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살아가는 이야기

앵무새 경제학자들

작성자가온 고재섭|작성시간17.07.08|조회수398 목록 댓글 0




앵무새 경제학자들

 

김성훈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 명예회장, 전 농림부장관)





 

나는 1965년부터 2015년까지 50년간 대학 강단에서 농업경제학, 유통경제학, 농업금융론, 그리고 경제사상사(대학원 박사과정)를 강의해왔다. 고백하건대, 처음 25년간은 감히 잘못 가르쳐 왔다는 생각이 든다. 피(血)가 있고 살(肉)도 있고 영혼(靈魂)을 가진 사람(homo sapiens)을 놓치고, 피도 눈물도 감정도 없는 합리적인 경제인(homo economicus)을 상정하여 그 행위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연구분석한 신고정학파 경제이론을 가르쳤었다. 이들 신고전학파 경제이론은 곧이곧대로 현실 경제현상과는 동떨어져 있음에도 앵무새처럼 교과서 이론만을 되새겨 강의해왔다.




 

대학 강단에서만 유효한 경제학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가 경제를 주도하고 경제의 대부분은 독과점 재벌기업이 지배하며 나머진 지하경제가 판을 치고 있다. 교과서론적인 순수 자유시장경제는 말뿐이지 실제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독과점 기업과 정부 주도의 관변 경제구도가 경직화되어 시장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왜곡되고 경직된 자유시장 경제구조를 합리화시키기는커녕 그를 감싸 안고 있는 말로만 시장경제 만능주의가 경제정책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농촌경제학, 노동경제학, 복지경제학, 환경경제학 등 비주류 부문별 경제학 분야는 현상유지에 급급할 뿐 생명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더욱 경제적 약자와 취약계층의 멍에가 되어 사회 양극화를 배태하고 있다.


그런데 1998년과 2008년 그리고 2017년 불어 닥친 세계적 경제 정체의 원인에 대해 주류(mainstream) 경제학은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경제공학적(economic technologist) 차원의 예측이 하나같이 빗나가기 일쑤이다 보니 이젠 아무도 정부와 한국은행 KDI, KREI의 예측과 처방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분적 계량분석(partial econometric analysis) 결과에 기반한 연구논문들은 실제 누가 이용하고 있는가. 돈을 대주는 관변 발주처들과 기레기 언론들만이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쯤되면 용역업자와 연구소, 교수 학자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경계 구분마저 모호해지고 있다.

한 때,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는 우리나라 경제학계의 촉망을 받았던 경제학자이었다. 그의 이론과 원칙은 강단에 서 있을 때만 유효했다. 마찬가지로, 총리나 부총리, 장관들의 경제정책은 교단에서와 따로 놀았다. 그리고 어느 경제학자들도 IMF 외환위기나 금융파생상품에 의한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 식량위기, 식품안전성 위기, 환경생태계 위기, 기후변화 위기도 마이동풍 식 이었다.

그동안 경제학자들이 가정투성이의 계량경제학 모델이나 돌려서 스스로 자가 도취해온 사이 경제이론이 경제현실과 동떨어져 따로 노는 현상이 점점 상규인 것처럼 인정되고 고착화 한 것이다. 미국 유학파 중심의 경제학 교수들은 다투어 정부당국과 대기업, 그리고 재벌 언론의 비위에 맞추어 시장경제와 신자유주의 정책이 인류를 빈곤으로부터 구제할 것이라고 찬양해 왔었다. 경쟁력 없는 기업과 산업은 퇴거되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농업 농촌 농민 문제는 구제할 수 없는 퇴출대상이 되고 말아 지금 이 순간도 자꾸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 노동자, 중소상공인, 서민경제도 점차 설 자리가 좁혀지고 있다.

 

Democracy 비젼 대신에 등장한 Corporatocracy(대기업자본 지배체제)

그러나 제2차 세계적 금융위기가 휩쓸면서 부터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 “신자유주의는 죽었다. 인간적・사회적 경제학이 살아나야 한다. 이제 다시 정부가 적극 공적인 규제활동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들이 고개를 들고 구체적인 정부정책의 변화마저 덩달아 일어나고 있다. 




하바드대학의 제프리 삭스 교수는 백성들의 필요와 견해에 기반하는 민주주의 비젼 대신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등장한 기업자본들의 로비 영향력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Corporatocracy(대기업 자본 지배) 시대의 도래를 현대 민주주의 정체의 위기로 규정한다. 대한민국에선 아직도 그런 주장, 그런 사람을 ‘ㅇㅇ좌파’라고 부르기 때문인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입을 닫고 몸을 도사리고 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선 “신자유주의가 절대 죽지 않는다.” 오히려 더 기세를 부리면 부렸지 죽을 리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부정 불법행위로 실형을 선고받은 재벌총수들이 지금 다시 활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명박근혜 정권 말기, 조선・해운업의 몰락은 우리 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한다. 특히 해운업만은 국가가 앞장서 붙잡아 놓아야 했다. 악덕기업주 가족들은 죽더라도 기업은 살리는 결단이 필요했다. 현실은 그 반대로 마무리되고 있다.




나는 이제 경제학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실정에서 북유럽의 모델인 휴머니즘에 입각한 ‘사회적 시장경제’ 정책이 우선적인 대안으로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시장경제도 살리고 구악의 상징인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바로 사회적 시장경제 정책이다. 시장경제의 장점을 살리되 모든 사람의 행복을 중시하고 약자에 대한 배려도 유념하는 깨끗한 “사람 중심의 경제학 이론” 즉, 사회적 시장경제의 새 패러다임을 찾아내야 할 때이다.

특히 지금 지구촌과 우리 삶 속에는 일찍이 겪지 못한 난제들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지구의 異常的인 기후변화, 에너지 및 식량위기, 그리고 환경생태계 위기는 그중에서도 시급히 유념해야 할 문제다. 단언컨대 신자유주의로는 이 같은 글로벌한 경제 및 기후・환경・식량농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제 사회적 시장경제와 복지, 환경의 관점에서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오늘을 지탱해온 자연과 환경생태계와 뭇 생명체를 보듬어 안고 함께 공존공영하는 방법을 찾는 생명의 철학이 필요하다. 대운하 보다는 환경생태계가, 토건업자들의 이윤보다는 팔당 유기농민이 더 값지고 중요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

자본에 종속된 기레기 보수언론들은 이 같은 사상의 흐름에 대하여 여전히 좌파라는 낙인을 찍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댐 둑을 허물고 하천의 생태계를 살리며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북유럽과 캐나다 등의 사람 중심, 환경생태 제일주의도 좌파란 말인가? 그런 입장과 그런 언론은 대기업 자본 위주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반대하고 4대강 대운하 사업을 반대해도 좌파라 한다. 생명・안전을 우선하려는 대한민국의 천주교, 불교, 원불교, 일부 기독교계의 움직임마저 좌파 투성이라는 말이 된다. 이 같은 메카시즘적 정치 사회 풍토 하에서 살아 숨 쉬는 뭇 인간과 생명체를 살리자는 생태경제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같은 다국적/대기업자본 지배 체제(Corportocracy)와 시대를 극복하려는 경제학자들의 분발이 그 어느 때도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시장경제 패러다임 찾아야

이 시대에 “참 경제학”을 공부하려는 자라면 부익부 빈익빈에 의한 사회적 양극화 현상을 어떻게 풀 것인지, 사회 소외계층의 의료복지 교육 문화적 낙오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그리고 전 지구적 종말을 재촉하는 기후변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등에 대하여 답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확신한다. 아쉽게도 지금 우리나라 경제학자교수들은 용역사업하기에 너무 바쁘다. 학자라는 사람들이 밥벌이 교수직에 안주하여 돈을 받지 않으면 연구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자기기만이고 자기모순이다. 사회적 경쟁에서 낙오한 약자들을 위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학자들이 기피당하고 있다. 직업인으로서의 교수, 보직자로서의 교수만 존재하고 「진정한 선비학자」가 줄어들고 있다. 참다운 애정으로 제자를 키우고 생명사상과 보편적 복지이론을 물려줄 수 있는 스승이 사라지고 있다. 공부하려는 학생들도 단순히 스펙을 쌓고 출세할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대학을 다닐 뿐이다.

현재와 앞으로의 경제학은 환경생태학, 사회경제학, 문화경제학, 보편적 복지학 등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시장경제의 가장 큰 적(敵)은 지금 이 순간도 시장경제만이 인류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독과점 대기업과 극보수 상업언론, 개발주의에 눈이 먼 권력과 끝으로, 아니 맨 앞에 서 있는 앵무새 강단 경제학자들 자신이다. 

(본문 중의 이미지는 이해를 돕기 위해 카페 운영자가 임의로 삽입하였습니다 - 고재섭)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