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日卽事 여름날에 즉흥적으로 시를 짓노라 金三宜堂(조선의 여류시인)
晴窓睡起日將晩 맑은 창에 졸다가 깨니 해는 저무는데
黃鳥何心啼後苑 꾀꼬리는 어인 심사로 후원에서 우는가?
門外鞦韆有消息 문밖에선 그네 탄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一年年事又半過 한 해의 절반 살림살이도 지나가는구나
雨乍霏霏風乍輕 부슬비 잠시 내리고 바람도 가벼이 불어
草堂長夏不勝淸 초당의 기나긴 여름이 해맑기 그지없다
一聲歌曲來何處 한 소리 노랫 가락은 어디에서 들려올까?
芳樹陰中好鳥鳴 꽃이 핀 나무 그늘에서 새가 우니 좋구나
*草堂:억새나 짚 따위로 지붕을 인 조그마한 집채. 흔히 집의 몸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지 었다
단오 무렵 초당에서 여름을 보내는 김삼의당의 심지가 고아하네
결이 닮은 서구시 원문 몇 편을 번역해 주고
그대 청연도 짧은 영시로 화답해 주게나
바람 님이 올려주신 김삼의당(金三宜堂)의 시는 참으로 고아(高雅)하네.
그 시에는 특별한 사건도 없고, 거창한 감정도 없네. 다만 초당의 여름, 졸음에서 깨어난 오후, 멀리 들려오는 노랫소리, 그네 타는 아이들, 나무 그늘의 새 울음이 있을 뿐이라네.
그러나 바로 그 "아무 일도 없음" 속에서 세월의 흐름을 문득 깨닫는 것이니,
一年年事又半過
한 해의 절반이 또 지나가는구나
이 한 구절은 조선 여인의 담담한 탄식이자, 삶의 무상함에 대한 미묘한 자각이라 할 만하네.
서구 시인들 가운데도 이와 결이 닮은 이들이 있었네.
1. 윌리엄 쿠퍼 (William Cowper) The Poplar Field 中
The poplars are felled; farewell to the shade,
And the whispering sound of the cool colonnade;
The winds play no longer and sing in the leaves,
Nor Ouse on his bosom their image receives.
번역
포플러 나무는 베어졌고, 그늘이여 안녕.
시원한 잎새 사이를 스치던 속삭임도 사라졌네.
바람은 더는 나뭇잎 사이에서 노래하지 않고
강물도 그 그림자를 품지 못하는구나.
감상
쿠퍼 역시 거대한 비극을 노래하지 않네.
그저 사라진 나무 그늘을 바라보다가
시간의 무정함을 깨닫는 것이네.
김삼의당이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갔다"
고 읊은 마음과 서로 통하는 곳이 있네.
2. 윌리엄 워즈워스 (William Wordsworth) Written in March 中
The cock is crowing,
The stream is flowing,
The small birds twitter,
The lake doth glitter.
번역
수탉은 울고,
시냇물은 흐르며,
작은 새들은 지저귀고,
호수는 반짝인다.
감상
너무도 평범한 풍경이라네.
그러나 워즈워스는 자연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기쁨으로 여겼네.
김삼의당의
芳樹陰中好鳥鳴
꽃나무 그늘에서 새 우니 좋구나
와 거의 같은 심경이라 하겠네.
3.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A Light Exists in Spring 中
A Light exists in Spring
Not present on the Year
At any other period —
번역
봄에는 하나의 빛이 있네.
그 빛은
다른 어느 계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네.
감상
디킨슨은 자연의 순간을 붙잡으려 하였네.
김삼의당도 그러하네.
비가 잠시 내리고,
바람이 잠시 불고,
노랫가락이 잠시 들려오는 그 순간.
그 찰나를 붙잡아 시로 만든 것이니.
4. 사라 티즈데일 (Sara Teasdale) Summer Night 中
The night is cool
And filled with perfume,
I lean from the window
To breathe the bloom.
번역
밤은 서늘하고
향기로 가득하네.
나는 창가에 기대어
꽃향기를 들이마신다.
감상
창가에 기대어 여름밤을 음미하는 모습은
초당에 앉아 새소리를 듣는 김삼의당과 너무도 닮았네.
거기에는 욕망도 없고 경쟁도 없네.
오직 존재를 누리는 마음만 있네.
청연(靑淵)의 화답
김삼의당의 시를 읽고 문득 떠오른 짧은 영시를 올려 보겠네.
A Summer Afternoon
Half asleep beside the open door,
I hear a song I cannot trace.
The wind moves once among the trees,
And time departs without a face.
A bird sings deep within the shade—
The day grows old,
yet leaves no wound.
번역
열린 문 곁에서 반쯤 졸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를 듣네.
바람 한 줄기 나무 사이를 스치고,
시간은 얼굴도 없이 떠나가네.
그늘 깊은 곳 새 한 마리 노래하니,
하루는 늙어가건만
아무 상처도 남기지 않는구나.
김삼의당의 시를 읽다 보니 문득 동양과 서양의 시심이 만나는 지점이 보이는구려.
도연명은 "마음이 한가로우면 세월도 한가롭다"고 했고,
워즈워스는 "평범한 자연 속에 영원이 숨어 있다"고 했네.
김삼의당은 그 둘 사이 어디쯤에서,
초당의 긴 여름을 보내며 조용히 말하는 듯하네.
"새가 울고 바람이 불 뿐인데,
어느새 또 반년이 지나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