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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시냇가

[스크랩] 마음 속의 의자

작성자노래하는 망치|작성시간10.05.13|조회수2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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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뇌는 동시에 두 가지의 감정을 가질 수 없다.

곧 사람의 머리에는 오직 한 의자만 놓여 있어서

여기에 절망이 앉아버리면 희망이 함께 앉을 수 없고,

반대로 희망이 먼저 앉아버리면 절망이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차동엽 / 뿌리깊은 희망에서)

 

우리들 마음속 의자에는 희망과 절망이 번갈아 앉는다.

사랑과 미움이

진리와 허구가

믿음과 불신이

생명과 죽음이 번갈아가며 앉는다.

이것이 신앙자의 모습이다.

사람마다 상반된 두 개체의 크기의 비율만 다를 뿐

어느 한 쪽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 그리고 홀로 기도할 때는

진리가 있고,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고, 희망이 있다.

그런데 생활로 돌아가서는 다시 미움이 있고,

허구가 있고, 불신이 있고, 죽은 자의 모습이 있다.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이다.

진리를 쫓을 땐 허구는 옆으로 물러서 있고,

허구에 반응할 땐 진리가 옆으로 비켜선다.

한 자리에서 앉았다 비켜섰다 할 뿐 둘은 언제나 같이 있는 것이다.

신앙의 연륜이 많아도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평소에 이러한 이중 구조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모르니 모순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진리도 모르고 사랑도 모르고

죽은 것이 무엇인지, 산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왜 원치 않는 미움이 드는지,

왜 두려움이 밀려오고 절망감이 드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왜 모르는가?

그것들은 인간의 지각능력으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많은 종교인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신앙자들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알려 준 진리(말씀)가 있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예수님의 말씀과 경전의 내용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머리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란 얘기를 하는 것이다.

진리의 속성, 생명의 속성은 머리로 다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다.

그것은 작은 진리를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생명의 싹이 트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이해되고 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어놓은 진리는 예수님의 체험의 산물이다.

체험 속에서 싹이 돋았고 체험 속에서 함께 자란 것이다.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나가는 체험 속에서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사랑은 깊어지고 커졌으며

그 사랑을 펼치고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말씀은 선포되었다.

예수님이 선포한 말씀들은 결국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문자화되었지만,

그 출처는 사랑이었다.

실체가 된 진리와 생명으로부터 나왔다.

문자화된 진리는 실체의 일부이며, 상징이다.

그러므로 보다 더 정확하게 진리를 알려면

우리도 같은 종류의 체험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경험하지 않은 세계는 가슴에는 없고

단지 머리에 남아있는 희미한 그림자같은 것이다.

가슴에 지속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알려면 사랑해야 한다.

진리를 알려면 하나님의 존재방식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면 미움도 알 수 있고, 허구도 알 수 있다.

죽음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진리를 체험해야 거짓을 구별할 수 있고,

사랑을 체험해야 미움을 구별해 낼 수 있으며,

생명이 되는 과정에서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체험을 동반해서 말씀을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해답은 체험 속에 있으므로 생활 중에서 체험을 일으켜야 한다.

체험이 가져 온 느낌을 가슴에서 자각하고 더 큰 체험을 개발해야 한다.

체험과 자각의 반복 속에서 실체와 허구는 서서히 구분되어진다.

실체를 인정하고 존경하고 받들어야 한다.

실체를 확실하게 인정하고 존경할수록

그 반대세력인 거짓된 자아는 빠르게 비워질 것이다.

실체를 알고 인정하며 존경하게 되면 실체와의 관계는 비로소

생명의 관계로 진행되며 실체의 생명력을 전수받게 된다.

그것을 신성이라고 하며 그 신성은 새로운 자아를 창조한다.

신성이 자리 잡으면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깊은 평안과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신비한 느낌에 젖어 살게 된다.

결국, 진리와 희망과 사랑이란 한 몸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허구가 가져온 것들인

두려움과 체면과 위선들은 나의 마음의 의자에서 확실하게 떨어져 나가고

순수와 기쁨과 자유가 그 자리를 영구적으로 차지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의자에 무엇을 앉힐 것인지는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다.

매순간의 선택이다.

원치않는 것을 앉히고 싶지 않으면 무엇이

앉아있는지를 항상 확인해야 하며,

또 그것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함께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순간순간 호흡을 하듯 늘 지켜보아야하며

의자에 앉아있는 것을 교체하고 또 교체하는 마음의 작용을 반복해야 한다.

한편 이러한 노력들이 빠른 성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내용을 분명하고 세밀하게 고백하고

도움을 요청하며, 내어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내면의 어디에 어떻게 개입하는지 살펴보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신앙자들이 이러한 활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장 큰 걸림돌은 너무 바쁘게 산다는 것이다.

일인 3역, 5역을 담당하며 사는 상황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고,

자신을 관찰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특별한 실천에 옮길 시간이 없다.

여성의 경우에 더욱 그렇다.

현대 사회에서 세속적인 기준을 적용하여

가족의 요구, 사회의 요구에 대응하다보니 좀체 시간을 낼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에 답을 물어야 한다.

어떤 삶이 죽음에 가까운 삶이고,

어떤 삶이 생명에 가까운 삶인지를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세속적인 발전은 영적으로 보면 죽음의 늪으로 다가가는 길일 수 있다.

노후를 위한 세속적 대책은 육적인 패턴을 더욱 고착시키는 조치가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이 필요하고 유용하지만

어느 시기에는 가장 중요한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

과감한 재편성을 하는 용기와 기백이 필요하다.

나중에 여유로워지면 그때 가서 하겠다는 발상은 거짓 자아의 속임수일 뿐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세속적 삶을 재편성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부분으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 필요한 모든 것을 획득하고 누리는 것이며,

자신만의 삶은 극히 일부만을 획득하고 작은 기쁨만을 누릴 수 있고,

그나마 그것을 얻기 위해 더 큰 고뇌와 어두움을 겪어야 한다.

하나님께 다가가는 길은

끝없는 극기와 고난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제는 착각이 되었다.

하나님의 축복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 예전의 선지자들은 그런 노정을 걸었지만,

지금은 자신만 원하면

특별한 조건이나 고행 없이 물붓듯이 퍼붓는 은총을  체험할 수 있다.

주변 사람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런 은총을 체험한

사람들이 곳곳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믿음이다. 선택이다. 인정과 존경을 통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그런 과정 속에서 은총은 내 것이 된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을 권리가 충분하며,

단지 믿고 요청하여 은총 속에서 행복하게 되기를 바란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의 의자에 어떤 것을 올려놓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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