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선(善)한 행동이 문제가 될까?
저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저는 참 융통성이 없고 고집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면 누가 뭐라든 그걸 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이를 테면 중고교 학창시절,
쉬는 시간이면 꼭 칠판을 제가 나가서 닦았는데
급우들은 이런 저를 보고 잘난체 한다고 매우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칠판을 깨끗이 하는 것이 옳은 일인데
칠판을 닦는 것을 보고 비난하는 저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많은 급우들이 “우~” 하는 야유를 등 뒤로 들으면서까지도 태연히 칠판을 닦았죠.
이러한 저의 태도는 학창시절을 참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학에서는 연극회에 가입하여 학기 내내 연극회에 붙어살다시피 하였는데
연극회는 온갖 조명도구며 세트며 분장도구며 술병이며 담배꽁초가 어질러져 있어
늘 지금 막 이사온 집 같이 엉망이었습니다.
저는 틈만 나면 연극회실을 청소하였지요.
청소를 깨끗이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였거든요.
그러다가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하였습니다.
군에 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연극회 회실은 늘 어질러져 있었습니다.
갑자기 전 선배로서 후배들의 잘못된 태도를 바꿔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을 모아놓고 “자기 사는 집도 이렇게 지저분하게 쓰지 않는데
함께 쓰는 공간을 이렇게 지저분하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훈계 자체도 좋지 않은데, 이런 훈계가 잦아지니 잔소리가 되었고
후배들은 술자리에서 어렵게 저의 이런 태도에 대해 불만을 얘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저는, ‘왜, 옳은 일을 얘기하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후배들의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후배들은 저와 말이 통하지 않아 때로는 울면서까지 항의한 후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태도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이런 저의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심성계발프로그램”이라는 훈련을 서울 명동의 전진상 교육관에서 받으면서였습니다.
심성계발프로그램은 여러 가지 게임을 하면서
우리의 느낌들을 서로 나누고, 이 과정에서의 피드백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이 훈련은 저의 대학교 은사이신,
안젤라 미스투라 교수님(이태리 분입니다.
27세의 나이로 1956년 전쟁이 막 끝난 한국에 오셔서
가난한 이들과 여성들을 위해 참으로 많은 일을 하신 분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알츠하이머 병으로 고생하시다가,
작년 당신이 평생 몸을 바치신 이 땅에서
귀천하셨습니다.)이 이끌고 계셨지요.
훈련 중에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옳은 일”을 해야 하는 저는 평소 습관대로
방석을 한쪽 구석으로 치우게 되었습니다.
앞이 간신히 보일 정도로 방석을 높이 쌓아들고 나르는 저를 보고
누군가가 제게 “거들어 드릴까요” 하고 제안해 왔습니다.
저는 평상시처럼 “아니, 괜찮아요.” 하고는
발걸음을 떼려는데 누군가가 제 어깨를 붙잡았습니다.
뒤돌아보니까 안젤라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미소를 띤 채
“라이몬도(저의 가톨릭 세레명), 혼자 하지 말고
함께 나눠 하는 게 더욱 좋지 않을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안젤라 선생님과 함께
순간, 저는 마치 비밀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부끄럼으로 확 달아올랐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어딘가 숨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병(病)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홀로 선한 일을 하려는 오만함,
그리고 다른 사람을 저의 기준에 맞추어 재단해 버리는 나쁜 버릇.
독선(獨善)이 왜 홀로 독(獨)자에 착할 선(善)인지 그제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왜 연극회 후배들이 저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했는지도 그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움을 느끼곤 저는 정말 저의 나쁜 버릇을 고치고 싶었습니다.
심성계발훈련을 마치고는 바로 연극회 후배들을 만나
진심으로 그 동안의 저의 태도에 대해 사과하였습니다.
“후배들, 용서해줘. 정말 그동안 내가 너희들에게 너무했어.
나 때문에 너무나 답답하고 속 상했지. 이제 다시 그러지 않으마.”
이렇게 사과한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연극회실을 청소하려는 습관은 바뀌지 않아 예전처럼
연극회실에 들어가면 청소부터 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후배들이 청소를 하지 않아도 그들이 밉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연극회실을 청소할 때, 제가 빗자루를 들고 쓸기라도 하면
이리 저리 옮겨다니며, 청소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후배들이
이제는 걸레며 쓰레받이며 찾아다니면서
“형, 같이 해” 하고 함께 나서기 시작한 겁니다.
선한 것, 그 자체는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행동이 때로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때로는 자신이 옳다고 세운 행동의 기준으로
남을 쉽게 판단하게 만드는 잘못을 저지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험 이후 저는 옳은 일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어오면
그때마다 즉시 저의 대답은 “네 좋지요. 함께 해요”입니다.
자신의 선한 행동이 “누군가와의 관계를 해치고 있다면
그 선한 행동이 독선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돌이켜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곳 영양에서도, 또는 이사 오기 전 살던 지역의
친구들로부터 이런저런 소식들을 듣게 됩니다.
부부 사이가 나빠서 하소연 하는 얘기들도 있고
이웃끼리 코드가 맞지 않아 힘들어 하는 얘기도 있습니다.
제가 유연성이 없었듯이
유연성 없는, 너무나 완고한 그들의 태도가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얘기를 듣다가
“원숭이도 나무에서 세 번은 떨어지지 않는다는데
왜 부부들은 똑 같은 문제를 두고 똑 같은 태도를 고수하면서 계속 싸울까.” 하고
묻게 됩니다.
싸울 때 문제가 되는 관점을 달리해 본다든지
상대방에 대한 표현을 달리해 본다든지
때로는 표현의 시차를 달리해 본다든지
여러 대안이 있을 터인데,
싸울 때마다 같은 문제로 싸우고
싸우는 방법도 언제나 똑같은 것입니다.
색연필 케이스에는 다채로운 색깔이 많이 있습니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보라, 검정, 하양….
하양으로 어두운 밤을 표현할 수 없고
빨강으로 눈부신 신록을 표현할 수 없고
초록으로 불타오르는 단풍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저마다의 색깔이 모두 필요합니다.
세상은 다채로운 색깔이 뿜어내는 아름다운 향연입니다.
그런데 하양이 “쟨 너무 빨개서 싫어” 하며 빨강을 내칩니다.
빨강은 “잰 너무 하얘서 곁에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아” 하며 하양을 싫어합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색깔과 향기를 갖고 있지만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특히 “옳고 그름”의 판단은 독선에 빠지기 쉽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학창 시절, 쉬는 시간에 누구보다도 먼저 나서서 칠판을 닦는 바람에
다른 급우들이 칠판 닦을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심성계발훈련 때 방석을 먼저 나름으로써 다른 참여자의 휴식을 방해한데다
함께 거드는 것을 막음으로써 선행의 기회를 빼앗아버렸습니다.
누군가 미운 사람이 있을 때, 그 미운 사람이
배우자이건, 직장 동료이건, 한 동네 이웃이건 간에
그 미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새해 들어 한 번쯤은 성찰해 봄직 합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청초한 작성시간 11.05.13 정말 좋은 말씀 감사하네요
저도 깨달았습니다~ㅎ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네요~ㅎ -
작성자리틀쿠바 작성시간 12.07.19 제가 몸 담고 있는 조직에서도 제가 이런 행동을 하고 있었네요...이제는 돌아보며 고쳐야 할때가 온것 같습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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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가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8.17 이제서야 댓글을 보고 인사드립니다.
언제쯤 이곳 영양에 오시려나 기다리고 있기도 하지요. -
작성자달마 작성시간 12.07.20 저도 독선에 일각연있다고 마눌님이 늘 독화살 날려요, 독선이 착할선자 였군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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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목화 작성시간 12.08.29 좋은 글 가슴에 확 들어 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