씀하기를 ‘선(善)도 오세(五藏)요, 악(惡)도 오세(五藏)니라’ 하며 발로서 성영(成英)의 다리를 차니 성영(成英)이 엎드러졌다. 이 뒤 5년 뒤인 병자(西子 1936)년에 차경석이 사망하고 대건물(大建物)도 모두 뜯겨버렸다. (甑山敎史 281쪽)
스무날 부인이 교도들을 데리고 용화동으로 와서 신축(新葉)한 집에 거주하면서 동화교의 교무를 주재하였다.
(2) 은거(隱居)와 선화(仙化)
계유(癸西 1933)넌 동짓달 초엿샛날 부인이 용화동으로부터 오성산(五聖山) 수양소(修養所)로 옮기어 은거휴양(憶居休養) 하니 한가한 구름만 산 빛에 파란곡절이 많던 세 살림의 경로(經路)가 추억에 남을 뿐이오 담박(淡伯)한 생애와 그윽한 흥취는 고요한 세월에 잔생(殘生)의 쾌락을 누리게 된지라 고민환(高昊煥) 박종오(朴鍾五)가 시봉(待奉)하여 안팎일을 보살피고 익산(益山) 완주(完州) 임피(臨破) 옥구(淚構) 등지교도들이 종종 와서 문후(問候)를 올릴 뿐이었다. (甑山敎史 288쪽)
갑술(甲戌 1934)년 정월 초사흘날 완주군(完州那) 조촌면(助村面) 화전리(花田里) 김석배(金石培)의 모친과 익산군(益山那) 북일면(北一面)영등리(永登里) 김성녀(金姓女) 두 사람이 와 뵙고 여쭙기를 ‘익산군(益山都) 왕궁면(王宮面) 광암리(光岩里) 송병우(宋炳雨)의 처(棄)가 혈적병(血積病)으로 수십년동안 고통하여 사경(死境)에 이르렀사오니 고쳐주시옵소서’ 하거늘 부인이 말씀하기를 ‘너희 두 사람이 가서 치료하여보라. 너희들의 성심을 이번에 시험하리라’ 하니 두 사람이 환자(惠者)의 집에 가서 치성을 올리게 하고 일심(一心)으로 기도하니 사흘만에 그 병이 완치되니라. 열사흘날 박종오(朴鍾五) 김수열(金壽烈) 채유중(蔡有中)을 용화동에 보내어 이성영(李成英)에게 전달하여 말씀하기를 ‘내가 오성산(五聖山)에 온 뒤로 몸이 편치 못한지라 생각하여 보니 영정을 모셔 오지 아니한 까닭이라. 너희들은 반드시 영정을 개사하여 받들지니 이 영정은 내가 다시 받들겠노라’ 하고 영정을 모셔갔다. (甑山敎史 288~289쪽)
거년(去年) 가을에 수양소(修養所)를 건축(建案)할 때에 경비가 부족하므로 이진묵(李項默)이 할 일없이 옥구(決構) 서면지방(西面地方)으로 유리(流離)하다가 두어 달이 못되어 뜻밖에 돈벌이가 생겨서 기왕(跳往)보다 풍족히 지내게 되거늘 부인이 듣고 말씀하기를 ‘박절함을 혐의하여 그대로 두었으면 진묵(員默)은 평생 곤궁을 면하지 못하겠으므로 내가 녹(橫)줄을 부쳐서 내어보냈노라’ 하였다 (甑山敎史 290쪽)
9월 초이렛날 친자종도(親爽從徒) 김경학(金京學)과 김영학(金永學)이와 뵙고 말씀하기를 ‘저희들이 모악(母岳)산 물왕암에서 수련을 행하던 중에 대성(大聖)의 성령(聖靈)이 나타나셔서 수십년동안 사모(師母)님과 막혀 지낸 것을 꾸짖으시고 이 길로 가서 너의 사모(師母)를 모셔다가 모든 지난 일을 타파(打破)하고 이전 정의(情誼)를 다시 계속하지 아니하면 화(神)가 있으리라고 정령(可摩)히 계시(聲示)하시므로 저희 두 사람이 일동(一同)을 대표하여 왔사오니 사모(師母)께서는 저희들의 이전과실을 깊이 용서 하시고 함께 가셔서 앞으로 사흘 동안 수련법석(修敎法席)을 주재(主宰)하여 주시옵소서’ 하며 추회(追悔)의 눈물이 비오듯 하거늘 부인이 말씀하기를 ‘지난 일은 한갓 꿈과 같을 뿐이거늘 칠십노인이 멀리와서 이렇듯 간곡히 말하니 내가 비록 건강이 허락지 못할지라도 멀리 할 수 없노라’하고 두 사람을 따라 물왕암에 가니 곧 박공우(朴公又)의 주창(主唱)에 따라서 김경학(金京學) 김영학(金永學) 이중성(李重盛) 내외, 이성영(李成英) 김수응(金壽應) 등이 모여서 진법(頂法)을 수련(修珠)하는 법석(法席)이라 부인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사훌 동안을 머물다가 법석(法席)이 파함에 열하룻날 금산사(金山考)에 들려서 용화동에 이르러 이틀 동안 머무르며 개사(改寫)한 영정(影順)이 많이 틀렸음을 지적하며 다시 개사(改寫)하라고 명하고 열 사흗날 용화동을 떠나 돌아갔다.(甑山敎史 291~292쪽)
을해(Z亥 1935)년 2월 초사흔날 김제군(金提那) 용지면(龍池面) 예림리(禮林里) 황경수(黃京洙)가 천연두(天然短)를 앓아서 위독하더니 백구면(白鴻面) 가전리(佳田里) 김도성(金道成)과 조승기(趙承基)의 모친이 가보고 곧 부인께 심고(心告)한 뒤에 시천주(待天呪)를 한 시간쯤 읽으니 그 병이 곧 나았다.
교도(敎徒)들이 처음으로 와 뵈이면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몸에 병이 있으면 그 병을 낫게 하며 또 그 사람의 전정(前程)에 모든 장애(障得)를 제(除)하여 준 뒤에 비로소 따름을 허락 하였다.
10월 초닷샛날 저녁에 부인이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뒤에 요(梅)위에 누워 민환(昊煥)을 불러들여 머리 위에 앉히고 두어시간 후에 문득 말씀하기를 잘 꾸리고 있으라 하거늘 민환(昊煥)이 무슨 뜻임을 물으니 대답지 아니하고 또 말씀하기를 ‘증산(郞山)이 오시면 나도 올것이오, 내가 오면 증산(甑山)도 오시리라’ 하더니 조금 있다가 ‘벌써 오실 때가 되었는데’라고 세 번 거듭 말씀한 뒤에 눈을 감고 선화(仙化)하니 새벽 두시라 이 때에 모신 사람은 민환(昊煥)과 박종오(朴鍾五)와 식모 이길수(李솜守)였다. 날이 밝음에 수의(壽衣)를 수습(收松)하니 이미 꺼내어 횃대에 걸어놓은 것을 보았다. (甑山敎史 294쪽)
각처 교도들에게 부고(計告)를 보내니 고찬홍(高餐弘) 이진묵(李員默)전선필(田先必) 문명수(文明洙) 문기수(文基洙) 이중진(李中頂) 김내언(金乃彦) 유일태(劉日太) 오수엽(吳守憐) 이재균(李在均) 조학구(趙簡九) 등이 달려와서 치상(致喪)하여 스무여드렛날 오성산(五聖山) 봉웃재에 장사(非事)하였다.
五. 교의(敎義)와 의식(儀式)
남주(南升) 이정립(李正立)은 그의 저서 고부인전(高夫人傳)에서 고부인(高夫人)이 교단을 창립하고 관여(關與)했던 시대를 셋으로 나누어 제1교단시대는 고부인이 신력(神力)을 통하여 종도들을 소집하여 교단을 창립한 신해(辛亥 1911)년 9월 19일부터 차경석(車京石)이 24방주(方主)를 임명한 병진(丙辰 1916)년 11월 동지(冬至) 이후에 고부인의 처소를 예문(禮門)이라 하여 문안조차 막은 뒤에 무오(虎午1918)년 9월 19일고부인이 대흥리(大興里)를 떠나 김제군(金提那) 백산면(白山面) 송삼리(松森里) 천종서(千鐘瑞)의 집으로 갈때까지 7년간올 말하고 제2교단시대는 고부인이 조종(祖宗)골에 들어 와서 교단을 창립하여 교화해 나가다가 신미(辛未 1931)년 11월 14일 용화동(龍華洞)으로 이거(移居)하기 까지 13년간을 말하는 것이며 제3교단시대는 고부인이 용화동에서 계유(癸西 1933)년 11월 6일 전라북도(全羅北道) 임피군(臨破都) 오성산(五聖山) 수양소로 떠나기까지 머물던 만 2년간을 말한다.
고부인(高夫人)은 증산대성께서 행하시던 신도(神道)의 법방(法方)과 비슷한 방법으로 교단을 창설하고 교주(敎主)로서 받들어졌기 때문에 교의(敎義)와 의식(嚴式)도 그러한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제1교단시대는 고부인과 보천교(普天敎)를 창립한 차경석(車京石)종도와의 관계가 얽혀 있고 제3교단시대는 동화교(東華敎)와의 통합교단이기 때문에 선도교(仙道敎)의 순수한 교의와 의식을 살펴보려면 독자적으로 교단을 운영했던 제2교단 시대를 살펴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제2교단시대의 교의와 의식을 비롯하여 그 당시 교단의 상황(狀況)을 알 수 있는 기록에는 제2교단시대의 고부인을 보좌하고 아낌을 받았던 고민환(高昊煥)이 저술한 선정원경(仙政圓經)이 있다.
(1) 계명 10조(戒銘十條)
고민환(高旻煥)은 선정원경(仙政圓經)에서 증산대성(郞山大聖)의 칭호(稱號)를 건존증산(乾尊甑山)이라 하고 고부인(高夫人)의 칭호를 곤존고씨(坤尊高氏)라 하여 양위(兩位)를 동등하게 받들었다.
고부인이 교도(敎徒)들에게 가르친 계명10조는 아래와 같다.(원문링크)
물위투도(勿爲偸盜) - 도둑질 하지 말라
물위간음(勿爲姦淫) - 간음을 하지 말라
물위작척(勿爲作戚) - 척을 짓지 말라
물위시기심(勿爲猜忌心) - 시기를 하지 말라
물위망언(勿爲忘言) -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물위기어(勿爲綺語) - 말을 꾸며서 하지 말라
물위자만심(勿爲自慢心) - 자만심을 갖지 말라
물위도박(勿爲賭博) - 도박을 하지 말라
물위무고살생(勿爲無故殺生) - 함부로 죽이지 말라
물위과다음료(勿爲果多飮醪) - 술을 너무 마시지 말라
위의 고부인의 계명 10조의 오른편 풀이는 필자가 한 것이다.
위와 같은 계명을 통하여 고부인은 교도들의 신앙을 바르게 잡아 나갔던 것이다
(2) 6대보은(六大報恩)
이 6대 보은은 고민환이 고부인의 말씀을 정리한 것으로 보여 진다.(원문링크)
1. 천지보은(天地報恩)
천지(天地)가 우주만유(宇富萬類)가운데 오직 사람에게만 천품(天喪)을 주어 무궁무극무량(無第無極無量)의 대복(大福)으로 생명(生命)을 지속보존(持續保存)하는 은혜를 아는 것이다.
2. 일월보은(日日報恩)
일월(日月)이 사시질대(四時狀代)로 기후를 조절하여 만물(萬物)을 생성(生成)케 하고 명암광휘(明暗光輝)케 하여 만사만리(萬事萬理)의 요도(要道)에 무량(無量)한 공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3. 부모보은(父母報恩)
부모가 나에게 만물의 영장(덜톨長)의 근본이 되는 형체(形體)를 주셨고 회건취습(回乾就恨)과 열고토감(O因苦址首)하시고 유포양육(孔爛養育)하사 인생요도(人生要道)를 교양(敎養)한 공을 아는 것이다.
4. 사교보은(師敎報恩)
스승이 오직 인도(人道)의 범절(凡節)을 설효(說曉)하여 인류사회(人類社會)에 만능(萬能)을 장려지준(慶劇指連)한 공을 아는 것이다.
5. 군왕보은(君王報恩)
통치(統、治)하는 자리에 있는 이가 천명(天命)을 받들어 성정만화(聖政萬化)를 베풀어 강역(弼域)을 수호(守護)하고 여민(黎民)을 보호한 공을 아는 것이다.6. 신농씨보은(神農氏報恩)
신농씨가 인지미개시대(人智未開時代)에 농공의약(農工醫藥) 제반(諸般)을 시설(施設)한 공을 아는 것이다.
(3) 오도수행요목(悟道修行要目) (링크)
1. 명심견성(明心見性)
2. 파사현정(破邪顯正)
3. 기망취진(棄忙就眞)
4. 폐악수선(廢惡修善)
5. 관선징악(觀善徵惡)
6. 내원해인(耐恐害忍)
7. 안수고인(安受苦忍)
(4) 6화명심(六和銘心)
1. 신화동주(身和同住)
2. 구화무쟁(口和無諍)
3. 의화무위(意和無違)
4. 견화동해(見和同解)
5. 계화동준(戒和同連〕
6. 이화동균(利和同均)
(5) 수도제익요람(修道諸益要覽)
수분양이궁궁거(水分養願算算居)하고 초석궁신심자타(草席己身心自受)라
광풍낙화홍진중(狂風落花紅塵中)이라도 수계지심(守或持心)이면사불침(那不恨)이로다.
대인접화물망어(對人接話끼홀語)하고 행독경이처신비(行罵敬而處身單)하라. 명호(嗚呼)라 세인물실시(世人功失時)하라 일몰천인(一沒千仍)이면 갱무출(更無出)이니 선후전환불구격(先後轉換不久隔)에 세사분운청룡해(世事約紅育龍解)를 세인(世人)은 부지허무중(不知虛無中)이라, 허무중재신비공(虛無中在神秘功)을 탐관모리유하익(祝官課利有何益)고 휘동분신사지구(揮健齊身死地求)라 무항신심(無桓信心)이면 심신번(心神朝)이니 단전주심항불이(月田住心桓不移)하소.신목(神目)은 여전娘口前)하여 찰전후(察前後)Sf고 천령(天靈)은 팡범(廣範)하사감좌우(盡左右)로다. 진위불분(頂隨不分)하여 사경규(四境幾)는차시부지근원리(此是不知根源理)로다. 신중유신하신위(神中有神何神謂)며 법중유법하법칭(法中有法何、法稱)고 천지인신통재신(天地人神統在神)이니 유아도중삼신위(唯我道中三神位)라. 천존지폰인폰위(天尊地尊人尊位)에 삼존정위개법신(三尊定位皆法神)을 선천겁세수명단(先天助世壽命短)이되 후천선세무량장(後天仙世無量長)을 선지포태조화신(仙之服船造化身)을 미록성령자비호(爾動聖靈惡悲護)라. 천지사명불가피(天地司命不可避)니 우주만류각유직(宇富萬類各有職)이라. 만방질병흔돈시(萬郭我病混河時)면 각자수분의업통(各者修分醫業統)을 신술묘법임의용(神術妙法任意用)하여 광제창생만복형(廣濟蒼生萬福亨)을 기연포덕태을고(其然布德太Z高)요. 세계화장일점중(世界華莊一舊中)을 시유길저무행사(時有吉藍無行事)면 차시역이무도리(此是亦而無道理)라. 장신사명순도가(將神司命迷道家) 적정무례(寂靜無禮)면 범연과(凡然過)를장신회향도솔궁(將神回向兒率宮)하여 묵고상주천존전(默考上奏天尊前)을 무명무실무영적(無名無實無影助)이면 용인지시무참조(用人之時無參照)를 기연이오둥도아제익(其然而音等道雅諸益)은 근행성경신(動行誠敬信)하여 수기도직형야(守其道職形也)로다. (仙政圓經 118~119쪽)
(6) 봉도식(奉導式)
고민환(高昊燦)은 선도교(仙道敎)의 봉도식을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아래와 같은 위패(位牌)를 모시고 ‘먼저 제수(奈需)를 진설한 후에 분향명촉하고
청수봉헌 초헌(初熾) 법배사례(法拜四禮) 사수(師首)의 봉도축사(奉道祝群)
아헌(亞熾) 법배사례(法拜四禮)
종헌(終熾) 24절후주(節候況) 4송(調), 태을주(太Z況) 三 ·七송(調) 법배사례(法拜四禮) 음복(欲服)한다’
萬 尊
法 聖
化 大
權 法
姜 高
聖 聖
上 后
帝 妃
聖
靈
之
位
(7) 일상(日常)의 심고(心告)
일일삼성(一日三省)하여 봉헌청수(奉職淸水)하고 단전주심(月田住心)하여 아래와 같이 심고(心告)한다.
‘만법화권(萬法化權) 강성상제(姜聖上帝) 존성대법(尊聖大法) 고성후비(高聖居旭) 양위천폐휘하시신(兩位天陸魔下待臣)
모성명(某姓名) 과거죄업(過去罪業)은 사(敬)하여 주옵시고
대자대비(大孫大悲)하사 활연관통(鎔然貴通) 광제창생(廣帝蒼生)케 하여 주옵시기를
복원(供顧)이오며 양위천폐(兩位天暗)께옵서 종속강탄(從速降鼓)하시와
도탄중중생(童俠中聚生)을 제도(濟漢)하여 주옵시기를
천만돈수백배복원(千萬煩首百拜供顧)이로소이다’ (仙政圓經 121쪽)
(8) 주문(呪文)
본교(本敎)에서 읽는 주문(呪文)과 글은 아래와 같다.(링크)
1. 절후주(節候呪)
2. 태을주(太乙呪)
3. 시천주주(待天主呪)
4. 진액주(진法呪)
5. 칠성경(七星經)
6. 관성주(關聖呪)
7. 지신주(地神呪)
8. 서전서문(書傳序文)
9. 대학우경장(大學右經章)
10. 주역서문(周易序文)
11. 64괘명(六十四封名)
12. 진법주(眞法呪)
13. 개벽주(開關呪)
14. 해인주(海印呪)
15. 갱생주(更生呪)
六. 교서(敎書)
본교(本敎)의 종교사상을 엿볼 수 있는 교서는 아래와 같다.
번호 교서명 저자 간행년월일 쪽수
1 선정원경 고민환 140(절판)
2 고부인신정기 이정립 도기93 간지癸卯 서기1963 월일12,22 133(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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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