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천재 막스 거슨
생명살림 자연의학연구원장
팔당생명살림 상임이사로 있을 때
동료로부터 “의료, 먹을거리, 농사는 한 뿌리다”라는 소책자의 번역 초고를
검토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저는 막스 거슨 박사와의 질긴 인연에 깜짝 놀랐습니다.
호시노 요시히코 박사는 한국자연건강학회
이 소책자를 번역한
저와 함께 일한 동료여서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생명을 다투는 절박한 상황에 있으면서도
정보의 홍수 속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수많은 암환자들에게
이 조그만 책자가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번역 초고를 읽는 저의 마음도 가벼운 흥분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정농회에서 책이 출판되어 나오자 한 가지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막스 거슨 박사에 대한 소개글이 있었으면 암환자들에게 더욱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죠. 그러다가 지난 달
자연의학을 하는 사람은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있다면서
자연의학자와 창조주와의 소중한 인연의 끈을 강조하셨습니다.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은 막스 거슨 박사를 국내에 소개하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1995년
거슨 박사의 딸이 운영하는 멕시코의 티화나 병원을 함께 방문한 뒤,
귀국하자마자 “건강을 위한 시민의 모임”을 결성하면서 대체의학의 시대를 알리는 한편,
막스 거슨 박사의 저서들을 번역 출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불현듯 이 소책자에 막스 거슨 박사의 삶을 실으면 어떨까 생각하였습니다.
아마 회장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그분께서 막스 거슨 박사의 소개글을 남기셨을테니까요.
지금부터 약 60년 전인
미국 하원의 한 위원회에서는
현대 의학의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청문회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클로드 페퍼 상원의원이 제안한
“암치료의 권위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암치료법을 발견토록 대통령에게 위임하는 법안”(의안 s1875호)의 청문회였습니다.
미국은 당시 해마다 16-17만 명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최근 자료를 찾아보니 2006년에는 56만 명이 죽었다는군요)
이러한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자
페퍼 상원의원이 원자력에너지 개발과 같은 그런 열의와 규모로
1억 달러의 예산을 연방정부 차원에서 암치료법 개발에 투자하자는 법안을 제출한 뒤 열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청문회에서는 10년 전 나치 독일을 탈출해서
뉴욕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식사요법으로 말기암을 완치시키고 있는
막스 거슨(Max Gerson, M.D.) 이라는 한 의사와
그의 환자 다섯 명으로부터 그가 거둔 놀라운 치료 실적에 대해
직접 증언들을 듣고 있었습니다.
척수 중앙의 신경조직에 종양이 있어서
손발조차 움직일 수 없었던 17세 소녀 앨리스 허쉬,
종양이 두개골 깊숙이 파고들어가서 수술조차 할 수 없었던 군인 조지 김슨,
대장암으로 수술을 하였으나 종양이 너무 커진데다
많은 기관들에 침범하여 제거하지 못하고 인공항문 수술을 한 부인,
임파육종 환자로서 종양들이 배와 목과 사타구니 등 온 몸에 번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부인,
유방암으로 유방절제 수술을 하였으나 목에 다시 종양이 나타나 목을 움직이지도 못했던 부인 등
모두 현대 의학에서 포기했던 말기암 환자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은 직접 건강한 몸으로 나타나 자신들에게 일어난 기적과도 같은 변화를 생생하게 증언하였습니다.
청문회에서는 이분들의 과거 치료 기록들을 검토하는 한편
거슨 박사로부터 직접 암치료법의 개요를 설명들었으며,
거슨의 치료 효과를 확인하는 동료 의사들의 증언도 함께 청취하였습니다.
증언들이 너무나 생생하여 청문회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암과의 전쟁이 이로써 종식될 수 있구나 하는 희망에 차 있었습니다.
페퍼의 위원회는 조사 결과에 깊은 감명을 받고
막스 거슨 박사가 주도하는 암치료 연구에 1억 달러 자금지원을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역사는 진실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위원회의 1억 달러 예산지원 결정은
미국립암연구소의 강한 반대에 부닥쳐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날 하원 위원회에서 했던 환자들의 증언은 청문회 기록으로 남아 있어서 한 가닥 아쉬움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청문회의 결과대로 법안이 통과되고 거슨 박사의 치료법이 연방정부 차원에서 연구되었다면
이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냈을까 하는 생각에
한탄과 함께 분노마저 치밀어오르게 됩니다.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화학상과 평화상) 라이너스 폴링 박사도 이를 두고
암치료의 발전을 저해한 가장 불행한 사건이라고 개탄하였습니다.
이 날의 청문회가 있은 지 60년이 흘렀습니다.
현대의학은 스스로 의료 기술이 날로 발달하고 있다고 하면서 줄기세포니 유전자 치료니 하지만
암치료 분야에서는 한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 때와 마찬가지로 수술, 항암제투여, 방사선 치료라는 3대 요법만 고수하고 있습니다.
거슨요법은 아직도 미국에서 금지된 요법이어서
거슨 요법으로 치료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멕시코 국경을 넘어 그 딸이 운영하는 티화나의 병원으로 가야만 합니다.
불치의 피부결핵을 고치다
막스 거슨 박사는
1881년 독일 폰그로비츠의 한 부유한 채소유 생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폴란드계 독일인으로서 유태인이었습니다.
의대생으로 재학하던 시절 거슨은 심한 편두통을 앓고 있었습니다.
한쪽 머리가 아프면서 눈두덩이 부어오르고 열과 구토가 뒤따랐는데
이러한 편두통이 시작되면 거의 2-3일을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 있어야만 하였습니다.
거슨은 자신의 편두통이 식사와 관련이 있다는 한 논문에서 힌트를 얻어
직접 음식을 바꾸어가면서 어떤 음식이 편두통을 일으키는지를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주식 삼아 먹고 있던 매운 소시지, 생선 크림, 포도주 맥주 등의 알코올,
소금과 육류가 범인이었습니다.
이들을 식단에서 제외시키자 편두통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의대를 졸업한 후 빌레펠트에서 일하면서 거슨은
편두통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 식사요법을 안내하면서
자신의 식사요법이 다른 환자들의 편두통도 없앤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놀라운 얘기를 듣게 됩니다.
편두통 때문에 식사 처방을 받고 있던 한 환자가 자신의 피부결핵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얼굴과 몸에 사마귀 같은 발진이 나타나면서 흉측한 모습을 만드는 피부결핵은
당시에 불치병으로 간주되고 있던 병이었습니다.
놀란 거슨 박사는 즉시 다른 피부결핵 환자들에게도 자신의 식사요법을 안내해 주었는데 이들 모두 기적적으로 낫게 됩니다.
거슨 박사가 거둔 성공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흉부외과 및 결핵 전문의인 자우에르브루흐 박사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자우에르브루흐 박사가 여행 중
열차 안에서 거슨 박사로부터 피부결핵을 고친 한 환자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피부결핵이 완치된 모습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자우에르브루흐 박사는 거슨 박사에게 공동 실험을 제안하였습니다.
자우에르브루흐 박사의 실험에는 모두 450명의 말기 피부결핵 환자들이 참가하였고 4명을 제외한 446명의 환자가 완치되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이 임상 실험은 유럽의 저명한 의학잡지에 실려 온 유럽이 그 성과에 환호를 보냈습니다.
거슨은 독일의 여러 결핵 요양소를 감독하였으며
유럽의 저명한 의학 저널에 10여 편의 논문을 기고하였습니다.
그의 명성은 서유럽 전역에 알려져 많은 대학과 병원에서 폭넓은 강의 활동을 하였습니다.
다양한 질병에 잘듣는 식사요법
거슨 박사는 다양한 환자들에게 실험하면서
자신의 식사요법이 관절염, 간질환, 심한 피부병,
다발성경화증, 갑상선 질환, 신장병, 천식 등의 호흡기 질환,
심장병과 순환기 질환에도 잘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암 환자에게는 적용을 못하고 있었는데
1928년 담관암을 앓고 있던 한 여성의 부탁을 받고 암을 치료하게 됩니다.
처음 이 전화를 받았을 때 거슨 박사는
자신은 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데다가 전공분야도 아닌데 손을 대어 동료의사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는 없다면서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성은 피부결핵과 관절염을 고친 거슨 박사의 성과를 잘 알고 있다면서
치료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는 서약을 할 테니
자신을 고쳐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거슨은 결핵 환자를 위한 식사요법과 같은 처방을 해주었는데
놀랍게도 6개월이 지나자 이 여성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곧이어 이 환자로부터 소개받은 두 명의 위암환자도 찾아오게 되었는데
이들도 모두 완쾌되었습니다.
이처럼 거슨은 몇 명의 암환자에게 성공을 거두고 있었지만
여전히 결핵 치료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유럽에서는 당시 암보다도 결핵이 더욱 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일련의 치료과정을 통해 거슨은
결핵이나 암과 같은 퇴행성 질병이 생기는 원인은
화학비료로 인한 토양의 변질과 살충제 등의 농약으로 인한 농산물의 독성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거슨 박사는 이를 ‘외부 신진대사’라고 불렀습니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신진대사가 건강해야
우리 몸 안의 신진대사도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땅과 땅에서 자라는 모든 것들은 우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 신진대사에 필요한 영양소를 생산하는 외부 신진대사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땅은 적절히 돌봐져야 하고 결핍되거나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과 동물에게 심각한 퇴행성 질환을 낳게 될 것이다.”
거슨 박사는 인체가 매우 오랫 동안, 때로는 몇 십 년에 걸쳐 이루어진
이러한 영양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서 과일과 채소의 즙을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생즙을 마시면 생즙이 거의 알코올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혈류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슨 박사는 이러한 이유로
하루에 맥주잔으로 13잔의 생즙을 마시도록 처방하였는데
이는 채소의 무게만으로 20킬로그램에 해당하는 많은 양입니다.
식사요법에서 비롯된 거슨의 연구는 식품과학 토양학 농학에까지 넓혀지게 되었습니다.
거슨 박사는 독일 군대의 비상식량을
영양이 죽어있는 통조림에서 영양이 살아있는 건조식품으로 바꾸도록 만들었고,
지방 행정부의 자문단으로서
땅의 지력을 높이고 우수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영농법에 조언을 하였습니다.
피난과 미국 정착
그러나 거슨 박사의 동료들은 그가 이룬 성공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전공분야도 아닌 데 손을 대고 있으며
식사요법을 통한 치료가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심지어 거슨이 거짓 엑스레이 사진으로
결핵에 걸리지도 않은 환자를 치료하고는 완치되었다고 속이고 있다고 모함하였습니다.
거슨은 이러한 비판을 영원히 잠재우기 위해 임상실험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최종발표를 6주 앞둔
히틀러가 유태인을 구금하고 강제수용소로 이송하기 시작하여
거슨은 모든 연구 결과를 내팽겨둔 채 가족과 함께 독일을 탈출해야만 했습니다.
독일을 떠나 비엔나와 런던을 거쳐 1936년에 뉴욕에 자리잡게 된 거슨 박사는
뉴욕에서 다시 자격시험을 보고 1938년 의사 면허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뉴욕에서의 의사 생활은 평탄치 못했습니다.
거슨 박사는 생활의 기반이 완전히 뿌리뽑힌 채
이민을 와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여야 했습니다.
병원의 설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식사요법을 제대로 적용하는 데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거슨은 암을 고치기 위해 모든 문헌을 탐독하며 암치료에 매진하였습니다.
거슨 박사는 많은 암환자들을 무료로 봐주었습니다.
거슨 박사의 식사요법에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그의 치료로 완치된 환자들은 재단을 만들어 거슨 박사의 치료를 돕기도 하였습니다.
거슨의 병원에서 목숨을 건지는 말기암 환자들이 늘어나자 미국의학협회의 압력도 가중되었습니다.
미국의학협회에서는 그가 식사요법으로 치료를 계속하면 면허를 취소하겠다고 줄곧 협박을 해왔습니다.
그는 이 당시의 실정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한쪽에서는 미국의학협회의 칼날이 제 목을 겨누고 있었는데
등 뒤에는 말기암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학협회에서는 거슨이 증명되지 않은 요법으로 암치료를 하고 있으며,
그 요법도 비밀에 부치고 있다고 비난하였으나
실제로는 거슨이 의학협회지에 논문을 발표하려는 것을 철저하게 막고 있었습니다.
막스 거슨 박사는 유럽에서는 십여 차례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의학협회의 방해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알릴 길이 없었습니다.
거슨 박사는 마지막 수단으로 1958년
자신의 치료법 전부를 밝힌 “암식사요법”(A Cancer Therapy: Results of 50 Cases) 이라는 책을 펴내게 됩니다.
30년간의 임상을 토대로 펴낸 이 책에서 거슨 박사는
첫 장의 제목을 “나의 치료법의 비밀”이라 붙이고
“두말할 것도 없이 내 치료법은 비밀이 아니다.
이렇게 제목을 붙인 것은 많은 의사들이 끊임없이,
심지어는 비난조로 나의 치료법을 밝히라고 요구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서두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책은 거슨 박사가 의학뿐만 아니라
화학, 생리학, 식품영양학, 농학 등 다방면의 전문서적을 섭렵하여
암의 원인과 치료에 관한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록으로 엮어진 50명의 다양한 말기암 환자의 사례는
어떤 환자도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긴 바이블이기도 합니다.
거슨 박사는 이 책을 인류에 남겨놓고
이듬해인 1959년 의문의 비소 중독으로 죽음을 당합니다.
75세 때 거슨 박사의 도움으로 생명을 위협하는 당뇨병을 고쳤던 슈바이처 박사는
거슨 박사가 서거했다는 비보를 듣고 다음과 같은 조사를 보냈습니다.
“그 분은 우리 의학사에 나타난 가장 뛰어난 천재 중의 한 분이셨습니다.
그 분의 기본적인 생각들 중에서 많은 것들이
그 분의 이름과 관계되지 않은 채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 분이 남기신 유산은 주목을 받게 될 것이며,
마침내 그분을 제 위치에 자리잡게 할 것입니다.
그 분이 치유시켜 주었던 많은 분들이
그 분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여 줄 것입니다.”
커피 관장
이 소책자에는 커피 관장이 따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 호시노 요시히코 박사가 대장암 수술을 받아
커피관장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커피관장은 거슨 요법의 핵심 사항이므로 따로 소개를 드립니다.
치료의 첫걸음은 제독에서 시작합니다.
커피관장은 간을 자극하여 독성 담즙을 배출하게 함으로써
축적된 독을 제거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진통 효과도 뛰어나 관장을 자주 하면 진통제를 완전히 끊을 수 있습니다.
관장의 요령은
증류수 1리터에 밥숟가락 3개분의 유기농 커피(살짝 볶아 갈아놓은 것)를 넣고
3분간 센 불에서 끓이다가 15분 동안 뭉근히 끓입니다.
그리고는 체온으로 식혀서 관장기에 넣고 주입합니다.
주입하고 난 뒤에는 관장액을 12분 내지 15분 동안 배설하지 않고 보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카페인이 직장 정맥을 통해 간을 자극하게 되고 독성 담즙을 배출하게 합니다.
독성 담즙이 배출될 때 때로 십이지장과 소장에 경련을 일어나면서
담즙이 위로 들어가서 메스꺼움과 함께 담즙을 토해내기도 합니다.
이런 때는 박하차를 많이 먹어서 위의 담즙을 씻어냅니다.
암환자는 매일 커피관장을 식사 후 한 번씩 세 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잠자기 전에는 하지 않으며
어떤 종류든지 몸에 고통이 있거나 불편한 증상이 있으면
즉시 추가로 관장을 더해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