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瀟灑園 소쇄원에 제하다 金麟厚(조선의 시인)
瀟灑園中景 소쇄원 가운데 풍경은
分明畫裏看 그림속인양 분명하도다
風生修竹外 바람은 대숲 밖에 일고
月上小樓端 달은 소루 끝에 오른다
담박하고 간결한 하서의 한시일세
결이 닮은 서구시 몇 편 번역하고
그대 청연이 차운해 읊조려보게나
과연 하서(河西) 김인후의 시다운 품격이로세.
瀟灑園中景
分明畫裏看
風生修竹外
月上小樓端
겨우 스무 자 남짓한 말로
소쇄원의 정경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세워 놓았구나.
특별한 감정도 없고,
억지 철학도 없고,
다만 "보이는 것을 그대로 본다."
이 담박함은 오히려 동양 선시(禪詩)의 경지에 가깝다네.
서구 시 가운데서도 이러한 "정적(靜的) 서정"을 보여 주는 작품들이 있지.
1. 윌리엄 블레이크의 짧은 시
William Blake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번역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들꽃 하나에서 하늘을 보라
손바닥 안에 무한을 담고
한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하서와의 닮음
소쇄원의 풍경을 보며 그림을 본 하서와,
모래 한 알에서 우주를 본 블레이크.
둘 다 작은 풍경에서 큰 세계를 본다네.
2.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In a Station of the Metro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번역
군중 속에 스쳐 가는 얼굴들.
젖은 검은 가지 위 꽃잎들이여.
해설
원문이 단 두 행뿐이지만,
하서의 시처럼 설명이 없다.
그저 장면 하나.
독자가 스스로 침묵 속 의미를 발견하게 하네.
3. 로버트 프로스트
Robert Frost
Nothing Gold Can Stay
Nature's first green is gold,
Her hardest hue to hold.
번역
봄의 첫 푸름은 황금빛,
그러나 가장 오래 머물지 못한다.
해설
김인후가 달과 바람을 보았다면,
프로스트는 순간의 찬란함을 본다.
둘 다 사색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 줄 뿐이라네.
이제 청연이 하서의 운취를 따라 차운해 보겠네
次題瀟灑園
瀟灑園邊坐
소쇄원 가에 앉으니
山光入酒盃
산빛이 술잔에 드네
竹深風自語
대숲 깊어 바람 홀로 말하고
月白鳥忘歸
달 밝으니 새도 돌아감을 잊는구나
번역
소쇄원 가에 조용히 앉으니
산 그림자 술잔 속으로 스며든다.
깊은 대숲에서는
바람만이 스스로 이야기하고,
밝은 달 아래서는
새마저 돌아갈 길을 잊는다.
한 수 더 읊어 보세.
夜坐瀟灑園
人靜溪聲遠
사람 고요하니 시냇물 소리 멀리 들리고
天空月色新
하늘 비어 달빛은 더욱 새롭다
不知千載後
천 년 뒤에도 알 수 없으나
誰與此心親
누가 이 마음과 벗이 될까
번역
사람의 말은 사라지고
시냇물 소리만 멀리 흐른다.
텅 빈 하늘에
달빛은 오늘 처음 생긴 듯 맑은데,
천 년 뒤에는
누가 이 마음을 알아줄 것인가.
하서의 시를 오래 들여다보면
화려한 기교보다도 오히려 Tao Yuanming 도연명과,
Wang Wei 왕유의 계보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네.
말은 적고,
풍경은 맑고,
사상은 숨겨져 있으며,
독자는 시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바람 소리와 달빛을 듣게 되는 법이니 말일세.
달은 작은 누각 끝에 오르네.
번역
소쇄원의 풍광은
한 폭의 그림처럼 맑고도 또렷하다.
대숲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작은 누각 위로 달빛이 걸려 있구나.
강평
하서의 시는 감정을 토해내기보다
풍경 속에 정신을 숨겨 놓는다네.
"그림 같다"는 말도 단순한 찬사가 아니라,
자연과 마음이 서로 어긋남이 없는 상태
를 말하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