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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록펠러 이야기 1] 러들러 대학살

작성자가온 고재섭|작성시간15.01.15|조회수694 목록 댓글 0

 

 

록펠러 (John Davison Rockefeller)는 열심히 일해 돈을 벌고

죽기 전에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한,

모범적인 인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선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아

악마의 화신으로 묘사되기도 할 정도로

많은 국민들의 공분을 산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분야든 투기를 할 수 있으면서도

세금은 내지 않아도 되는 재단(록펠러 재단)을 설립했고

록펠러 재은 오늘날 세계의 모든 언론, 제약, 무기, 의료,

식량, 화학, 에너지 등 거의 전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

록펠러를 알지 않고는 우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는

세계의 주요 시스템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록펠러는 자신이 투자한 제약회사의 이익을 위해

미국 자연의학 말살을 주도하기도 하여

그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있던 중

마침 국내에 록펠러재단을 다룬 책

(그들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는가, 허현희 지음)이 나와

일부를 발췌 요약하여 소개한다.

 

 

록펠러는 1870스탠더드 오일(오늘날 세계 최대 정유회사 엑슨 모빌의 전신)을 설립하여,

뛰어난(사악하기도 한) 경영 수완(매수, 협박, 산업스파이 등)을 통해 시장을 장악했다.

한때 미국 석유 판매의 95%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록펠러의 허락 없이는 단 한 통의 석유도 운반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1879년부터 가격조작 독점음모 리베이트 강요 등의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30여년 간 도망을 다녀야 했다.

 

 

록펠러는 41개 회사를 관리하는 신탁 방식의 유령회사를 만들어

세금을 피해 엄청난 돈을 벌었을 뿐만 아니라

온갖 불법행위에 대한 법적인 책임도 교묘히 피해나갔다.

그는 돈으로 정치인과 법관들을 매수하여 끝내 무죄가 되거나

솜방망이 처벌만 받았다.

 

지난해는 록펠러가 장악하고 있던 회사

콜로라도 연료철강회사의 노조탄압에서 비롯된

러들러 대학살(Ludlow Massacre) 발발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러들러 대학살을 통해

록펠러의 성공 과정의 단면을 소개해 본다.

 

록펠러는 미국에서 두번째 큰 철강회사이며

전체 17위의 기업인 콜로라도 연료철강회사( Colorado Fuel & Iron Company)

1902년 매입한다.

콜로라도 연료철강회사는 록펠러의 손에 들어간 후

노동 착취가 시작되는 데 이런 식이다.

 

-      노동자들의 채탄 노임을 낮췄다.

-      주당 80시간을 일하고도 남은 시간은 회사 이윤을 위한 일에 소비해야 했다.

-      노동자들은 회사가 제공하는 방 두 개짜리 사택에서 비싼 임대료를 내며 살아야 했다.

-      임금은 회사 운영의 구내매점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으로 지급했다(당연히 회사 매점의 물품은 일반 상점의 물품보다 비싸다)

-      노동자는 회사가 운영하는 침례교회에 의무적으로 십일조를 납부해야 했다.

-      노동조합 결성을 막기 위해 총잡이를 고용했다.

-      노동조건이 열악하여 많은 노동자들이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1913년 결국 파업을 일으켰다.

회사는 파업에 참여하거나 동조하는 노동자를 모두 해고하고

가족을 사택에서 쫓아냈다.

경영진에 매수된 보안관과 사설탐정들은 때때로

이들 노동자를 대상으로 학살과 방화를 저질렀다.

1913 10 17일에는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천막촌과 보안관 사이에서 총격이 오가며

최악의 사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보안관들은 데스 스페셜(death special)이라는 특수장갑차에 올라

천막촌을 누비며 수십 명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회사측은 서치라이트로 천막촌을 비춰주며 보안관을 지원하였다.

 

 

 

윌슨 대통령은 이 파업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록펠러와 록펠러 2세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무산되었다.

그 때마다 록펠러는 자신은 경영에서 물러났다며 아들을 만나라고 하였고

아들은 아들대로 자신이 이윤을 기다리는 주주일 뿐이며

경영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고 피했 던 것이다

(이런 말들은 나중에 의회 청문회에서 거짓임이 들통난다)

 

파업은 다음해 봄까지 이어졌다.

러들러 대학살이 일어난 날은 부활절 다음날인

1914 4 20일 아침이었다.

 

천막촌에 갑자기 울려퍼진 총성과 함께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기관총과 장갑차에 밀린 노동자들은 언덕으로 물러났다.

술에 취한 방위군들은 떼를 지어

기름통과 횃불을 들고 다니며 천막마다 불을 질렀다.

전투가 끝난 그 이튿날,

전선 수리공이 공사를 위해 그곳을 방문하여

불에 그을린 천막을 벗겨내자

총격과 추위를 피해 땅을 파고 지하에 숨어 있던 여자 둘과

아이들 열한 명이 서로 뒤엉켜 불에 그을린 채 죽어 있었다.

 

파업 기간 중 사망자는 콜로라도 주 발표로는 69,

록펠러측 발표로는 199명이었다.

그 중에 32명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었다.

 

 

 

풀리처상을 받은 유명한 언론인 월터 리프만

록펠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사상 최대의 부를 긁어 모은 사람이 있다.

그는 자본주의라는 교주의 아들이다.

그는 모든 평등에 대한 최대의 부정이며,

공화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다.”

 

헬렌 켈러록펠러는 자본주의의 악마입니다.

그는 앞에서는 자선을 하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힘없는 노동자들과 그들의 아내,

아이들을 잔인하게 총으로 죽였습니다.”고 비난하였다.

 

반면, 록펠러 재단의 재정 지원을 받는 주류 역사학자들은

록펠러 부자가 노동자들을 가족같이 대해서

노동자들은 아무런 불만을 갖지 않고,

늘 록펠러에게 고마워 했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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