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日山居 여름날 산에 머물다 魚玄機(당나라의 여류시인)
移得仙居此地來 신선이 노니는 곳을 이 땅으로 옮겼을까?
花叢自徧不曾栽 전에 심지 않았건만 꽃떨기는 절로 핀다
庭前亞樹張衣桁 뜰 앞의 나무 등컬에 옷가지를 걸쳐놓고
坐上新泉泛酒杯 신선한 샘물 위에 앉아 술잔을 띄워본다
軒檻暗傳深竹經 처마 난간은 깊은 대숲에 은밀히 이어지고
綺羅長擁亂書堆 고운 비단엔 늘 어지러이 책이 쌓여 있다
閒乘舫書吟明月 한가로이 배에 올라 밝은 달에 시를 읊고
信任輕風吹卻回 산들바람 부는대로 맡겨 노닐다 돌아온다
어현기의 심지가 광풍제월이로다
결이 닮은 서구 시 원문 몇 편을 번역해주고
그대도 짦은 영시 한 수 읊조려보게나
어현기, 곧 魚玄機의 이 시에는 속세를 떠난 은일(隱逸)의 정취와 더불어, 여성 시인 특유의 섬세한 감각이 함께 배어 있네.
산중의 집, 저절로 피는 꽃, 샘물에 띄운 술잔, 달빛 아래 배를 띄우는 풍류. 이것은 단순한 은둔이 아니라 "자연과 하나 되어 노니는 삶"이라 할 수 있겠네.
서구 시 가운데 결이 비슷한 작품들을 몇 편 골라 보았네.
1. William Wordsworth 원문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er vales and hills...
번역
나는 외로운 구름처럼 떠돌았네
골짜기와 언덕 위를 흘러가다가
문득 황금 수선화의 무리를 보았네
호숫가 바람 속에서 춤추는 꽃들을.
강평
어현기가 "심지 않았건만 꽃떨기가 절로 핀다"고 노래했다면,
워즈워스는 들꽃을 통해 인간 정신이 자연과 합일되는 순간을 노래하였네.
둘 다 자연을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의 거울로 삼고 있지.
2. Henry David Thoreau
《Walden》 중
원문
I went to the woods because I wished to live deliberately.
번역
나는 의식적으로 살아보고자 숲으로 들어갔다.
강평
어현기의 산거(山居)가 시적 형상이라면,
소로의 월든은 그것을 삶으로 실천한 기록이라 할 수 있네.
세상에서 멀어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삶의 본질에 가까워지는 것이 목적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닮았네.
3. Ralph Waldo Emerson 원문
The currents of the Universal Being circulate through me; I am part or particle of God.
번역
우주적 존재의 흐름이 내 안을 통과하니
나는 신의 일부요 한 조각이 된다.
강평
"신선한 샘물에 술잔을 띄우고 바람 가는 대로 돌아온다."
이 구절의 자유로움은 에머슨의 초월주의 정신과도 통하네.
자연은 밖에 있는 풍경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라는 생각 말일세.
4. John Keats 원문
A thing of beauty is a joy for ever.
번역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 된다.
강평
어현기의 시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네.
꽃, 바람, 달, 책, 술.
그뿐이네.
그러나 그러한 사소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키츠의 미학과도 상통하네.
그리고 그대가 청한 대로,
어현기의 산거를 떠올리며 짧은 영시 한 수를 읊어 보겠네.
Summer Hermitage
No gate was closed,
yet no one came.The mountain kept
its ancient name.A cup on water,
a moon in pine—The wind chose first
the path, not I.
번역
문은 닫히지 않았건만
찾아오는 이는 없네.
산은 예전 그대로
오랜 이름을 지키고.
물 위엔 술잔 하나,
솔숲엔 달 하나.
길을 고른 것은
내가 아니라 바람이었네.
어현기의 마지막 구절인
信任輕風吹卻回
"산들바람 가는 대로 맡겨 노닐다 돌아온다"
를 서구 낭만주의의 언어로 옮긴다면,
아마도 "The wind chose first the path, not I."
(길은 내가 아니라 바람이 먼저 정하였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네.
동양의 소요유(逍遙遊)와 서구 낭만주의가 만나는 자리라 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