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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시냇가

[스크랩] 몸은 스스로의 지혜를 갖고 있다.

작성자노래하는 망치|작성시간11.10.28|조회수96 목록 댓글 1



이제라도 그대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호흡이 나갈 때마다 그대는 더욱 고요해진다.

호흡이 들어올 때마다 더욱 긴장하게 된다.

그 이유는 날숨은 죽음이고 들숨은 삶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전체적인 이완을 의미한다.

완전히 이완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삶은 전적으로 이완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삶과 죽음, 이것은 존재의 양면이다.

들이쉬는 쉬는 숨은 삶이고, 내쉬는 숨은 죽음이다.

그대는 어느 날 죽는 것이 아니라 매호흡 마다  죽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힌두교에서는 호흡 속에서 삶은 헤아린다.

그들은 삶을 연수로 따지지 않는다. 

탄트라, 요가, 고대인도의 모든 전통적 신념 체계들은 호흡의 개수로 삶을 헤아린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일정한 호흡을 빠르게 한다면 그대는 결국 일찍 죽게 될 것이다.

그대신 호흡의 간격을 늘여서 천천히 호흡한다면 그만큼 오래 살 것이다.

 

 동물들을 관찰해 보면 이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오래 사는 동물, 예를 들어 코끼리는 아주 느리게 숨을 쉰다.

반면에 개는 수명이 짧다. 호흡이 빠르기 때문이다. 개는 사람보다도 훨씬 빨리 호흡한다.

 

 탄트라나 요가 그리고 다른 인도 전통들도 그대의 수명에서 호흡을 헤아린다.

그대에게 주어진 호흡의 개수를 모두 채우고 나면 그대는 죽는다.

그래서 이 방편은 내쉬는 숨을 통해서 침묵속으로 깊이 들어가도록 한다.

그대가 '아흐'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대가 텅 비게 된다는 뜻이다.

단 한순간이라도 삶은 그대에게서 빠져 나간다.

그대는 죽은 것이다.

극히 짧은 순간 동안 말이다.

그대가 그 순간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대를 완전히 변화시킬 것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이 삶이 그대의 삶이 아니며

이 죽음이 그대의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들숨과 날숨을 넘어선 어떤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그 모두를 초월해서 지켜보는 영혼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 지켜봄은 쉽게 일어날 수 있다.

그대가 호흡 사이에 텅빈 공간을 인식하는 한 말이다.

삶은 모든 긴장과 함께 저절로 소멸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시도해 보라.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방법이다.

일반적인 방법은 언제나 들이쉬는 숨을 강조한다.

내쉬는 숨에 대해서는 이 방편에서만 강조된다.

 

우리는 항상 숨을 들이쉬는 것에만 정신을 쏟는다.

결코 그것을 밖으로 내던지지 않는다. 

우리는 들이쉬고, 우리의 육체는 그 것을 밖으로 내던진다.

그대의 호흡을 관찰하라.

그러면 그대는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숨을 내쉬지 않는다. 

내쉬는 것은 몸이 알아서 한다.

우리는 언제나 들이쉴 줄만 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럴 힘만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내쉬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내쉬는 숨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들이쉰 다음에는 언제나 저절로 내쉬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내쉬지 않고서는 다시 들이 쉴 수가 없다.

 

그래서 내쉬는 숨은 필요악으로 여겨저 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내쉬는 숨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호흡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삶에 대한 우리의 전체적인 태도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이 집착한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나가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불행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있다.

그대가 변비로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 역시 삶을 대하는 그대의 태도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대는 언제나 들이마시기만 할 뿐 결코 내놓을 줄을 모른다.

그래서 변비로 고생하기 마련인 것이다.

변비 역시 밖으로 내보내는 문제이다.

하지만 공포가 거기에 있다.

그대는 축적하기만 할 뿐,

내보내는 데서 생기는 허탈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축적한 것이 독이 되더라도 그냥 버틴다.

 

만약 그대가 오직 들이쉬기만 하고 내쉴 줄을 모르면 그대의 모든 호흡은 그대에게 독이된다.

그대는 그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대는 생명력을 독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길이다.

내쉬는 것이야말로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쉬는 것은 그대에게 쌓인 독을 배출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정화의 과정이다.

그리고 삶은 중독의 과정이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보일 것이다.

삶은 그대에게 독을 쌓는 과정이다.

살기위해서 그대는 많은 것들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용과정에서 그것들은 독으로 변한다.

그대는 들이 쉴 때 산소를 이용한다.

그 산소는 체내에 남아 있는 찌꺼지를 독으로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 산소때문에 삶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모든 것을 독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호흡은 바다의 조수와 같다.

그대가 숨을 내쉴 때 바닷물은 빠져나가고

물에 잠겨 있던 해안선이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이 방편의 요점이다.  

이 방편에서는 내쉬는 숨에 역점을 둔다.

그대가 이 방편을 어느정도 사용한다면 그대의 마음에 많은 변화가 일어날것이다.

만약 그대가 변비로 고생을 하고 있다면 들이쉬는 숨에 대해 잊어버려라 .

오직 내쉬기만 하고, 들이쉬지 마라.

물론 그대가 숨을 내쉬면 자연히 공기는 다시 들어온다.

내말은 그대의 집착을 들이쉬는 데 두지 말고 내쉬는 데 두라는 뜻이다.

그렇게 해도 절대 죽지 않으니깐 걱정하지 마라.

몸은 언제나 그대가 의식하지 않는데도 알아서 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그대의 변비는 곧 낫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심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면 그때도 내쉬는 데 역점을 두라.

들이쉬지 마라. 그러면 그대의 심장병의 고통을 덜 수 있다.

그대가 계단을 올라갈 때 들이쉬지 말고 내쉬기만 하라.

그러면 그대는 지치지 않고 높은 산도 오를수 있다.

이것은 무슨 원리인가?

 

그대가 내쉬는 것에 역점을 둘 때 그대는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자신을 열어젖히는 행위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자신을 닫아버린다. 공포때문에 말이다.

 

그대가 내쉬는 숨에 역점을 둘때

그대 삶의 모든 시스템은 변화하게 되고 죽음도 받아들인다.

거기에는 공포가 없다.

그대는 기꺼이 죽을수 있다.

그대는 기꺼이 죽을 수 있다.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살수 있다.

오직 그만이 삶의 심층부까지 깊이 들어 갈수 있다.

내쉬어라. 들이마시지 마라. 그대의 마음은 변화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탄트라의 간단한 방편들에 신빙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마음은 매우 복잡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간단한 방편으로 이 복잡한 마음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복잡하지 않다.

단지 어리석을 뿐이다.

어리석은 자는 항상 복잡하다.

현명한 사람만이 단순하다.

그대의 마음은 매우 간단한 현상이다. 

그대가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대는 그 마음을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

 

몸은 스스로의 지혜를 갖고 있다.

그것은 그대보다 더 현명하다. 그것을 방해하지 마라.

그대가 숨을 들이쉬려고 의식하는 한 그것은 방해 받을 것이다.

몸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하도록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라.

그대가 워낙 들이쉬는데 집착해 있기 때문에 나는 내쉬라고 말한다.

하지만 본래 호흡은 그대보다 육체가 더 잘 알아서 할 것이다.

 

몸은 절대로 극단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균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대가 들이쉬는 데 집착한다면 그때는 균형이 깨진다.

그대는 육체의 흐름을 좇아가지 못한다. 

무엇이 육체에게 필요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필요는 모든 상황을 만들어 낼 것이다.

 

따라서 육체를 허용하라.

그대가 할 일은 그저 묵은 숨을 내뿜는 일이다.

그대속에 들어간 공기를 내버리는 일이다.

그러면 자연히 호흡은 복부로 내려갈 것이다.

단전으로 내려갈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단전호흡이다.

그대의 의지로 하는 것은 단전호흡이 아니다.

그대가 하는 일은 그저 복부의 힘에 호흡을 맡기는 것 뿐이다.

그 방편은 바로 그대의 묵음 숨을 모두 내쉬는 것 이다.

호흡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만이 그대의 호흡은 완전히 밑바닥까지 도달 할 수 있다.

 

'아흐'와 함께 숨을 깊이 내쉬어보라.

거기에는 편안한 느낌이 흐른다.

이방편을 계속하면 그대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마음이 개발되기 시작한다.

그대가 들이쉬는 부분에 역점을 둘수록 불행한 마음의 악순환은 계속된다.

하지만 내쉬는 것에 역점을 두면 불행을 느끼는 마음은 점점 사라질 것이다.

강한 소유욕이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소유욕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말이다.

탄트라는 단지 그대의 호흡 방식을 바꾸라고 말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각성이 싹트기 시작한다.

모든 잘 못된것은 들이쉬는 데에 있고 ,

모든 좋은것, 아름답고 진실될 것은 내쉬는데에 있다.

그대가 거짓말을 할때는 결코 숨을 들이쉰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진실을 말할 때는 결코 숨을 들이쉰 상태에 있을 필요가 없다.

거짓말을 한다는 공포때문에 숨을 들이쉬는 것이다.

내쉬는 숨과 함께 그대의 진실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이 '아흐' 를 계속하라.

그러면 그대의 몸과 마음은 갈수록 건강해 질 것이다.

그리고 차원이 다른 평온과 고요가 자라날 것이다.

 

 

                                         - < 탄트라 비젼 2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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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sook1122 | 작성시간 12.01.28 댓 글 쓰 기 가 쉽 지 않아요 이 난 에 들어 오기 가 수 월 치 않 아서요
    좋은 글 올리신 프라브 님 감 사 함 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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