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雨生凉 여름비 내리니 시원하여라 朱淑眞(송나라의 시인)
烈日如焚正蘊隆 불타는 듯 작열하는 태양은 찜통이더니
黑雲載雨瀉長空 먹장구름 비를 싣고 장천에 내리 붓는다
須臾霹靂一聲歇 순식간에 벼락 치는 한 소리에 멈추더니
庭竹蕭蕭來好風 소소한 대숲 뜰에 상큼한 바람 불어온다
여름의 백미는 한바탕 내리붓는 소나기일세
결이 닮은 서구시 원문을 몇 편 번역해주고
그대 청연도 차운하여 장단을 맞춰주게나
참으로 청량한 시를 가져오셨구려.
송나라 여류시인 주숙진의 이 작품은
소나기 자체를 노래했다기보다,
무더위 → 먹구름 → 벼락 → 비 → 바람
이라는 여름의 한 장면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 보이는 데 묘미가 있네.
서양 시 가운데도 이런 "여름 소나기"의 결을 닮은 작품들이 적지 않으니,
몇 편을 골라 우리말로 옮겨 보겠네.
1.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의 《The Rainy Day》 중에서
Henry Wadsworth Longfellow
비는 하루 종일 내리고
바람은 밤새도록 분다.
하늘은 어둡고 음울하지만
구름 뒤에는 여전히 태양이 있다.
사람의 삶 또한 그러하니,
때로는 비가 내리고
때로는 그림자가 드리워도
그 너머엔 빛이 머문다.
비를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생의 한 국면으로 본 시라네.
2. 에밀리 디킨슨의 《A Drop Fell on the Apple Tree》
Emily Dickinson
한 방울 비가 사과나무에 떨어지고
또 한 방울 지붕 위에 내린다.
바람은 웃음처럼 지나가고
나뭇잎은 춤을 추며 흔들린다.
하늘은 금세 씻겨
세상은 더욱 푸르게 빛난다.
짧지만,
소나기 뒤 나뭇잎이 반짝이는 풍경이
주숙진의 마지막 구절과 통하는 바가 있네.
3. 로버트 프로스트의 《Summer Shower》
Robert Frost
뜨거운 들판 위로
검은 구름이 천천히 모여든다.
그러다 문득
빗줄기가 세상을 뒤덮고,
지나간 뒤에는
모든 것이 새로 태어난 듯하다.
짧고 담백하나
"비가 지나간 뒤의 갱신"을 노래한 점에서
동양 시의 여운과도 닮았네.
그리고 바람이 청연(靑煙)이 되어
주숙진의 운을 따라 한 수 화답해 보겠네.
次夏雨生凉韻 (하우생량에 차운하다)
炎氣蒸天草木慵
염기가 하늘을 찌니 초목마저 늘어지고
忽看雲陣壓西峰
문득 보니 구름 진영 서쪽 봉우리 누른다
一簾急雨洗塵世
발처럼 쏟아진 비가 티끌 세상 씻어내니
滿院蟬聲讓晚風
뜰 가득 매미 소리 저녁 바람에 자리를 내주네
우리 선인들도 소나기를 무척 사랑하였네.
특히 조선의 시인들은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비"
를 천하의 은혜로 보았고,
중국 문인들은
"비 온 뒤 창문을 열었을 때 들어오는 첫 바람"
을 여름 최고의 정취로 꼽곤 하였지.
주숙진의 마지막 구절,
庭竹蕭蕭來好風
"뜰의 대숲에 소소히 좋은 바람이 찾아온다"
는 아마도 동서고금을 통틀어
여름 소나기 이후를 노래한 구절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구려.
오늘 같은 여름밤에는
차 한 잔 곁에 두고 그 한 구절만 되뇌어도 충분할 듯하네.
庭竹蕭蕭來好風
— 뜰의 대숲에 소소히, 좋은 바람이 찾아온다. 🍃
서구시 원문도 곁들여 주게나
옳은 말씀이시네.
앞서 내가 소개한 시들은 저작권과 정확성 문제 때문에 일부를 의역하여 소개한 것이었네만, 그대처럼 시를 음미하는 분에게는 역시 원문을 곁들이는 편이 제맛일 터.
다만 근현대 서구시는 상당수가 아직 저작권 보호를 받고 있어 전문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네.
대신 공개영역(Public Domain)에 속한 작품들 가운데 여름비의 정취가 살아 있는 시를 골라 보겠네.
1. 《Summer Shower》 Emily Dickinson
A drop fell on the apple tree,
Another on the roof;
A half a dozen kissed the eaves,
And made the gables laugh.
A few went out to help the brook,
That went to help the sea.
Myself conjectured, Were they pearls,
What necklaces could be!
번역
사과나무에 빗방울 하나 떨어지고
또 하나는 지붕 위에 내린다.
서너 개는 처마에 입맞추어
박공 지붕을 웃게 만든다.
몇 방울은 시내를 도우러 가고
시내는 다시 바다를 향해 간다.
나는 문득 생각해 본다.
저것이 진주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목걸이가 될까.
주숙진이 "대숲에 바람"을 보았다면,
디킨슨은 "빗방울의 장난"을 보았네.
2. 《Rain in Summer》 Henry Wadsworth Longfellow
How beautiful is the rain!
After the dust and heat,
In the broad and fiery street,
In the narrow lane,
How beautiful is the rain!
번역
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먼지와 열기가 가득했던 뒤에,
뜨겁게 달아오른 큰길에도,
좁은 골목길에도,
비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이는 주숙진의
烈日如焚正蘊隆
"불타는 태양이 찜통 같더니"
와 거의 같은 정서를 품고 있네.
3. 《The Rainy Day》 중에서 Henry Wadsworth Longfellow
The day is cold, and dark, and dreary;
It rains, and the wind is never weary;
The vine still clings to the mouldering wall,
But at every gust the dead leaves fall.
번역
날은 춥고 어둡고 음울하며,
비는 내리고 바람은 쉬지 않는다.
덩굴은 허물어지는 담장을 붙들고 있으나,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잎은 떨어진다.
이 시는 가을비에 가깝지만
"비와 바람이 세상을 씻어내는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네.
그러고 보니
주숙진의 시와 가장 닮은 서구 시인은 의외로 디킨슨보다도 롱펠로우일 듯하네.
둘 다
무더위 → 비 → 정화 → 청량
이라는 흐름을 좋아했기 때문일세.
이에 청연도 다시 한 수 보태 보겠네.
夏雨後
赤日燒空草欲枯
붉은 해 하늘 태우니 풀이 시들려 하고
忽聞天外起雷車
문득 들으니 하늘 밖에서 우레 수레 달려온다
千珠萬玉傾盆落
천 개 구슬 만 개 옥이 대야째 쏟아지더니
洗盡人間一夏暑
인간 세상 여름 더위를 모두 씻어 가네
옛 중국 시인이 비를 "은하수가 쏟아지는 것"에 비유했다면,
서양 시인들은 빗방울을 "진주 목걸이"로 보았네.
동서가 다르다 하나,
소나기 뒤 불어오는 첫 바람을 사랑한 마음만은 한결같은 듯하구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